805화. 바둑돌을 쥔 자는 하나가 아니다
계연이 무언가를 느끼고 눈을 떠 선방의 창가를 바라보니, 하늘에서 빛 한 줄기가 흐르듯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계연은 손가락을 접어 점을 쳐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잠시 후에 백발에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사찰 밖에 내려서더니, 고개를 들어 사찰의 오래된 편액과 반쯤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심스레 대문을 열어젖히니, 마침 젊은 승려 하나가 바닥을 쓸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래된 대문은 움직일 때마다 귀를 찌르는 소음을 냈기 때문에, 바닥을 쓸던 승려도 곧 바깥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주,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만약 향을 올리러 오신 거라면 향촉을 준비해오셔야 합니다. 저희 절에서는 향을 팔지 않아서요.”
사찰은 물론이고 이 주변에도 향촉을 파는 노점은 하나도 없었다. 이 사찰은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참배객들이 많지 않았고, 이에 장사꾼들도 자연스레 향불이 왕성한 사찰 앞에 자리를 폈기 때문이다.
“아, 스님, 이 사찰에 혹시 계씨 성을 지닌 선생께서 머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계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바닥을 쓸던 승려는 머리를 긁적이며 노인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사찰 안에 계씨 성의 선생이 한 분 머물고 있긴 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그럼 저야 감사한 일이지요!”
노인은 사찰 안에 들어선 뒤 승려를 향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는 계 선생님이 이 사찰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사찰 밖에 도착한 후에도 전혀 계연의 기운을 읽을 수가 없었다.
승려의 안내를 받은 노인은 곧 계연이 머무는 객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연은 마침 건물 앞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백평이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노인이 계연을 향해 예를 올리자, 계연이 옆에 놓인 다른 의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리 앉으세요, 연 도우. 감사합니다, 스님.”
“아닙니다, 두 분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아직 빗질을 끝내지 못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승려는 이렇게 대답한 뒤 서둘러 떠나갔다. 사찰은 넓고 머무는 이는 적었기 때문에, 그가 청소해야 할 곳이 무척 넓었다.
승려가 떠나자, 연백평은 계연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곧장 이렇게 털어놓았다.
“계 선생님, 한 달 전에 선생님께서 보내신 전언에 따라 천기륜을 모셔 천기를 점쳐 보았습니다. 저희는 옆에서 법력을 펼치며 협조했고요……. 하지만 그렇게 엿본 천기는 온통 어둡고 혼란스럽기만 해 무척 불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형께서 저를 보내 선생님께 결과를 알려드리라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랬군요.”
계연은 일찍이 이를 예상했기 때문인지 담담한 모습이었다.
연백평이 다시 말을 이었다.
“참, 계 선생님. 2주 전에 건원종에서 저희 천기각에 동천을 다시 열어, 사형께 천기가 가리키는 위치가 어딘지를 점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사도(邪道)의 무리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명대종(九鳴大鐘)을 울려 바깥에 있던 건원종 제자들은 물론이고, 건원종에 속한 9파(派) 13동(洞) 22도(島)의 수사들을 모두 소집했다는 걸 보니 큰일이 일어난 듯합니다.”
“음?”
그러자 계연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연백평을 향해 물었다.
“건원종이 어디에 자리한 곳인가요?”
“천우주(天禹洲) 변방 바다의 어원산(御元山)에 있습니다. 그 종문(宗門)의 수사들은 고요함을 즐겨 바깥일에 잘 나서지 않고, 그러니 자연히 외부 세계와의 분쟁도 일어나지 않는 편이지요…….”
연백평이 자세히 설명하는 동안, 계연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손가락으로 가볍게 무릎을 두드렸다.
그 순간, 계연은 태양혈 부근에서 미세한 통증을 느껴 정신을 집중했으나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의식 안 세상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둑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움직였어!’
한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은 계연은 저 바둑돌 뒤에 바둑돌을 쥔 자가 있음을 확신했다.
“후우…….”
그 바둑돌을 바라볼수록 계연은 두통이 점차 심해지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잇새로 숨을 들이마신 계연은 그런데도 관찰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내 그는 외부 세계와의 모든 감응을 끊고, 심신의 힘을 의식 세계 안의 자신의 법상에 전부 집중시켰다.
“법천상지(*法天象地: 천지의 힘을 빌려 자신의 능력을 공간 내에서 허용되는 최고치에 도달하게 하는 술법. 서유기(西遊記)에서는 머리로 하늘을 떠받치고 두 발로 땅을 디딘 거인처럼 묘사됨).”
의식 안 세계에서 계연의 목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그의 법상이 하늘에 닿을 듯 끝없이 거대해지며 실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해, 달, 별, 산천과 물길이 법상에 모여들고, 구름과 현황의 기운이 주위를 감돌며 산수와 합쳐지더니 그의 법의(法衣)가 되었다.
이내 계연은 별을 같은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반쯤 뜬 법안을 활짝 열어, 자신의 신념(*神念: 수행자의 의지, 기억, 생각을 가지며 입정 후에 활성화되는 것으로, 영혼과 비슷함)을 어두운 빛을 뿜는 바둑돌에 침투시켰다.
‘신유(*神游: 몸은 움직이지 않고 혼(魂)이 어떤 곳에 날아가는 것)…….’
계연은 몽롱한 와중에 자신이 아득한 거리와 무궁한 시간을 뛰어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이 천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저 사방이 흐르는 빛과 혼돈으로 가득 찬 것만 느껴졌다. 그러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이나 생각처럼 보이는 각종 화면이 눈앞을 스쳤다.
계연은 머리가 깨질듯한 통증과 동시에 누군가의 희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껏 흥분한 듯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하…….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이 빌어먹을 천지가 드디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군……. 그 울부짖는 소리만 아니었으면 영원히 잠들 뻔했어……!”
“서두르지 마, 일단은 시험 삼아 조금만 움직여보는 게 좋겠어.”
“남은 돌이 얼마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려고?”
“예전에 남겨둔 것 중 아직 남아있는 게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보지. 추일(樞一).”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고 뚝뚝 끊기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계연은 목소리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추일’이라는 말과 동시에 계연의 모호한 시야에 어두운 빛이 모여들었고, 이내 그 꿈틀대는 빛무리 사이로 별 하나가 나타났다.
“으윽……. 아……!”
계연은 마침내 격렬한 두통을 더 견뎌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며 눈을 떴다. 이를 본 연백평은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계, 계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계연은 원래도 천기각 수사들의 마음속에 남다른 지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천기각 수사들을 이끌고 천기전에 든 후로는 모든 천기각 수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도행이 어떤 경지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계연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연백평은 불안에 떨었다. 그는 계연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어째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계연과 같은 선계의 고인(高人)을 위협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 생기면 이는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는 계연에게 이렇게 묻는 동시에 귀갑(*龜甲: 거북의 등딱지)을 불러냈다. 그것은 옅은 황색의 빛에 뒤덮인 채 두 사람과 몇 척 떨어진 거리에 떠올랐는데, 굴곡 있는 무늬가 또렷하게 나뉘어 있었고, 표면에는 법광이 물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 귀갑은 전방위를 견고한 보호막으로 둘러쌀 수 있는 보물이었다.
“계 선생님,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나타난 겁니까?”
연백평은 최대한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계연은 두통이 진정되자 연백평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저 때문이에요. 제가 방금 천기를 강제로 엿보았거든요.”
강제로 천기를 엿보았다는 말을 들은 연백평은 ‘직업병’을 떨치지 못하고 즉시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무언가 엿본 거라도 있으신지요? 아, 제가 경솔했습니다. 분명히 중대한 무언가를 보셨겠지요. 혹 건원종의 일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는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가 자신의 말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는지, 얼른 방식을 바꿔 이렇게 질문했다. 도행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계 선생께서 고통을 느낄 정도였으니, 그걸 입 밖에 냈다간 원기(元氣)가 크게 상하지 않겠는가?
계연은 많은 말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연관이 없다고 할 수도 없겠네요. 긴장할 필요 없으니, 일단 이 보호막은 거두세요.”
“예.”
연백평이 가볍게 손짓하자 그들을 감싼 거북 등껍질 무늬의 둥근 빛무리가 사라지며, 작은 귀갑이 연백평의 손에 떨어져 다시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참, 건원종에서는 소식만 전하고 사람은 보내지 않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서신이 날아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을 뿐입니다. 건원종 수사들도 곧 대외적으로 공개된 천기동천의 입구에 도착할 겁니다.”
“그럼 천기각에서는 건원종을 돕기로 결정했나요?”
연백평은 그다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각은 각 종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건원종 도우들도 이번에 급박한 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니, 설령 저희가 동천을 봉쇄한 상태라고는 해도 분명 도울 겁니다.”
“어떻게 말이죠?”
계연은 이제 두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조금 전의 통증은 그조차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낼 정도였으나, 실질적으로 입은 손상은 별로 없었다. 물론 심신의 소모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계연은 이제 완전히 회복한 상태로 다시 의자에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계연의 물음에 더해 지금의 상황을 종합해본 결과, 연백평은 계 선생님이 건원종 혹은 건원종이 맞닥뜨린 일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라면 건원종에서 찾아온 도우들을 천기동천으로 들여보낸 뒤, 도행이 높은 수사로 하여금 건원종에서 요청한 일에 대해 점괘를 쳤을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이 일은 저희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겠군요. 제가 사형께 직접 점괘를 쳐 달라고 건의하고, 최소 두 명 이상의 장수옹을 건원종으로 보내겠습니다.”
특별히 소질이 없는 것만 아니라면, 선도(仙道)의 수선자들은 하늘과의 감응을 통해 스스로도 어느 정도 점괘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천기를 엿보고 점을 치는 것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천기각에는 비할 수 없을 터였다.
연백평의 대답에 계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자 도우께 이 일을 중시해야 한다고 전해주세요. 건원종 수사들이 놓치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사소한 부분에도 신경을 써달라고요.”
“선생님께서는 저와 함께 천기각으로 돌아가서 건원종 도우들을 기다리지 않으십니까?”
연백평은 계연이 이 일에 이토록 관심을 쏟고, 천기를 엿본 후에 보인 반응을 보고는 계연도 자신과 함께 돌아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계연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여씨 집안에 태어난 아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자 연백평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에게 예를 취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여기 잠시 머무시고, 연모(某)는 일단 천기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만약 건원종 도우들이 천기각에 도착하면 그들을 데리고 함께 선생님을 뵈러 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계연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세요. 살펴 가세요, 연 도우!”
계연의 동의를 얻은 연백평이 다시 예를 올리자, 계연도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예를 취한 뒤 떠나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