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화. 믿음이 생기다
“인도를 궤멸하려 한다고요? 선생님의 말씀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인도에 해를 끼칠 거란 말씀입니까?”
그러자 계연이 짧고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갖은 수단을 다 쓰려고 할 겁니다.”
“하, 하지만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텐데요. 이 혼란을 일으킨 이들은 천겁이 뭔지도 모르는 그저 그런 요마들이 아니잖습니까? 설마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 겁니까?”
그러자 계연이 기쁜 기색은 전혀 담기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벌이요? 두렵지 않을걸요.”
동시에 계연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천지의 반응을 보려는 게 바로 그들의 목적인데, 어떻게 두려울 수가 있겠어?’
그저 속으로 조금 꺼려질 뿐일 것이다. 게다가 설령 무슨 큰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들은 모두 버린 패로 여기면 되는 존재였다. 진정한 배후는 이 대국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참! 천우주에 가서 만약 노 선생님을 만나거든, 이 물건과 제 말을 대신 전달해 주세요.”
이렇게 말한 계연은 오른쪽 손목에 감겨 있던 금색 끈을 풀었다. 그 정교한 끈의 끝자락에는 가느다란 술이 달렸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백옥 조각이 달려있었다. 위에는 일반적인 문자와는 다른 특수한 신령한 문자가 새겨진 모습이었다.
“이, 이게……?”
연백평은 하마터면 놀라 소리치려다가, 계연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는 급히 놀란 마음을 수습했다. 그는 현기자와 건원종 도우들을 한번 쳐다보고는 먼저 손을 뻗어 곤선승을 받았다.
“제가 잠시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때가 되면 직접 노 도우께 전해드리지요.”
“전하실 말씀이란 게 무엇이신지요?”
여수선자가 이렇게 묻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천기각 도우들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계모가 여러분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라, 천기를 누설할 수가 없어서요.”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현기자와 연백평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다 됐어요, 이제 어서 천우주로 가보세요. 바로 가는 게 좋겠어요.”
“예!”
계연의 말에 현기자와 연백평은 즉시 응답하며 단숨에 찻물을 비웠다. 그리고는 건원종 수사들과 함께 다시 한번 예를 올린 뒤 총망히 떠나갔다.
계연은 세 사람이 떠난 후, 다시 바둑판을 꺼내 세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찰을 나온 현기자는 더는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곧장 연백평에게 말했다.
“사제, 나한테도 좀 보여주게.”
“아, 그렇지. 같이 보자.”
연백평과 현기자는 서로 딱 붙어 걷기 시작했다. 연백평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금 전 계연이 준 금색 끈이 나타났는데, 백옥 위에 새겨진 문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이 특기를 살려 점괘를 쳐보니 그것이 ‘곤선승’이란 뜻임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두 분 선배님, 그것이 대체 무슨 보물입니까?”
“크흠, 별것 아닐세. 노 도우께 전해 드려야 하는 호신용품이지.”
두 사람은 정확히 대답해주지 않고 건원종 수사들을 데리고 구름을 몰아 떠나갔다.
계연은 가만히 뜰에 앉아 있다가 희미한 선광(仙光)이 하늘로 치솟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연백평과 현기자 일행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응약리처럼 도행이 높고 계연과 사이가 가까운 교룡도 넝쿨검을 제대로 쓰지 못했으니, 곤선승이라 해서 누군가 쉽게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그냥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쓰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도행이든 자신과의 관계든, 아무리 따져봐도 자신과 함께 곤선승 제련에 참여한 노염생만이 계연이 허락했다는 전제하에 곤선승을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계연도 현기자와 연백평을 통해 곤선승을 노염생에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곤선승은 그 자체만으로 건원종을 돕는 데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노염생의 손에서 무언가 남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연도 검술을 잘 알지 못하면 다루기 쉽지 않은 넝쿨검에 비해, 곤선승이 더욱 신묘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노염생에게 전해달라 부탁한 말 외에도, 계연은 곤선승에 남겨둔 수가 따로 있었다. 만약 노염생이 그 회색 바둑돌을 마주친다면 곤선승으로 곧장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더해 건원종의 진선과 천기각의 장수옹도 있을 테니, 배후의 바둑돌을 쥔 자에 대한 소식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바둑돌은 스스로가 누군가의 바둑돌이란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자의 인맥 관계를 되짚다 보면 추론을 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연이 보니 하늘을 가르는 선광은 천기동천 쪽으로 가지 않고 곧장 천우주로 향하고 있었다. 계연은 그의 시선에서 선광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다시 탁자 위의 바둑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바둑판을 바라보던 계연의 시선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는 바둑판을 바라보는 동시에 마치 빈 걸상에 누군가 앉아 있기라도 한 양 걸상을 쳐다보았다.
계연은 그간 외부에 알려진 자신의 명성을 떠올려 보았다. 그 범위가 넓진 않았지만, 도행이 높고 오랜 세월 은둔해온 수선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몸담은 문파도 알려지지 않았고 형식과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는 신비로운 인물이지만, 실은 그저 속세를 자주 거니는 수선자일 뿐이었다.
그럼 바둑돌을 쥔 또 다른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상고시대의 신수나 기이한 동물과 연관이 있을까? 자신처럼 빈번하게 속세를 돌아다니는 인물일까?
계연은 조월국의 변화를 촉발한 몇몇 수선자들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시기적으로도, 또 그가 아는 정보로 따져 보아도 그들은 아닐 거란 결론이 섰다. 게다가 그들은 바둑돌을 갖고 있을 정도의 경지가 아니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계연은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바둑판 한쪽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그 위의 흑돌과 백돌, 그리고 회색 바둑돌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형체 있는 바둑돌 말고도 흐릿한 바둑돌들도 보였는데, 이는 전부 계연과 연이 닿았던 사람들을 나타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의식을 날려 보내 엿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은 천지가 어지러워지자 깨어났고, 천지가 더욱 혼란스러워지길 바라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자신과는 같은 길을 걷는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계연은 바둑판의 회색 돌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리켰다.
그러자 바둑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아주 둔중한 느낌이 생겨났다.
끼익…… 끄그극…….
곧이어 바둑판 위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회색 돌이 놓인 곳에 미세한 균열이 나타났다.
그러자 계연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는 얼른 회색 돌을 집어 그것이 놓였던 곳을 한번 문지르자, 미세한 균열마저 사라져 버렸다.
다시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니 태양은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당신, 혹은 당신들은 어느 쪽에 있지?’
계연은 소매 속에서 해치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꺼내 열었다. 그 위의 해치는 그림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계연도 그렇게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계연,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냐?”
“해치, 당신은 어느 쪽이에요?”
계연이 뜬금없이 이렇게 묻자 그림 속의 해치가 앞발을 핥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눈썹을 살짝 찡그린 모습이 마치 의혹에 잠긴 듯했다.
“어느 쪽이냐니?”
그의 모습을 본 계연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마친 계연이 바둑판을 정리하려 흑돌과 백돌을 집어 통 안에 넣었다. 바둑판 한쪽에 있던 그림 속의 해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위에 회색 바둑돌이 하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계연, 저기에 좀 이상한 바둑돌이 하나 있는데.”
“맞아요, 어울리지 않죠. 그래서 바둑판 위에서 치우려고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손등으로 가볍게 바둑돌을 바깥으로 밀어버리자 회색 바둑돌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저 회색 돌은 무겁고 조잡하기만 해서요. 이 바둑판은 윤 훈장님께서 주신 것으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써왔는데 망가지면 안 되겠죠. 안 그러면 저렇게 많은 바둑돌을 다 어디에다 두겠어요.”
“뭐라고 중얼대는 거람?”
해치는 조용히 불평한 다음 더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연이 바둑판을 거의 다 정리했을 즈음 해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연, 언제 다시 한번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루(樓)인가 각(閣)인가 하는 데에는 요리가 다양하게 많던데. 이놈의 절 구석은 맨날 풀때기만 주니…….”
“하하하……!”
계연은 해치의 말에 돌연 그에 대해 굳건한 믿음이 생겨났다.
“아, 듣자 하니 성안에 일헌각(逸軒閣)이라는 데가 요리가 아주 유명하더라고요. 그간 아껴온 돈주머니를 오늘 간만에 열어 봐야겠네요.”
“나도 데려가는 거지?”
그러자 계연이 그림 속의 해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죠?”
“허, 계연아, 정말 너무하는구나. 조금 전에 내가 어느 쪽이냐고 물었지, 난 당연히 네 쪽이다.”
미소를 거둔 계연은 속으로는 해치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저 해본 말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 점을 짚어내지 않고, 바둑판을 정리한 다음 해치가 그려진 그림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사찰은 텅 비고 썰렁해서 길가로 나갈 때까지 세 명의 승려 중 누구도 마주치지 못했다. 사찰이 자리한 외진 골목에는 행인도 없었기 때문에, 계연은 곧장 손에 든 그림을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그 위로 옅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얼굴의 오관(五官)이 그림으로 묘사된 남자가 계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얼마 전 얼굴에 해치 그림을 달아놓은 모양새와 비교하면, 비록 오관이 먹물로 그려져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윤곽을 지니고 있었다.
“하하, 이번에는 그럴듯하게 애를 좀 썼구나. 지난번에는 어째서 이렇게 해주지 않은 거냐?”
해치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거리고 한 바퀴 돌기도 하다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계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뼉을 치며 대꾸했다.
“당신도 별말 없었잖아요? 그리고 저도 귀찮기도 해서 그냥 그림을 걸어버렸죠.”
“그럼 이번에는 어째 갑자기 안 귀찮아졌지?”
계연은 그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먼저 걸음을 내디디며 이렇게 한마디 던졌다.
“무슨 말이 그리 많아요? 올 거예요, 안 올 거예요?”
“가, 간다! 가!”
해치가 얼른 계연을 뒤따라갔다. 그는 지금 고작 그림일 뿐이고,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계연에게는 그리 많이 따지기도 귀찮았다. 이내 계연을 따라잡은 해치는 다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참, 계연. 맨날 널 따라다니던 그 떨거지들은 어디로 갔지?”
“누구요?”
“네가 종이로 접어 만든 것들 말이다. 작은 학이랑 역사 부적. 진마를 잡아먹고 오랫동안 잠들었더니 도통 그놈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겠군.”
해치는 계연의 소매 속에 종이학과 역사 부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저 대신 여씨 가문을 살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