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화. 이진사(泥塵寺)
한편, 남황주의 어느 해안가 근처의 산에서 육 산군과 북목은 낭떠러지 곁에 앉아 있었다. 육 산군은 무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북목은 잔뜩 흥이 오른 얼굴로 기다란 낚싯대를 절벽 아래로 드리운 모습이었다.
“흐으음- 흐으으- 허! 으으음~!”
마침내 육 산군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수려한 외모의 북목을 향해 말했다.
“입 좀 다물지.”
“아, 육오, 내 기분이 좋아서 말일세. 어쩌면 곧 커다란 물고기를 낚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자 육 산군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북목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최근에 자네 기분이 아주 좋은듯하군?”
“그런가?”
북목이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최근 기분이 좋다 보니 육오마저도 그리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이에 육 산군도 가만히 웃은 뒤, 다시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저 눈을 감았다.
“내가 기분이 좋은 게 그리 티가 나나?”
육 산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북목은 흥이 올라 반쯤은 농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육오, 나 북목이 이래 보여도 보는 눈은 정확하다네. 자네는 장래에 수행의 정점을 찍을 잠재력이 있지. 하지만 나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네.”
그러자 육 산군이 피식 웃으며 다시 눈을 떴다.
“하, 잘 모르겠는데.”
육 산군은 자신의 어조에 경멸이 담긴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지만, 북목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하하, 어느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아주 무서운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아비는 아주 대단해서 아이들을 멋대로 부릴 수 있었지. 내키는 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었고, 아이의 자아를 다시 조립할 수도 있었고…….”
“그런 아비는 자네 마두들 중에나 있겠지. 우리 요괴들은 그 정도는 아닐세.”
그러자 북목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러니 아이들 사이에도 당연히 형제자매간의 정이란 게 없었지. 그들이 공통으로 지닌 감정은, 그저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는가?”
“설마 그 아비가 죽었나?”
육 산군이 되는대로 이렇게 대답하자, 북목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자네가 마음에 든단 말이야, 육오. 맞아,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은 그 능통하지 않은 게 없는 아버지에게 큰일이 일어났다는 걸 느낀 거야. 죽음에 이를 정도의 큰일 말이야……. 하하하하……!
아버지가 죽었지만 재산은 남아있으니, 그중 힘이 센 아이는 후에 그 가산을 이어받을지도 모르지. 그럼 그 아비처럼 무소불능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육 산군이 눈초리를 좁히며 북목을 바라보았다.
“자네를 도우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역시 자네는 총명하단 말이야! 우리가 맹우(盟友)가 되면 좋은 점은 자연히 이루 말할 수 없지. 후에 우리 두 사람의 수행이 정점을 찍고 서로 협력하게 되면 그 무엇도 우리 앞을 가로막지 못할 걸세!”
그러자 육 산군의 눈빛이 반짝 빛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꿈도 크군. 하지만 자네의 그 무소불능한 아비는 아직 죽지 않았을걸.”
그 말에 북목은 잠시 멍해졌으나 곧 다시 허허 웃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낚싯대에 시선을 돌리며, 육오가 곧장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흡족해했다.
“천우주의 일은 더는 미루지 못할 테니 우리도 곧 가야 하네.”
“그러지.”
육 산군은 북목이 지나치게 굽신거린다고 느꼈다. 혹은 모든 마두들이 이런 성정을 지녔는지도 몰랐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북목을 업신여기고 경멸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어느 정도 숨겨오다가 최근에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북마(北魔)는 오히려 육 산군을 대하는 태도가 나날이 좋아졌다. 육 산군은 그가 자신의 실력에 경외감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계맹에서의 육오는 오만하고 냉혹하며, 심지어는 잔혹하다고까지 알려졌지만, 사실 이는 그의 본래 성정에 가까운 위장이었다.
이 북마는 이제 확실히 육 산군에게 진솔한 태도를 내보이고 있었다. 마두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계연의 가르침을 받은 육 산군은 이런 측면에서 자신의 직감이 아주 현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북목의 태도가 변한 원인은 육 산군이 지닌 실력이 그 이유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육 산군은 북목에 대해 그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뿐, 그의 주된 관심은 천계맹이 현재 천우주에서 벌이는 일에 모두 쏠려 있었다. 이왕 북목이 그 일을 먼저 꺼냈으니 육 산군도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받았다.
“언제 움직이려고?”
북목은 웃으며 낚싯대를 들어 올린 뒤에 수면 위로 떠오른 낚싯바늘을 한번 보고는 다시 바닷속으로 던졌다.
“급하지 않네. 내가 고기를 잡으면 그때 출발하지. 거기 가면 전부 온통 일만 하게 될 테고, 까딱 잘못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육 산군은 자신이 천계맹 내부의 인물들에게 평판이 좋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정보를 알 정도의 권력은 없었다.
“내 앞에서 그만 뜸 들이게. 육모(某)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수행의 정점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니까. 비록 내가 때로 자네를 업신여기긴 하지만, 자네가 마두 중에서는 걸출한 인재라는 걸 인정하고 있네. 이왕 나와 협력할 마음을 먹었다면, 자네도 아는 대로 내게 말해줘야 할 것 아닌가?”
육오의 말에 북목이 눈을 반짝 빛내더니 고개를 돌려 오만한 표정의 요괴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사실 천우주에 가는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상의할 필요가 있네!”
북목은 이렇게 말하고는 낚싯대를 한쪽 바닥에 꽂은 뒤, 육 산군 가까이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실 천우주에 가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닐세. 아주 많은 이들이 전부 거기로 가고 있지. 하지만 이번에는 나조차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계맹의 움직임이 너무 커. 동시에 결과적으로 받게 될 상과 벌도 말도 안 될 정도로 크지.
중요한 것은, 내 생각에 이번 일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일세. 이건 우리 천계맹이 그동안 따라온 행동 수칙에 맞지 않아.”
“아예 불가능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육 산군이 미간을 찡그리며 이렇게 묻자, 북목이 한번 코웃음을 친 다음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래쪽 요마들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그저 속세에 혼란을 일으키면 된다고만 알고 있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번 일의 목적은…….”
북목이 털어놓는 내용에 육 산군은 속으로 경악했지만,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
“육오, 반응 좀 크게 할 수 없나? 이번 일은 잘못하면 우리 천계맹의 원기가 크게 상할 수도 있고, 더불어 우리는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네!”
“그럼 자네가 두려워하는 건 천계맹의 원기가 상하는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잃는 것인가?”
그러자 북목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내 목숨을 잃는 일이지!”
“나도 마찬가지일세!”
두 사람은 서로 미소를 교환한 뒤, 한 사람은 계속해서 낚싯대를 드리웠고 다른 한 사람은 수행을 닦았지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들은 3일이 지난 후에야 출발했는데, 북목은 아무런 술법도 쓰지 않고서는 물고기를 하나도 낚을 수 없었으며, 육 산군은 자연스럽게 계연에게 소식을 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떠난 한참 뒤에야 털 몇 가닥이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다시 3일이 흐른 뒤, 사찰의 객사 입구에 앉아 책을 읽던 계연은 바람을 타고 날아온 털 세 가닥을 손에 쥐었다. 계연은 그 가느다란 털을 손에 쥐자마자 그것이 육 산군의 것임을 알았다.
북목에게 발각될까 우려한 탓인지, 육 산군은 거의 아무런 법력도 쓰지 못했다. 이에 그가 보낸 털에 담긴 소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조금 자질구레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계연은 그가 보낸 소식 덕분에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천계맹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계연이 손가락으로 쥐고 있던 털을 비비자, 세 가닥의 가는 털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손을 무릎에 대고 탁탁 턴 다음,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머릿속으로는 천계맹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연은 일찍이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도 그들이 일으켰을 줄은 몰랐다. 이는 조심스럽고 신중히 행동하던 천계맹의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정도(正道)의 세력이 더 크고, 인도(仁道)는 이미 번성하여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천계맹이 다시 천궁(天宮)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인도를 아예 궤멸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천세(天勢)를 빌려 인간들을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후의 인물이 그 바둑돌을 움직였기 때문에, 천계맹에서도 일관된 신중한 태도를 바꾼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계연은 이번 일이 천계맹에 관련되어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수확이 있는 셈이었다. 첫째로, 공중에 대고 헛발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둘째로는 천계맹이 지닌 저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도 몇몇을 잠입시켜 놓았으니 중요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사찰의 문 앞이 웬일로 시끄러워졌다. 그 소란이 사찰 안의 고요함을 깨뜨리자, 나이 든 승려의 불경 외는 소리와 사찰 안팎의 새소리가 잦아들었다.
사찰 문 앞에는 가복(*家僕: 대갓집에서 부리던 사내종)처럼 보이는 이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는 폴짝거리며 걷는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쿵쿵쿵-.
“안에 누구 계십니까?”
쿵쿵-!
한 하인이 대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소리친 뒤 다시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문이 살짝 열린 것이 보였다.
이에 그가 사찰 대문을 끼익 밀어젖히자, 낙엽이 굴러다니는 넓은 뜰이 보였는데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적막해 보였다.
“저, 도련님,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요?”
하인이 도련님이라 부른 이는 옥을 정교히 다듬어 조각한 것 같은 외양의 어린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기껏해야 2, 3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는데, 길을 걷는 모습이 무척 안정적이었고 높이 뜀박질도 할 수 있었다.
통통한 몸에는 옅은 남색의 옷을 입었고, 목둘레에는 두두(*肚兜: 가슴과 배만 가린 마름모 모양의 중국 전통 속옷)의 붉은 끈이 드러나 있었다.
“아니다. 여기가 맞아!”
아이는 젖내 나는 목소리로 사찰 안쪽을 가리킨 뒤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여섯 명의 하인들은 얼른 아이의 명에 따라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닿을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랬으니 저렇게 어린아이를 누가 안을 리도 없었다.
하인들은 앞뒤로 두 명씩, 좌우로 각 한 명씩 서서 아이를 둘러싼 채 걷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 승려가 다급히 걸어 나오더니 이들 일행을 보고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시주님들, 저희 이진사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중간에 서 있던 어린아이가 승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왠지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눈빛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너무나 날카로웠는데, 그에 비해 통통하고 작은 아이의 몸 때문에 더욱 괴이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사찰이고, 듣자 하니 사찰에서는 사람들이 향을 올리는 걸 좋아한다지. 우리도 향을 올리러 왔는데 잘못되었느냐?”
이렇게 어린아이가 대답하는 와중에도 여섯 명이나 되는 하인들은 찍소리도 내지 않자 승려는 속으로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곧 두 손을 합장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선재 대명왕불. 여러분께서는 따로 향촉을 가져오지 않으셨는데, 어찌 향을 올리시렵니까? 저희 이진사에서는 따로 향촉을 팔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그중 한 하인을 향해 명을 내렸다.
“네가 나가서 사 오너라.”
“예, 예!”
하인이 즉시 몸을 돌려 떠나자 아이가 승려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됐겠지? 그런데 아직 향촉이 없으니 그동안 사찰 안을 구경하고 싶은데 되겠느냐?”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