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화. 비정상적인 기상 현상
여풍은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부친의 승낙을 얻은 뒤 곧장 저택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다시 이진사를 향해 뛰어갔고, 이에 그를 따르는 하인들만 종일 쉬지도 못하고 움직여야 했다.
여풍은 자신이 이렇게 신이 난 것이 작고 하얀 학과 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온화한 미소로 자신의 볼을 꼬집던 선생님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진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계연이 머무는 객사로 향했다. 이번에는 앞을 막아서는 승려가 없었지만, 여풍은 하인들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명했다.
여풍이 객사 뜰 안으로 들어서자, 계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객사 입구의 깔끔한 나무 바닥에 앉아 있던 계연은 그제야 발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께 물어보았니?”
“네! 물어봤어요, 아버지도 동의하셨어요. 그리고 보수도 있어요, 한 달에 10냥이래요. 만약에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면 제가 좀 더 드릴 수 있어요!”
계연은 그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이는 보기보다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예전에 배운 예절도 전부 기억하고 있으나,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선택적으로 쓰는 것 같았다.
“하하하, 10냥이면 충분하단다. 자, 이리 와서 앉으렴.”
계연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여풍을 불렀다. 그러자 여풍이 쭈뼛대며 걸어오더니 계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아이가 어찌할지 모르는 걸 본 계연이 웃으며 다시 불렀다.
“더 가까이 오렴.”
이에 여풍은 계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으나, 결국 답답했던 계연이 왼팔로 여풍을 안듯이 끌어당겼다.
여풍은 무척 기쁜 동시에 긴장을 느꼈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계연의 친밀한 행동을 물리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스승님, 오늘부터 공부를 시작하나요?”
“스승님이라고 불려본 적이 없어서 이상하구나.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렴. 음, 서두르지 말고 오늘은 함께 책이나 읽자꾸나. 이건 여기서 살 수 있는 책이 아니거든.”
계연이 들고 있던 책은 무슨 고명한 천서(天書)가 아니라, 윤재성이 집필한 <군조론>이었다. 이때 마침 종이학도 날아와 계연의 어깨 위에 앉았다.
여풍은 여씨 저택 내에서의 모습과 달리, 조용히 계연의 곁에 앉아 그가 책을 읽어 주는 걸 듣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계연은 무척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때로 그럴듯한 모습으로 계연과 토론하기도 했다. 뜰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하인들은 모두 깜짝 놀랄 정도였다.
“도, 도련님이…….”
“다른 아이들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이네…….”
“그러니까!”
이렇게 수군대던 하인들은 돌연 목덜미에 무언가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이내 손에 물기가 묻어난 걸 보고 얼른 하늘을 올려다본 그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 오나?”
“어?”
“정말이네!”
“아직 겨울이 되려면 멀었는데?”
하인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꽃을 바라보았다. 비록 아주 작긴 했지만 틀림없는 눈이었다.
계연도 읽고 있던 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는 손을 처마 밖으로 뻗었다. 그러자 작은 눈송이가 그의 손바닥에 떨어지며 곧장 녹아버렸다.
“벌써 겨울인가?”
* * *
한편, 천우주 서쪽의 백성들은 이들과 같은 평온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창 가을이어야 할 대륙 서쪽에서는 서해안이 전부 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보통 겨울에 접어들어도 지금처럼 커다란 면적이 얼지는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해안 거의 전체가 얼음으로 꽝꽝 얼어붙어, 어민들은 바다에도 나가지 못했고 때아닌 극심한 추위까지 견뎌야 했다.
육 산군과 북목이 마침내 천우주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도 바로 기나긴 서해안이 전부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해안선에 가까운 일정 거리의 바닷물 전체가 얼어있어 어선은커녕 커다란 누선(*樓船: 다락이 있는 배)도 바다에 띄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계역 나룻배 같은 걸 타고 오지도 않았고, 대단한 법보도 없었으므로 그저 스스로의 법력을 이용해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우주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겨울이 시작된 듯한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천우주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육 산군과 북목은 어느 해변에 내려서서 얼어붙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재밌군,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북목은 얼음으로 뒤덮은 해안가를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육 산군도 한쪽에서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이건 절대 누구나 펼칠 수 있는 신통력이 아닐세. 사계절은 천도(*天道: 하늘의 이치)인데, 대체 누가 이렇게 강력한 법력을 지닌 거지?”
이건 간단히 온도를 내리고 눈을 내리게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육 산군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설령 자신의 사존이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천시(*天時: 밤낮이나 계절과 같이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자연의 현상)를 진정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거라고 여겼다. 게다가 어떻게 천시를 바꾼다고 해도 필시 뒤따르는 업보가 엄청날 터였다.
물론 평범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에서 천시를 바꾸는 건 아주 간단했다. 6월에 눈을 내리게 하거나, 맑은 하늘에 돌연 비를 내리는 것도 그에 포함되었으니 말이다.
“이건 절대 어느 성이나 한 지역의 변화가 아닐세.”
마침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참 그곳에 서 있던 두 사람은 몸에 눈이 잔뜩 쌓였고, 자리를 뜨기 전 가볍게 몸을 털어 쌓인 눈을 털어냈다.
하늘에는 눈도 내리는 데다 구름마저 잔뜩 끼어 사위가 어두웠다. 하지만 육 산군과 북목은 조금 걷다 보니 마침내 저 멀리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은 기슭에서 비친 게 아니라 해안선 바깥쪽에서부터 비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자연스럽게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향했다. 범인이 아닌 두 사람은 자연히 다리 힘도 비범했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불빛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얼어붙은 해안선을 바라보니 불빛이 비치는 주위로 적지 않은 이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에 육 산군과 북목은 얼음 위를 걸어 수십 장(丈)쯤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 저 앞에 모인 이들이 바삐 움직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쪽에는 스무 명이 넘어 보이는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횃불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어깨에 무언가를 지거나 쇠로 된 대야를 들고 있었다. 곁에는 말이 끄는 수레가 멈춰 서있었는데, 수레 위에는 뭔지 모를 것이 잔뜩 뭉쳐 있었다.
“허억…… 헉……!”
딩, 딩, 딩…….
그들은 쇠삽을 들고 얼음을 깨다가, 힘이 떨어지면 다른 이들과 교대하기를 반복했다. 곧이어 두꺼운 얼음층에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구멍이 나자, 사내들이 모두 기쁜 듯 웃었다.
그중 나이가 좀 있는 남자가 하얀 끈이 묶인 장대를 구멍 안으로 집어넣자, 장대를 통해 아래로 흐르는 물살이 느껴졌다. 이내 흰색 끈이 물살에 의해 똑바로 펴지자 그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됐네, 그물을 내려도 되겠어!”
“예!”
“잘됐군, 낮부터 지금까지 부단히 움직였으니, 제발 이 아래에 생선들이 좀 있어야 할 텐데!”
그들은 흥분과 기대가 담긴 표정으로 다시 바삐 움직였다. 사내들은 말이 끄는 수레에서 잘 쌓아놓은 그물들을 옮겨, 질서 있게 얼음 구멍 속으로 던져 넣었다. 바다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겨울을 지낼 식량도 충분치 않으니 이렇게라도 시도를 해봐야 했다.
“헛둘, 헛둘!” 하는 구호와 함께 한참을 바삐 일하던 그들은 여러 개 뚫은 구멍 안에 파낸 얼음 파편을 정리한 뒤 바다를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용왕께서 보우하소서.” 등의 말을 중얼거리며 그물에 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막 돌아갈 채비를 하던 사내들은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쪽에 사람이 서 있는 것 아닌가?”
“어디?”
“그러네! 에고, 설마, 사람이 아닌 건 아니겠지?”
“이, 이보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최근에는 세태가 불안정했으므로 남자들은 즉시 긴장한 얼굴로 수레 위의 쇠삽과 작살 등을 들어 두 사람을 향해 위협적으로 내밀었다. 무리 중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이들은 가슴께에 있던 부적을 꺼내 연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때 부적에서 은은한 빛이 나자 어민들이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육 산군과 북목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적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깃든 힘만은 ‘진짜’였다. 북목이 막 손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육 산군이 낮게 웃으며 먼저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러자 북목도 육오의 뒷모습을 보더니 결국 손을 내리고 그를 따라갔다.
스무여 명의 어민들은 긴장한 채 공구와 횃불을 들고 있다가,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얼른 가져온 물건을 정리한 뒤 마을을 향해 떠나면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물 안에 고기가 좀 잡혔기를 바랐다.
육 산군과 북목은 천천히 얼음 위를 걸으며 순식간에 어민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은 어민들이 그물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많은 사실을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 부적은 저런 어민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었네. 속세의 일반 법사들이 제련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음, 게다가 이런 밤에 고기를 잡으러 나온 걸 보니, 얼음 아래나 이 마을 근처에는 요물이 많이 없는 듯하군.”
“용족이 개입한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육 산군은 속으로 저 어민들은 집에 남은 식량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추운 밤에 누가 나와서 운을 시험해 보겠는가.
두 사람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얼음 아래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어느 먼 지점을 바라보자 그 얼음 아래로 구불구불한 검은 형체가 유영하는 것이 보였다.
검은 형체는 길이가 십여 장이 넘어 보였고, 얼음층에 닿을 때마다 얼음이 끼긱대는 소리를 냈다.
검은 형체의 속도는 무척 빨라서, 좌우로 몇 번 꿈틀대더니 곧장 육 산군과 북목이 서 있는 위치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 검은 형체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곧장 하늘로 뛰어올라, 바람을 타고 상공으로 올라갔다.
검은 형체는 육 산군과 북목이 서 있던 곳에 멈춰서서 공중에 떠올라 있는 두 사람의 정체를 가늠해보는 듯했다. 동시에 위압감과 함께 옅은 용의 기운이 느껴졌다.
‘교룡이다!’
육 산군과 북목은 동시에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너희들은 누구고, 이곳엔 무슨 일로 왔지?”
얼음 아래의 교룡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고, 그 목소리에는 듣는 이를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는 육 산군과 북목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육 산군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태도였으나, 북목은 천천히 공중에서 고도를 낮춰 얼음 아래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예를 취한 뒤 웃으며 물었다.
“저와 육형은 마침 이곳을 지나던 길인데, 그간 오랫동안 밖을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이곳의 기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귀하께서는 이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아십니까?”
북목은 천계맹에서 천우주에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 교룡은 아무래도 정도(正道)에 편향된 듯 보이니 마침 정보를 얻기 딱 좋을 듯했다.
하지만 교룡은 두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내뿜는 요기(妖氣)는 무척 옅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려지는 걸 보니 절대 얕볼 수 없는 존재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