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화. 운명을 따르는 걸까, 이끄는 걸까?
“잘했다. 그럼, 이제는 손난로를 내려놓고 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보렴.”
“네!”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을 비운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계연이 여풍에게 가르친 입문 단계의 수행법이었다. 계연은 곁에서 아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수양을 닦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풍은 정말로 천부적 자질이 뛰어났다. 얼마 되지 않아 호흡이 길고 규칙적으로 변하더니, 첫 시도 만에 입정에 든 것이다. 비록 그는 아무런 수행법도 알지 못했지만, 그런데도 여풍은 완벽한 공허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다.
계연은 이내 여풍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후, 여풍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여풍의 눈꺼풀이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땀을 흘리기까지 했고 순식간에 땀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
계연의 감응에 의하면 주위의 모든 기운이 여풍에게서 단절되어 있었다. 영기마저 계연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여풍의 호흡이 매우 급해지며 얼굴에 통증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드러내자, 계연은 과감히 손을 뻗어 여풍의 이마에 검지를 내렸다.
펑……!
그러자 계연은 손가락이 닿은 부분에서 미약한 반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불어넣은 맑은 기운이 여풍을 깨우자, 여풍은 마치 무언가에 밀린 것처럼 바닥에 엎어지더니 배를 들쑥날쑥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헉…… 헉……. 선생님, 조금 전에는 느낌이 너무 이상했어요. 아주 괴롭기도 했고요…….”
계연이 여풍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뭔가를 느낀 거니?”
그러자 여풍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눈을 감은 후에는 온통 암흑뿐이라 좀 무서웠어요. 그러다 꼭 어딘가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제 몸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다음에는 몸이 꼭 꽈배기처럼 꽉 조여드는 것 같다가, 갑자기 추워지더니 또 더워졌어요. 그런데 아무리 깨어나려고 해도 깨어날 수가 없었어요…….”
여풍은 겁에 질린 듯이 떨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고 말에 조리도 없었으나, 그 순간의 공포만은 여전히 잊지 못하는 듯했다.
“선생님, 술법을 배우는 게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건가요?”
“아니다, 일단은 옷이 땀으로 다 젖었으니 벗고서 이불 안에 들어가는 게 낫겠구나. 옷은 내가 잘 말려주마. 아, 꿀물도 좀 마시는 게 좋겠구나.”
계연은 여풍을 위로한 뒤 그가 입은 솜옷과 내의를 벗겼다. 솜옷은 괜찮았지만, 내의는 땀에 완전히 푹 젖어 있었다. 계연은 여풍을 전에 앉았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앉힌 뒤 이불을 가져다 여풍을 감싸주었다. 그러고는 손난로를 이용해 여풍의 옷을 말려주었다.
그런 뒤 계연은 탁자 위의 찻잔에 김이 나는 뜨거운 물을 붓고서, 꿀이 든 자기 단지를 꺼내 찻잔 안에 꿀을 가득 퍼담았다. 그러자 이불을 뒤집어쓴 아이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여풍은 꿀물 덕에 조금 전 느낀 두려움을 잠시 잊어버렸으나, 계연은 여전히 방금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계연은 유몽술을 써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려 했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도 않았고 여풍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상태라 쓸 수가 없었다.
계연은 일단 여풍에게 좌선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는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방법과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몇 가지 가르쳐준 후, 다시 원래 가르치려던 서책을 펼쳤다. 곧이어 방 안에서는 책을 외는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여풍은 아침에 와서 함께 절밥을 먹은 뒤, 늦은 오후까지 함께 있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선생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풍은 문가에 서서 계연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는 이미 바싹 마른 내의를 입고 있었다. 계연은 약간 붉어진 여풍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여풍에게서 열이 나는 게 느껴졌는데, 어쩐 일인지 여풍은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풍한에 걸린 듯하구나. 집에 돌아가면 생강탕을 마신 뒤, 자기 전에 족욕 하는 걸 잊지 마라.”
“알겠어요, 선생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풍은 다시 예를 올린 뒤 서책을 가지고 객사를 떠났다. 하인들은 다른 객사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이미 뜰 바깥에 나와 서 있었다.
여풍이 떠나자 계연은 즉시 돌아와 여풍이 앉았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앉았던 깔개 위쪽은 계연에 의해 이불로 덮여 있었다.
이때 계연이 이불을 걷어보니, 깔개 위에 흰 곰팡이 같은 게 한 겹 덮여 있었다. 그것을 손으로 만져보니,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뼈를 에일 듯한 고통마저 느껴져 계연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계연의 손이 닿자마자 그것은 마치 흰 서리처럼 천천히 녹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계연은 그것은 절대 얼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 아이는, 운명을 따르는 걸까, 이끄는 걸까?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조금 전에 여풍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계연은 알지 못했지만, 여풍을 퍽 마음에 두고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계연은 본능적으로 여풍이 조금 전 느낀 감각을 다시 파헤치면 안 된다고 느꼈다. 아마 여풍은 본인도 괴로웠을 테니 다시 그 감각을 파고들진 않을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계연은 밖으로 나가더니, 가볍게 땅에 발을 굴렀다. 심오한 도의 기운이 물결처럼 일렁이자 그가 이렇게 내뱉었다.
“이곳 토지신께서는 부디 모습을 드러내 주십시오.”
계연의 말과 동시에 발밑에 깔린 석판 아래에서부터 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얼굴에 살집이 없고 살짝 등이 굽은, 체구가 작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에 원외모(*員外帽: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사는 향촌의 퇴직 관리나 유력인사들이 쓰는 사각형 모자로 뒤에 기다란 끈 두 개가 달림)를 쓴 채 그다지 비싸지 않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도 잘 맞게 재단되어 아주 맵시 있어 보였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이진사가 아닌가?’
토지신은 번쩍 정신이 들기라도 한 듯이 몸을 돌려 계연을 바라보더니 즉시 고개를 숙이며 읍했다.
“소신(小神)이 상선을 뵙습니다. 무슨 일로 소신을 찾으셨는지요?”
토지신은 사실 이진사에 어느 고인 하나가 머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도행이 꽤 높은 국사가 정중히 모셔온 고인이라, 감히 그를 찾아가 방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토지신은 신령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 땅의 기운이 짙은지라 그렇다고 정괴의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계연이 이리 보니 도행 자체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수행을 닦은 세월은 꽤 오래된 듯했다.
“어서 예를 거두세요, 토지공. 저는 계씨로, 그저 선생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예, 계 선생님!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토지신은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존재가 초월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떻게 여기로 불려왔는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 긴장한 상태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토지공. 별로 큰일은 아닙니다. 여씨 대갓집에 여풍이라는 아이가 하나 있는데, 저 대신 토지공께서 그 아이를 좀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사람 하나만 지켜보면 된다니.
이 정도는 당연히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신도 적잖이 마음을 내려놓았다.
“예, 그럼 소신이 자주 들여다보겠습니다.”
그 말에 계연이 토지신을 쳐다보았고, 토지신은 그의 눈빛에 혹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주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항상 가까이서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쉽게 모습을 드러내진 마시고요. 만약 그 아이가 수련하고자 한다면 방법을 생각해 얼른 막아주세요!”
“예? 그것이…… 상선, 실은 제게도 백성들이 비는 소원이며 처리할 각종 잡무가 많습니다. 게다가 소신은 법력도 낮고 신통력도 보잘것없어 마음과는 달리 능력이 한참 모자랍니다.”
토지신은 지하에 있어도 지상의 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관할 지역이 넓다 해도, 그가 미리 주의를 기울였던 곳이라면 무슨 일이든 절대 그의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 한쪽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것과 다른 쪽 끝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연이 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의 감응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고 조금도 긴장을 놓아선 안 되는 임무였다.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계모(某)도 토지공께서 난처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라, 토지공께 부탁드리는 것밖에는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도와주시면 저도 도움을 좀 드리도록 하지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소매 속에서 법전을 한 움큼 꺼냈다. 총 열두 닢의 법전은 그리 휘황찬란한 빛을 내지도 않았고, 그저 무겁고 오래된 흔적이 가득한 구리 동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반 동전보다 살짝 큰 법전을 보자마자, 토지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전에 ‘도’의 기운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건은 법전이라고 부르는데, 음……. 수행계의 어떤 이들은 ‘여의전’이라고도 부르더군요. 묘법을 펼치거나 수행을 닦을 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어느 선문의 가게에 가져가더라도 꽤 값을 크게 쳐 줄 거예요. 물론, 이걸 팔라고 드리는 말은 아니고요. 최근에는 법전을 많이 제련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이것만이라도 받아주세요.”
법전은 환한 빛을 내뿜진 않았지만, 토지공의 눈에는 그 도의 기운이 찬란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그는 손바닥을 옷자락에 연신 문지르다가 조심스레 두 손으로 법전을 받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상선! 아, 고맙습니다, 계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당치 않다던가 애써 겸양하는 말은 평범한 인간이나 하는 것이었다. 토지신은 법전을 보자마자 이번 임무를 더욱 진지한 태도로 대하게 되었다. 처음 법전을 들자 무게가 마치 천근처럼 느껴졌으나, 착각이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럼, 계 선생님. 소신이 지금 바로 여씨 저택으로 가서 그 아이를 살펴보면 되겠습니까?”
“예, 어서 가보세요.”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토지신이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라고 예를 올리더니 푸른 연기가 되어 지하로 사라졌다. 토지신은 이 순간부터 여풍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최우선순위로 삼았다. 토지신으로서의 잡무는 사실 겸사겸사 동시에 할 수도 있었고, 정 시간이 안 되면 자신이 거느리는 정괴들을 시킬 수도 있었다.
토지신이 떠나자 계연은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로서는 시시때때로 여풍을 살필 수가 없었으니 토지신에게 맡기면 훨씬 일이 수월했다. 게다가 시간 대부분은 계연이 여전히 이진사에서 그를 돌볼 테니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지금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배후의 상대가 천우주에서 움직인 바둑돌이었다.
바로 그 순간, 계연은 무언가 감응을 느끼고 의식세계 안 산과 하천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그의 법상이 나타나자, 원래는 보일 듯 말 듯 했던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는 별들이 저절로 빛을 낸다기보다는 계연의 마음이 움직인 결과였다. 그 별자리가 의미하는 이들은 연비와 좌무극 등이었다.
“그렇다면…….”
계연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현기자가 비검을 통해 전해온 소식을 떠올렸다. 이내 무언가를 생각하던 계연은 필묵을 꺼내 서신을 한 통 쓴 뒤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