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6화. 해치 어르신의 ‘지인’
해치는 여씨 저택의 어느 작은 응접실로 안내되었는데, 여풍은 이미 그곳에서 해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에 마련된 다과와 차를 발견하자 해치는 기쁜 듯이 웃으며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얼른 손으로 집어 먹었다. 여풍과 응접실 내의 하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에 여풍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해치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선생님의 벗이라고 하셨다던데, 저는 당신을 본 적도 없고 선생님께 당신에 대해 들은 적도 없어요.”
해치는 아무 말도 없이 탁자 위에 준비된 다과를 집어 먹으며, 눈을 들어 응접실 밖의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종이학은 언제 왔는지 이미 위에 올라앉아 있었고, 마찬가지로 해치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음, 그렇긴 하지…….”
해치는 이렇게 대답한 뒤 손에 쥐고 있던 떡을 입으로 밀어 넣고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한 속도로 여풍의 앞에 다가왔다. 그러더니 휙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여풍에게 바짝 들이댄 채 그의 눈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를 보고 놀란 종이학은 날개를 하도 세게 펄럭여 잔상이 남을 정도로 날아갔다. 여씨 집안의 무공을 익힌 하인들은 해치의 재빠른 공격에 채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얼른 경계 태세를 갖췄다.
“여풍 도련님, 정말로 나를 모르나?”
여풍은 과도히 놀란 데다 목이 졸려 얼굴이 새빨개졌고, 당황에 찬 눈빛으로 해치를 바라보았다. 그의 물음에 대답할 때도 횡설수설할 정도였다.
“당신은, 아니야, 선생님의 친우일 리가 없어. 나는 너를 모른다! 여, 여봐라. 어서 이자를 잡아라!”
이때 해치의 두 눈 깊은 곳에서 두루마리 한 장이 떠올랐다. 그 위에 그려진 해치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두르며 여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씨 집안의 하인들은 상대가 엄청난 실력의 고수라는 걸 알아보고는 선뜻 공격하지 못했다.
잠시 후, 해치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풀고는 여풍을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그러자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여풍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여전히 해치를 공격을 하지는 못했다.
해치는 놀라서 혼이 나간 듯한 여풍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다과가 준비된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보아하니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흐음, 여풍.”
“왜, 왜?”
“너는 네 스승을 속일 것이냐?”
그러자 여풍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즉시 대답했다.
“선생님을? 절대로!”
여풍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여풍은 자신의 눈, 귀, 입, 코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발견했다. 그 연기는 순식간에 눈앞의 남자에게 빨려 들어갔지만, 하인들은 이를 전혀 보지 못한 듯했다.
이내 해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이 다과는 내가 가져가마.”
해치가 응접실을 나서고 난 뒤에야 하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해치를 뒤쫓아갔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불러 모아 해치를 잡으려 했지만,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그자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후였다. 그저 경공이 뛰어난 것인지, 아예 사람이 아닌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 *
해치가 이진사에 돌아와 보니 계연이 객사 앞 주랑의 난간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어깨 위에는 종이학이 앉아있었는데, 보아하니 계연도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은 것 같았다.
“계연, 네가 들은 게 맞다. 달리 더 할 말은 없다.”
해치는 양손을 부딪쳐 툭툭 털고는 계연의 앞으로 걸어가 다시 한 폭의 두루마리로 변한 뒤 그의 손안에 떨어졌다. 계연이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니 종이학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연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으므로, 손에 힘을 주어 해치 두루마리를 단번에 펼쳤다.
“무슨 수수께끼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얼른 제대로 말해주세요.”
해치는 원래 바닥에 엎드리고 있다가, 계연이 두루마리를 힘주어 툭 터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이내 그가 거대한 입을 벌리며 대꾸했다.
“네 그 학생은 원래 내 ‘지인’이다. 음, 본래 모습은 당연히 사람도 아니고. 원래는 나를 알아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모르더군. 별로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니지?”
계연은 이 세상에서 해치를 알고 있는 이를 자신을 제외하곤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해치의 물음에 남다른 뜻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았지만, 계연이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차가운 눈빛으로 해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해치는 왜인지 마음이 켕겨서 괜히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네 학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지닌 불길한 느낌이 익숙한 걸 보니, 어느 흉뮬의 화신인 게 분명해. 내가 마치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구속받고 있는 것처럼, 그것도 여풍에게 구속된 것이지. 원래는 태어나면 안 되었는데……. 계연, 너라면 알겠지. 나도 더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감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치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계연도 내심 두려움을 느꼈다. 이 감각은 바둑돌이 생겨나며 여러 번 느껴보았으므로 계연도 곧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해치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얻게 되었지만, 계연은 여풍에 대해 그리 많은 생각을 품지 않았고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마음을 유지했다. 계연은 이미 여풍의 상황에 대해 좋지 않은 가설을 여러 개 세워두었었기 때문이다.
서신을 완성한 계연은 다음 날 여풍이 이진사에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해치의 대답을 다 들은 뒤 해가 질 시각이 되자 곧장 여씨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 * *
석양에 뒤덮인 거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시각, 금갑은 대장간에 서서 멀리 여씨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가 오늘 마지막으로 완성한 철기(鐵器)가 놓여 있었다.
그때 나이 든 대장장이 웃으며 다가오더니 일렬로 늘어선 완성된 철물들을 바라보았다. 농기구든 주방 도구든 전부 모양이 완벽했다. 그가 다시 금갑을 바라보니, 그의 무뚝뚝한 얼굴이 오늘따라 왜인지 약간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소금(小金)아, 무얼 보느냐?”
그러자 금갑이 여씨 저택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쪽을 봅니다.”
늙은 대장장이가 금갑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보니, 여씨 가문 대문 앞에 하얀 장삼을 입은 남자가 석양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비록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 자세나 옷차림을 보니 학식을 갖춘 선생임이 분명했다. 그 의연함과 여유로움은 여씨 저택을 방문하려는 일개 서생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가 지켜보니, 여씨 가문의 하인들이 몇 번이나 그를 저택 안으로 모시려 했으나, 그 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고 있었다.
“하하, 별일이군. 다른 이들은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인데. 그렇잖으냐? 저런 사람이 다 있네.”
대장장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니 팔꿈치로 금갑을 툭 찔렀다. 그러자 금갑이 고개를 내려 대장장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나, 뭐라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예.”하고 대답했다.
얼마 후, 대장간 안의 둘은 여씨 집안의 도련님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선생에게 공손히 예를 올린 뒤, 대문 앞에 서서 무어라 말을 나누었다. 이내 그 선생이 여 소공자에게 서신을 건네자 소공자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보아하니 서신을 전달하러 온 모양이구나.”
대장장이가 이렇게 결론을 내자, 금갑은 명의상 자신의 사부님인 그를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금갑의 말과 동시에, 멀리서 그 선생이 손을 뻗어 소공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게 보였다. 그런 동작은 보통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소공자는 선생의 품 안으로 안겨들기까지 했다. 그러자 선생은 한 손으로 소공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오호, 네 말이 맞구나. 서신을 전하는 이는 아닌 듯하고, 그럼 멀리서 온 친척인가?”
금갑은 아무 말 없이 눈도 떼지 않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소공자가 그 선생을 놓아주자, 두 사람은 대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듯했다. 선생은 떠나기 전, 이쪽 대장간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금갑이 두 손을 들어 포권한 뒤 계연을 향해 읍했다. 대장장이는 금갑이 무슨 동작을 하는 걸 느꼈으나, 그가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 금갑은 전혀 움직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장이는 자신이 노안이 온 모양이라고 여겼다.
* * *
계연은 자신이 얼마나 지난 뒤 돌아올지 알지 못했고, 여풍을 관찰한 시간도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금갑과 종이학을 남겨두었다. 게다가 토지신도 있으니 일종의 보험이 더해진 셈이었다. 설령 여풍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알 수 없는 외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해도, 금갑이라는 관문을 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밤의 장막이 내리자 계연은 구름에 올라탄 채 떠나갔다. 이번에는 계역 나룻배를 탈 수가 없었으므로 천우주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날아가야 했다.
예전에 계연은 거센 바람이 부는 대기층을 꺼렸으나 이제는 그저 그랬다. 그는 남황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잠시 눈에 담은 후, 바람을 움직여 점점 더 고도를 높였다. 그는 이내 한 줄기 빛으로 변해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으로 올라갔다.
거센 바람이 나타나는 고도는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었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의 기세는 칼날처럼 광포해졌다. 계연의 경지로는 이제 강풍 사이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계연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뒤 강풍의 난기류 중에서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부는 바람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바람에 올라타 천우주로 향했는데, 언제나 그에게는 검의(劍意)가 서려 있었기 때문에 계연은 마치 날아가는 한 줄기 검광처럼 보였다.
천우주로 향하는 도중에는 천기각의 비검전서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계연은 더는 천우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의식세계에서 천우주에 있는 바둑돌의 상태와 밤하늘 별자리의 변화로 길흉을 점쳐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편이 나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별의 위치와 느껴지는 감응으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었다. 천우주가 비록 크긴 했지만, 그래도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 * *
그해 3월 초사흘의 늦은 밤, 계연은 마침내 천우주에 이르렀다. 계연이 법안을 전부 열고 주위의 기운을 관찰해보니, 천지와 음양의 기운조차 불안정했다. 그 외에 여러 기운이 뒤섞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인도(人道)의 기운은 많이 약해진 상태이긴 하지만, 아슬아슬한 상태는 아니었다.
계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밤하늘에는 별빛이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주의 깊이 관찰해보니 북두칠성 중 무곡성의 빛이 유독 밝게 빛나는 게 보였다.
계연이 이미 남황주를 떠나 천우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천기각의 현기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계연은 심지어 노염생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천우주에 도착하니 그처럼 이곳에 와 있는 바둑알들의 감응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계연을 조금 놀라게 한 사실은, 육 산군과 우패천이 요마들에 의해 혼란이 가중된 지역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천우주 외곽에 자리한, 비교적 안전하고 정도(正道) 세력에 의해 유지되는 대륙 중부에 있다는 점이었다.
최근 얼마간은 천우주의 정사(正邪) 세력 양측이 가장 격렬하게 싸운 시기였다. 천계맹에서는 그간 온갖 사달을 일으켜 왔고, 이번에 천우주에서는 나름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패천과 육 산군처럼 절대 ‘총알받이’라 볼 수는 없는 일원이 정도 세력과의 싸움에서 가장 전방에 나서지 않는 건 확실히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설마 다른 모략을 짜고 있는 걸까?’
계연은 잠시 생각하다 속으로 결단을 내리고는, 망설임 없이 천우주 중부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는 생각과 천우주 곳곳의 상황을 관찰하려는 마음에 전처럼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이 방향을 계속 따라가면 만나게 될 바둑돌은 바로 우패천이었다.
지금 그가 날아가는 방향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밤에 공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우주에 대란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대지에 삿되고 혼탁한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인간이 지닌 불의 기운도 많이 쇠락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서는 등불이 켜진 걸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