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화. 이심전심
주 부인의 저택 밖 큰길에서는 행인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거나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떠났으므로, 남은 몇몇도 다급히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천천히 모여드는 구름을 따라 하늘도 점차 어두워졌다. 계연은 정신을 집중한 채 이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분명 점을 쳐봤을 테니, 이제 곧 주 부인에게 물어보러 오는 이들이 나타나겠군요.”
그러자 왕유홍이 그제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계 선생님께서는 여기서 수주대토(*守株待兎: 나무 그루터기에서 토끼를 기다리다)하고 계셨던 건가?’
하지만 왕유홍의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계연이 하늘을 향해 요기가 담긴 검은 구슬이 들린 왼손을 뻗었다.
이내 계연은 검결(劍訣)을 이용해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툭 쳤다.
휘익!
그러자 옅은 검은색을 띠는 요기가 하늘로 치솟더니,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진 덕분에 더는 그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성안에 있던 수많은 요마도 그것을 느꼈다.
“뭐야?”
“주 부인이 도망쳤어!”
…….
“주 부인이 도망쳤다고? 위험한 상황인 게 분명해!”
…….
“망할 여편네! 우리에게 한 마디 알리지도 않고 도망쳐? 과연 가장 독한 것은 여인의 마음(最毒婦人心)이라더니!”
“우리도 어서 가자고!”
…….
성안 곳곳, 심지어 성 밖에서도 거의 동시에 요광(妖光)과 마기(魔氣)가 치솟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주 부인의 기운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도망쳤다. 흑황의 요왕이 즉시 몸을 내뺄 정도였으니, 자신들이 성안에 있어봤자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같은 시각, 주루 안에 있던 우패천과 시구도 안색이 대변하더니 주 부인의 요기가 멀리 사라진 것을 느꼈다.
‘이런!’
‘안 돼, 주 부인이 무사히 도망치다니!’
하지만 곧이어 둘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니, 그럴 리가!’
“시 형제, 우리도 당장 도망치는 게 낫지 않겠나?”
“우형,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우패천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보이자 시구가 얼른 나서 그를 제지했다. 이 성질 더러운 소는 아직 계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구 자신은 한때 무량산의 제자였으므로 계 선생님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요왕이 계 선생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리가?
주 부인의 저택이 자리한 큰길의 상공 위로 요광이 한꺼번에 치솟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희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계연의 눈에는 밤하늘에 터진 불꽃처럼 단번에 눈에 띄었다. 왕유홍은 아무런 말 없이 계연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연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왼손을 뒷짐 진 채로, 오른팔을 뻗어 넓은 소맷자락을 펼쳤다.
휘이잉…… 휘잉……!
그러자 왕유홍은 신식(*神識: 의식을 초월한 것으로, 오관과 몸을 통해 외계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심적 작용을 이름)을 통해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를 들었으나 또 자세히 들어보니 한없이 고요하기도 했다.
한순간 왕유홍은 계 선생님의 소맷자락이 바람을 맞아 더욱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바람도 먹구름도 여전한데, 한순간 계연의 소맷자락이 하늘과 해를 덮은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의 마음에도 그의 소맷자락이 음영을 드리운 것 같았다.
왕유홍도 그 정도였으니, 도망치던 요마들은 그보다 열 배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요마들이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니, 거대한 소맷자락이 위아래로 펼쳐져 있었고 그 중심에서는 바람과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공포가 치솟는 동시에 하늘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이내 사방의 풍경이 색채를 잃더니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요마들은 여전히 둔술을 펼치며 바람처럼 날고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괴이쩍고도 무시무시한 감각에 요마들은 자신들이 완전한 어둠 속에 들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바깥 세계에서는 계연이 소맷자락을 거두고 양팔을 뒷짐 진 채 멀어지는 요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 10분의 1, 2할이네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왕유홍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왕유홍은 뒷짐 진 계연의 소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왕유홍은 계연의 시선을 느끼고는 심장이 덜컹해 얼른 웃으며 맞장구쳤다.
“계 선생님께서는 현묘한 법력과 신통함을 지니셨으니, 소인 탄복할 따름입니다…….”
하늘 저편에서는 계연의 수리건곤에 갇혀버린 이들을 제외한 요마들이 한창 둔술을 펼쳐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 대부분이 사라졌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마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백여 갈래의 요광 태반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겁에 질린 요마들은 저마다 비장의 신통력을 발휘하며 젖 먹던 힘을 짜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면 성안에 있던 백성들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언제쯤 비가 쏟아지려나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았다.
주루 안에서는 우패천과 시구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에 하늘 전체에 음영이 드리운 듯한 착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후에는 도망치던 요마들의 기운 태반이 사라져 있었다.
“시 형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시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의혹에 휩싸인 둘은 이내 계연과 왕유홍이 차례로 주루 안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점소이는 그들을 알아보고는 구태여 나서서 접대하지 않았다.
우패천과 시구가 자신들을 쳐다보자, 왕유홍이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냈다.
“주 부인은 이미 재가 되었네. 성안에 있던 몇몇 까다로운 동! 료! 들도…….”
왕유홍은 일부러 ‘동료’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했다.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모두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식탁 앞에 앉은 둘과 왕유홍을 향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주 부인은 먼저 몸을 내뺐잖아요?”
그러자 우패천이 눈을 반짝이더니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시구와 왕유홍도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렇죠! 주 부인은 먼저 도망쳤습니다!”
“맞습니다, 성안에 있던 모두가 느꼈지요. 저희도 그걸 느끼고 즉시 성에서 도망쳐 나온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 부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찾지 못한 거죠…….”
셋은 저마다 한 마디씩 얹더니, 곧 이심전심으로 각본을 짰다.
우패천은 아니어도 왕유홍과 시구 모두 눈치가 빠른 이들이었으므로, 계연이 넌지시 뜻을 비치자마자 바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아차렸다. 계연 자신은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주었으니 남은 건 이제 이들이 어떻게 이를 이용하는지에 달려있었다.
계연이 우패천이 시킨 술병을 흔들어보니 아직 안에 술이 반이나 넘게 남아있었다. 보아하니 자신이 떠난 뒤로 우패천과 시구는 술을 마시지 않은 듯했다.
“이 술병은 제가 가져갈게요. 세 분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한 다음에는 최대한 빨리 이 성을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계연이 술병을 들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그가 멀어짐에 따라 셋의 귀에 주루 안의 소음이 점차 또렷하게 들려왔다.
“계 선생님,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시구가 이렇게 물었지만, 계연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 짓기만 했을 뿐 아무런 말 없이 떠나버렸다.
동시에 우패천과 시구의 귓가로 계연이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요마들이 납치해 간 백성들과 인축국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주세요.”
계연이 떠나자 남은 셋이 앉은 자리는 그제야 주루 안의 환경과 완벽히 녹아든 것 같았다. 얼마 뒤, 내내 식탁 옆에 서 있던 왕유홍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 듯이 빈자리에 늘어져 앉았다.
“휴우…….”
소년의 모습을 한 사이한 수행자의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우패천은 그와 꽤 오랜 기간 같이 행동했는데도, 이렇게까지 피곤한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반면 시구는 그런 왕유홍의 모습을 보며 내심 깊이 공감했다.
잠시 후, 왕유홍이 고개를 들더니 근처에 있던 점소이를 향해 술을 주문했다.
“이보게, 좀 전에 시킨 술 한 병 더 갖다주게.”
“예! 잠시만 기다리시면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점소이가 크게 소리친 뒤 얼른 계산대로 걸어가 술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한 뒤 또 다른 손님에게 불려갔다. 이 작은 주루의 대청을 담당하는 점소이는 그 하나뿐이라 몹시도 바빴다.
왕유홍은 웬일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다음, 잠시 망설이다 시구와 우패천에게도 한 잔씩 따라주었다. 어쨌든 이제 그들 셋은 한배에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삼매진화는 정말 대단하더군. 주 부인은 반항조차 못 해보고 죽었소……. 그리고 계 선생님의 소맷자락을 이용한 신통력은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었는데, 도망치던 놈들이 전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군…….”
시구가 술잔 안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뒤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살지 못했을 걸세…….”
우패천은 내내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지만, 속으로는 왕유홍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묘사한 것은 자신도 듣기만 했을 뿐 아직 본 적은 없는 수리건곤술인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나 신묘한 술법을 직접 목격하다니, 그는 왕유홍이 약간 부러워졌다. 미리 알았다면 그도 객잔 밖으로 나가서 구경이라도 했을 것이다. 약간의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참, 왕형, 계 선생님께 말씀드렸나?”
시구가 뜬금없이 이렇게 묻자 우패천도 귀를 기울였다. 왕유홍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이왕 한배에 탄 마당에 거리낄 것 없이 알려주었다.
“당연히 말씀드렸지. 아마 계 선생님께서도 예측하셨겠지만, 그자의 정체는 그 신비롭기 그지없는 도사연일세. 하지만 그 여우는 지금 천우주가 아니라 옥호동천에 있지.”
“정말 도사연이라고?”
시구가 의아한 듯이 이렇게 묻자 우패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소리쳤다.
“그럴 리가! 그 여우는 건원종 장교와 싸우다가 그자의 뇌법으로 만들어진 검에 의해 죽었잖아!”
“하하, 그 여우가 가진 수단이 얼마나 많은데.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그 여우가 구미호에 필적할 도행을 지녔다는 걸 알지 못했을 거요. 그걸 제외하더라도, 천계맹에서 양황, 특히 흑황과 가장 먼저 유대 관계를 쌓은 것도 그 여우가 한 일이지.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오.”
시구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우패천과 왕유홍에게도 한 잔씩 따라주었다.
“그럼 계 선생님께서는 도사연을 찾으러 간 건가?”
왕유홍이 술잔을 든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글쎄,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옥호동천은 어쨌거나 여우족들의 성지이고 그들의 터전이라, 도행이 높은 여우가 많고 구미호도 몇이나 되지. 비록 계 선생님께서 탁월한 신통력을 지니셨긴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 직접 찾아가서 도사연을 어떻게 하시진 않으실 걸세…….”
우패천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술만 마셨다. 우패천은 이 두 사람보다 계연을 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속으로는 어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