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화. 서역 남주의 명왕불국
한 줄기 빛이 하늘에서 번쩍, 흐르듯이 떨어져 내리더니 갑자기 종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내 상공 어딘가에 희미한 검 형태의 빛이 나타나더니, 천천히 그 빛이 흩어지며 마침내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계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렇게 고작 한 달여 만에 계연은 서역 남주의 근해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한 달이 넘는 기간 중 7, 8할은 길을 서두르는 데 썼고, 나머지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못한 둔술과 방향을 조정하는 데에 썼다.
그렇게 길을 서두르느라, 아주 오랫동안 법력이 바닥난 걸 느끼지 못했던 계연마저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가 구천에서부터 천천히 고도를 낮추자, 천지 사이에 흐르는 막대한 원기가 느껴지며 가벼운 현기증마저 일었다.
비록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그다지 편친 않았지만, 시간을 반이나 넘게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계연은 무척 만족했다.
계연은 둔술이 아니라 바람의 힘을 빌려 비행하면서, 원기를 토납(*吐納: 입으로 묵은 기운을 내뿜고 코로 새 기운을 들이마시는 술법)하고 정신을 집중한 채 가만히 자신 안에 있는 도경(道境)을 느꼈다. 그런 방식으로 소모가 극심했던 법력과 신식(*神識: 의식을 초월한 것으로, 팔식(*八識: 오관과 몸을 통해 외계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심적 작용)을 이름)을 회복시켰다.
계연은 법안을 열어 아래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다가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눈에 담았다. 서역 남주의 기운은 평화로웠고 곳곳에 상서로운 상(相)이 엿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은 ‘대롱의 구멍을 통해 표범을 보면, 표범 전체가 보이지 않고 반점(斑點)만 보인다(管中窺豹: 부분적 관찰만으로 전체를 추측한다는 뜻)’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좀 더 사물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점괘를 함께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잠시 후, 계연은 영각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확정 짓고는 빛을 내뿜으며 한 줄기 푸른빛이 되어 날아갔다.
사흘 뒤, 계연의 법안에 하늘과 땅을 뒤덮은 불법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왕 서역 남주까지 온 데다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연은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도일과는 일면식이 있는 사이일 뿐이고 옥호동천에 방문하기로 한 약속도 실은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그러니 여우 요괴인 도일보다는, 자신과 교분이 좀 더 깊은 불문(佛門)의 불인명왕이 더욱 믿을 만했다. 반면 자신과 한번 맞붙은 적이 있는 좌지명왕과는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불법으로 인해 피어오르는 그 찬란한 빛에 가까워질수록 계연은 여러 종류의 영기를 포함한 하늘과 땅 사이의 원기가 온화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비록 별다른 영향력은 없었지만, 계연은 그것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계연은 원래 불국(佛國)이라는 곳이 수선자들이 머무는 성지나 여러 동천처럼 속세와 분리되어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와 보니 외부 세계와 전혀 단절되어 있지도 않았고 따로 설치된 금제도 없었다. 그저 다른 지방과 달리 유달리 짙은 불교의 정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불법의 기운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따라 이동하던 계연은, 어느 순간 고도를 낮춰 맑은 바람을 타고 지면에 내려섰다.
불국은 사실 통칭일 뿐 실제로는 각기 다른 명왕의 도장(*道場: 불교에서 불도를 닦기 위해 설정한 일정한 구역, 부처와 보살이 머무는 신성한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도장들이 서로 맞붙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도장도 있었다. 불인명왕이 예전에 알려준 위치는 그리 명확하지 않았고 주위에 참고할 만한 사물도 없었기 때문에, 계연은 자신이 잘 찾아온 건지 행인에게 묻기로 했다.
계연이 내려선 곳은 어느 작은 도시의 외곽이었는데, 그는 일부러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면 그보다 더욱 가까운 곳에 불문의 사찰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불경 외는 소리와 불광 특유의 정취를 살펴보니 제대로 된 불문의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사찰 주위의 풍경은 계연의 예상 그대로여서, 사찰이 자리한 큰길에 이르기도 전에 거리는 이미 크고 작은 마차와 향을 올리러 가는 참배객들로 붐볐다. 참배객들은 대부분이 일반 백성들이어서, 계연이 상상했던 것처럼 전부 승려와 비구니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연은 마치 풍경을 감상하는 문인(文人)처럼 천천히 외곽지대에서부터 벗어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인파에 섞여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의 참배객들이라고 해서 저마다 마음속에 진실로 부처를 품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곳 특유의 방언은 멀리 운주의 대정국에서 온 계연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렸지만, 굳이 마음을 통하게 만들거나 기술을 모방하는 술법을 쓰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때, 육순이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의 계연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거리를 걸으면서 때때로 사찰이 있는 방향으로 허리 숙여 절을 올리고 있었는데, 동시에 입으로는 쉬지 않고 불경의 구절을 중얼거렸다. 계연은 어느 정도 불경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읽는 구절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틀린 곳도 있었지만, 노인의 몸에는 주위 사람들 대부분보다 짙은 불음(*佛蔭: 불법(佛法)의 비호)이 드리워져 있었다.
계연은 노인에게 다가가 적당한 순간에 이렇게 일깨워주었다.
“어르신, ‘당초발심(當初發心) 법중불감(法中不減)’ 다음에는 ‘몽불견상(蒙佛見相), 불사세간은중애심(不捨世間恩重愛深), 선재대명왕불(善哉大明王佛)’이 옵니다.”(*<능엄경(楞嚴經)>에는 ‘네가 처음에 마음을 먹어 출가할 때 나의 불법 가운데 어떤 수승한 모습을 보고 세간의 깊고 무거운 은애(恩愛)를 갑자기 버렸느냐?’라는 부처의 질문이 나온다.)
노인이 걸음을 멈춘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자, 계연이 차분한 태도로 담담한 미소를 띤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을 주어 고맙소, 선생! 정말 고맙소!”
노인은 두 손을 합장하여 계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다시 걸음을 옮기며 계연이 알려준 대로 성심껏 불경을 읊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구절을 외고 나자 유달리 맑은 기운이 느껴져, 노인은 가볍게 숨을 내뱉은 뒤 다시 계연을 향해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계연은 노인을 따라 걷다가 그가 불경을 다 외었을 때 다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어르신. 이곳이 불국, 불인명왕의 도장에 속하는 지역인가요?”
그러자 노인이 의혹에 서린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선생, 이곳은 마하니서(摩訶尼西) 불장(*佛藏: 불상을 모셔둔 곳)으로, 비구(*比丘: 출가한 남자 승려)의 나라이고 불법의 빛이 온 땅을 덮으니 확실히 선생께서 말씀하신 불국은 맞습니다. 하지만 무슨 도장으로 나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계연은 노인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노인도 정확히 모르는 걸 보니, 주위의 참배객들도 아마 모를 듯했다. 이에 계연은 사찰에 들어가 승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럼 다른 분께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계연은 노인을 향해 살짝 양손을 맞잡은 뒤, 금방 인파에 섞여 노인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그는 줄을 서봤자 참배객들은 모두 향을 올리러 들어가는 것이고, 만날 수 있는 이도 결코 고인(高人)이라고 볼 수는 없는 어린 사미(*沙彌: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 수행 중인 동자승)일 뿐일 테니 굳이 줄을 서지 않기로 했다.
한편, 사찰 뒤편의 커다란 나무 아래 그늘에서는 어느 나이 든 승려가 방석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참선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낮은 탁자가 놓였고, 그 위의 황동으로 된 정교한 향로에서는 푸른 연기가 솟아올랐다. 연기는 향초처럼 곧게 솟아오르다 천천히 흩어졌다.
그러다 승려가 무언가를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떠보니, 그에게서 2장(약 6m) 정도 떨어진 거리에 푸른 장삼을 입은 기품있는 선생이 서 있었다. 그에게서는 어떤 신광(神光)도 비치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온화한 기운이 흘러 천지와 혼연일체가 된 듯 보였다.
“선재 대명왕불. 저희 사찰에 오신 고인께 늙은 승려가 인사 올립니다.”
상대가 고인이라는 걸 알아본 승려가 천천히 방석에서 일어나 계연을 향해 불교식 예를 올리자 계연도 양손을 맞잡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대사, 이 사찰에는 고요한 승사(*僧舍: 승려가 머무는 거처)며 소박한 선방(*禪房: 참선하는 방)이 많고, 불상이 두루 비추는 곳도 눈만 돌리면 있는데, 어찌하여 이 나무 아래에서 참선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노승이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만물에는 영(靈)이 있어, 우리 부처이신 명왕께서는 이를 모두 제도(*濟度: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건져내어 극락세계로 이끄는 것)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중생과 만물이 부처에 예를 표하나, 모든 중생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우리 부처이신 명왕께서 이르시길, 멀리 동쪽 땅에 신묘한 나무가 하나 있어, 그 아래에서 도를 논하니, 나무에 영이 서려 혜근(*慧根: 도를 낳는 바탕이 되는 지혜)을 얻었고, 이에 그 나무를 혜목보제(*慧木菩提: 보리수.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불교의 상징이 됨)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노승이 이 나무 아래에서 참선한 것은, 바로 그 혜근의 뜻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계연은 이미 답을 구했음에도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불인명왕의 도장인지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1,600리 떨어진 항사(恒沙) 산역에 가시면 저희 부처이신 불인명왕께서 중앙에 계십니다.”
이에 계연이 노승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신 그 보리수는 동토 운주, 연량국 동추부의 대량사 안에 있습니다. 언젠가 그곳에 직접 방문하시어 참선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계모(某)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계연이 몸을 돌려 가벼운 걸음으로 후원을 떠났다.
그러자 노승은 멍하니 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합장했다.
‘선재 아불인명왕(*我佛印明王: ‘우리 불인명왕’이라는 뜻), 저분이 바로 계 선생님이시구나!’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도 확인했고 불인명왕이 어디에 머무는지도 알게 되었으니, 계연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항사 산역(山域)으로 향했다. 비록 그 산역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지만, 북쪽으로 1,600리 날아가면 자연히 알게 될 터였다.
물론 계연은 사찰 뜰에서 곧장 하늘로 날아오른 게 아니라, 도보로 사찰을 벗어난 뒤 구름을 밟고 날아오른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예불하는 참배객들을 수없이 마주쳤고, 조금 전에 길을 물은 노인이 향 한 대를 쥐고 어느 불전에서 성심껏 절을 올리는 것도 보았다.
계연에게 있어 1,600리 정도는 무척 가까운 거리여서 존중을 표할 겸 천천히 비행했지만,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법의 빛이 가장 왕성한 곳으로 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항사 산역을 찾게 된 것이다.
산역의 풍경을 감상하던 계연은 그제야 이름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산역은 수많은 산이 들쑥날쑥 솟아 있었으나 눈에 띄게 우뚝 솟은 봉우리는 없었고, 녹색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금빛이 반짝였다. 마치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사구(*沙丘: 바람이 몰아쳐 이루어진 모래 언덕) 같았으나, 진짜 사구와는 달리 지면이 단단했다.
다만 이곳의 금빛이 모래의 원래 색깔인지 아니면 오랜 기간 불교의 정취와 불법의 기운을 받아 나타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