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화. 천창산 옥호동천에 쳐들어가다
산역에 가까워지기 전 계연은 상공에서부터 내려섰다. 산에는 여러 불문의 도장이 있어서 승려들이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곳곳에서 불법의 무궁한 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주위를 오가는 승려들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불국에서처럼 아무런 금제가 없어, 이곳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항사 산역을 찾아내는 건 여느 사찰을 찾아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불심(佛心)을 지닌 자이거나, 계연처럼 일정 수준의 도행을 지닌 수행자만이 가능했다.
‘서유기 속에서 지용부인(*地涌夫人: 하얀 털에 노란 코를 지닌 쥐 요괴)이 석가여래의 향촉을 훔쳐 먹은 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어.’
계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산길을 따라 항사 산역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디가 정문인지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어디에도 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이르자 불경을 외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는데, 소리는 저마다 달랐지만 조금도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경을 듣고 따라 읽는 것과 홀로 불경을 읽는 것은 확연히 다르게 들렸고, 불경을 설법하는 것과 논하는 것도 각기 다른 특징이 있었다. 심지어 계연의 법안은 각기 다른 소리에서 솟구치는 불법의 기운을 판별해낼 수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운의 주인되는 승려의 도행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눈앞에 우뚝 솟은 사구 두 개가 나타났고, 그 사이로 사미승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계연은 금빛 모래를 밟고 있었으나 촉감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단단했다. 하지만 허리를 숙여 가볍게 지면을 손으로 떠 올리면 금빛 모래를 한 움큼 담음 수 있었다.
손가락 틈새로 모래가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걸 지켜보던 계연은 이내 항사 산역에 흥미가 생겼다. 알고 보니 이곳이 단단하게 느껴졌던 것은 모래의 특성이 아니라 온산을 덮은 불성(*佛性: 중생이 부처가 될 성질) 때문이었다.
금빛 모래가 손아귀 사이로 다 떨어지기도 전에 무언가를 느낀 계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사구 중앙에 서 있는 노승이 눈에 들어왔다. 노승은 계연과 시선이 마주치자 합장하며 예를 행했다.
“항사산 아래 서서 중생들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시다니, 계 선생님은 과연 정취가 남다르십니다!”
그러자 계연은 그가 과장을 참으로 잘한다고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읍했다.
“불인대사, 오랜만입니다! 전보다 불법이 더욱 심오해지셨군요!”
사구 사이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항사 산역 중심의 불좌(佛座)에 있어야 하는 불인명왕이었다. 그가 계연의 찬탄에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 계 선생님과 도를 논한 후에 얻은 수확입니다!”
계연은 사실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불인명왕이 곧장 이를 인정할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그때 깨달은 바가 확실히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출가인이 그런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계연도 그간 자신의 수행이 발전해온 세월을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니 다른 이가 수행에 진보를 이룬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계 선생님, 이번에 서역 남주에 온 것은 이 노승과 한담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불인명왕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계연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불인대사, 계모(某)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사께 동행을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옥호동천에 쳐들어갈 일이 좀 생겼거든요. 다만 대사께서 가능하신지 모르겠군요.”
불인명왕은 사실 계연이 항사 산역에 찾아온 것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느꼈지만, 그래도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쳐들어가다’는 말을 쓰다니, 딱 봐도 그 목적이 불순했다.
“나무마하 아불대법(*南牟摩訶 我佛大法: 위대한 우리 부처의 크나큰 법을 믿고 받들며 순종하라)! 계 선생님께서 직접 이 늙은 중을 찾아주셨는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항사 산역에서 잠시 쉬고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곧장 옥호동천으로 향하실 예정입니까?”
불인명왕의 대답은 아주 호쾌했다. 그는 출가인이었지만 태도가 아주 시원시원했으므로 계연도 굳이 점잔을 뺄 필요가 없었다.
“그러시다면, 사정이 좀 급하니 곧바로 천창산으로 향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재, 그럼 선생께서 구름을 부르시지요.”
계연과 불인명왕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전혀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계연은 곧장 그의 말에 따라 소매를 휘둘러 구름을 일으키더니, 항사 산역에서 불인명왕을 데리고 곧장 상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는 왔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한 줄기 빛처럼 날아갔다.
* * *
계연은 예전에 불인 노승이 천창산은 사실 일반적인 의의의 산이 아니라 여우족들 사이에서 특별한 의미가 담긴 이름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을의 정취가 짙어지면 수목이 푸르르고, 낙엽이 흩날리면 온 산의 푸르름이 가신다…….’
천창산은 초가을과 가을이 한창일 때(中秋), 늦가을일 때의 장뢰(長瀨), 청창(靑昌), 묵월(墨月), 세 산의 봉우리들을 가리켰다.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다가오는 때, 그 창망(*蒼茫: 넓고 아득하다는 뜻)함의 시작을 일컬어 천창이라 하였다.
천창산과 달리 장뢰, 청창, 묵월 세 산은 일반적인 의의를 지닌 산이었으므로 찾기 어렵지 않았지만, 아직 작은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대략 6, 7일 후 두 사람은 청창산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불인명왕은 발아래로 펼쳐진 울창한 산을 보고는 옆에 서 있던 계연을 향해 말했다.
“계 선생님, 이 노승의 도장이 비록 남주에 자리해있긴 하지만 옥호동천과는 그리 왕래가 없습니다. 또한, 지금은 봄이고 아직 가을이 되려면 멀었으니, 천창의 의미에도 부합하지 않지요. 게다가 노승은 눈이 신통하지 못하여, 동천의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계연은 담담한 얼굴로 청창산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그러자 불인 노승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이렇게 하시지요. 옥호동천은 우리 불문(佛門)과 관계가 얕지 않아서, 비록 노승은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좌지명왕은 이전에 옥호동천에 몇 차례 설법을 하러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좌지명왕에게 가서 조언을 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옥호동천이 가을에 열린다지만, 안에 있는 이들이 가을에만 밖에 나오는 건 아닐 것 아닙니까? 분명 들어갈 방법이 있을 거예요. 보아하니 마침 밖에 나와 있는 여우가 하나 있군요.”
“예?”
불인명왕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으며 생각했다.
‘계 선생의 법안은 정말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난 것일까? 어떻게 옥호동천의 여우 하나가 밖에 나와 있는 걸 알고 계시지?’
“하하,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마시고 절 한번 믿어보세요.”
계연은 이내 구름을 움직여 불인명왕과 함께 서쪽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가 옥호동천의 여우가 밖에 나와 있다는 걸 안 것은, 법안을 이용해 보거나 요기(妖氣)의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그저 마음속으로 느낀 것이었다.
의식 속 세계에서 계연의 법상(法相)은 어느 모호한 별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다른 별보다 좀 더 밝았는데, 계연과의 거리도 훨씬 가까웠다. 반면 주위의 다른 별들은 거리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정확히 느껴지지 않았다.
이 별들이 뜻하는 것은 모두 여우였는데, 바로 일전에 조월국의 버려진 장원에서 계연과 연이 닿았던 그 여우 무리였다. 그들은 겹겹이 둘러싸인 산과 여러 갈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건너 정말로 옥호동천을 찾아낸 것이다.
바로 그 여우 무리 중 하나의 위치가 다른 별들과 달리 계연에게 아주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에 계연은 다른 여우들은 모두 동천 안에 있고, 그 여우 하나만 밖에 나와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반각(약 7-8분) 뒤, 계연과 불인명왕은 산 외곽의 어느 작은 마을에 내려섰다. 그러자 불인명왕도 이곳에서 옅은 요기가 느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체 계 선생은 이렇게나 먼 거리에서 어떻게 이를 느낀 것일까?’
“대사,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불인명왕은 계연의 말을 따르겠다는 듯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어느 뒷골목의 모퉁이로, 마을에서도 외진 곳이라 지나다니는 이가 없었다.
작은 마을은 아주 조용했는데, 막 해가 진 시각이었기 때문에 곳곳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행인들은 모두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오직 계연과 불인명왕만이 느긋해 보였다.
그렇게 반각(약 7-8분) 정도 기다리니, 어느 불그스름한 형체가 주루의 나뭇간 뒤쪽 창문에서부터 튀어나왔다. 그 형체가 골목을 따라 달리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형체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곳에서 돌연 다리 네 개와 마주쳤다.
퍽……!
여우는 불인명왕의 왼쪽 다리에 부딪힌 뒤, 뒤로 데구르르 두 바퀴 굴렀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시커먼 물체가 여우에게서부터 굴러 나왔다.
그르르르-!
“아이쿠!”
여우는 그것이 바닥을 굴러가는 걸 보더니 아픈 얼굴을 어루만질 새도 없이 얼른 뛰어가 그 물체를 끌어안았다.
계연은 여우가 다급히 보호한 것이 작고 검은 술 단지라는 걸 알아보았다. 표면에는 붉은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종이 위에는 ‘추엽취(秋葉醉)’라고 적혀 있었다.
여우는 술 단지가 깨지지 않은 걸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는데, 한 명은 서생이고 다른 한 명은 승려였다. 이에 여우는 즉시 공황에 빠져 달아나려다가 계연을 알아보았는지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우들은 계연과 헤어진 뒤로, 어떻게 해도 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기운을 지녔는지 대략 기억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계연을 마주치자, 여우는 그가 예전에 자신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가르침을 전해준 선생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계연은 이 여우의 도행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그에게서 도사연과 도운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이 여우에게 이런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은, 자신의 예상대로 그가 옥호동천에서 진수(眞髓)를 전수받았다는 뜻이었다.
이 여우들은 계연이 보완한 <운중유몽>을 지닌 채 옥호동천을 찾아갔을 것이고, 그 책은 틀림없이 구미호의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배척을 당했겠는가.
여우가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 계연이 오른손 검지를 입에 대더니 말했다.
“쉬이……. 따라오거라.”
계연은 홀로 생각에 잠긴 듯한 불인명왕을 한번 보고는, 흥분한 기색을 한 여우를 데리고 막다른 골목길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여우 하나가 골목 끝에 이르자 그곳에는 건초를 보관한 초막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계연과 불인명왕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건초 한 단을 찾아 각자 그 위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