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46화 (846/892)

846화. 이번에는 절대로 그 여우를 놓아줄 수 없습니다

여우는 술 단지에 달린 끈을 입에 문 채로 건초 더미 위에 오르더니, 술 단지를 내려놓자마자 계연을 향해 연신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정말이군요, 정말 계 선생님이셨어요! 저예요, 저 호래(胡萊)예요. 선생님 덕분에 저희 모두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여우족의 어르신들 모두 저희가 자질이 뛰어나다며 칭찬하셨어요! 참, 선생님, 저희를 보러 오신 건가요? 그나저나 검은 개 어르신은 어찌 지내세요? 그날 저희가 너무 황망히 도망쳐서 검은 개 어르신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그래, 그래, 계모도 너를 기억하고 있단다.”

계연은 그의 물음에 여우들과 함께 술을 나눠마셨던 커다란 검은 개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 검은 개는 술맛에 눈을 뜬 모양이라, 계연은 떠나기 전에 개에게 술을 한 잔 따라준 뒤 격려의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그 검은 개는 별일 없단다. 그날 밤에도 그저 취하기만 했을 뿐이야.”

그러자 호래는 그 커다란 검은 개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을 떠올렸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계연이 자기 옆에 놓인 술 단지를 바라보는 걸 느끼고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

“이 술은 절대 훔쳐 온 게 아니에요! 저 술집에서는 항상 저희 큰할머니께 술을 공양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사흘마다 와서 술을 받아 가는 거예요. 그리고 저기 들어갈 때는 저도 환술을 써서 모습을 바꾸고요.”

그러자 계연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옥호동천을 찾아낸 모양이구나. 거기서 수행을 닦으니 어떻든?”

그의 물음에 여우가 즉시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꼬리와 양팔을 휘두르며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럼요, 찾았고 말고요! 동천은 아주 아름다워요. 정말이지 선경(仙境)이 따로 없을 정도예요. 저희는 수행 속도가 아주 빠른 편이었어요. 선생님께서 남기신 책 덕분인지, 모두 저희가 자질을 타고났대요. 다만 너무 많은 여우가 그 책을 빌려 가고 싶어 해서, 저희도 이제는 그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예요.”

“곧장 빼앗아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구나. 최소한 그 책은 명의상으로는 아직 너희 것이니까. 나중에 너희들의 도행이 높아지면, <운중유몽>에 대해서도 발언권이 생길 거야.”

계연이 이렇게 위로하자 여우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호리 숙부도 그렇게 얘기하셨어요.”

“그래, 어쨌거나 너희들이 이왕 옥호동천에 있다니, 내가 수소문할 사람이 하나 있다. 아, 여우 말이야.”

그러자 건초 더미 위에 앉은 여우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뭐든지 물어보세요,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과 했던 약속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저희 모두 오늘날의 경지에 이른 것은 예전에 선생님께서 책을 통해 보여주신 광경과 그 책을 읽고 얻은 깨달음 덕분인 것을 알고 있어요. 다만 이렇게 오래도록 그 책을 돌려받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으면, 옥호동천에 좀 더 늦게 들어올 걸 그랬어요.”

계연과 불인명왕은 이제 이 여우가 툭하면 대화 주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이렇게 대화를 끌고 갈 수 없던 계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희 중에 도사연이란 여우를 잘 알거나 만나본 여우가 있니?”

“도사연? 들어본 듯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호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돌연 이렇게 소리쳤다.

“아, 생각났어요! 큰할머니가 지난번에 지금 <운중유몽>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도사연이라는 여우선인이라고 말해주었었어요.”

“음? 그게 대략 언제쯤 일이지?”

계연이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감지고 이렇게 묻자, 호래가 다시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마 반년은 되었을 거예요. 큰할머니께서는 그 여우선인이 무척 대단한 존재라고 말했었어요. 어쨌든 그 여우선인은 천서(天書)를 보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저희에게 꼭 보답하겠다고 약속했었어요. 그런데 아직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그러자 계연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계연은 호래의 말에 영각을 통해 즉시 감응을 느꼈다. 도사연은 원래 도원자의 뇌법(雷法)에 당해 죽었어야 했는데 지금 멀쩡히 옥호동천에 살아있는 것을 보니, 배후의 바둑돌을 쥔 자 외에도 그가 남긴 <운중유몽>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계연은 간접적으로나마 도사연을 도운 셈이었다.

하지만 <운중유몽>이 도사연의 손에 있다는 건, 달리 보면 좋은 점도 있었다. 설령 옥호동천에서 도사연의 종적에 대해 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도, 계연은 이제 도사연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아! 마침 내가 불인대사와 함께 옥호동천을 방문하려 하는데, 네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겠니?”

그러자 여우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오르더니 여우는 앞발로 머리를 긁적였다.

“계 선생님, 제가 두 분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로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저 같은 일개 여우가 어떻게 동천에 누군가를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음, 그렇다면 우리를 곧장 옥호동천으로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계연과 불인명왕이 찾아왔다고 대신 말을 전해주렴.”

“불인명왕이요?”

여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대경실색한 얼굴로 한쪽에 서 있던 노승을 바라보았다.

“대, 대사께서 불인명왕이세요?”

15마리 여우들의 마음속에 계 선생님은 고인이자 은인이었으며, 지금에 와서 봐도 그는 도행이 무척 높은 수선자인 게 확실했다. 게다가 이 명왕이란 존재는 천요(天妖)인 구미호와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 같은 여우가 보기에 명왕은 도행이 까마득히 높아 그 끝을 볼 수가 없을 정도의 존재였다.

그의 물음에 노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 이 노승이 그리 보이지 않느냐?”

여우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려다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엄두가 안 나,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계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렇게 물었다.

“저희가 누구에게 소식을 전했으면 하시나요?”

“만약 할 수 있다면 도일에게 전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에게 말을 전할 방법이 없다면, 아무나 찾아서 말을 전해달라 하면 된다. 불문의 명왕이 찾아왔다는데 그 정도 체면은 세워주겠지.”

계연이 웃으며 불인명왕을 쳐다보자 불인명왕이 낮은 소리로 불호(*佛號: 부처의 명호(名號). 주로 불교도들이 염불하는 ‘阿弥陀佛’(아미타불)을 지칭함)를 읊조렸다.

“도일 조사(*祖師: 학파·종파 따위의 창시자)께요? 저, 저는 그분을 뵌 적도 없는데요……. 호리 숙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큰할머니께 말씀드려볼게요.”

“괜찮다. 내 말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

계연은 자신이 들어가지 못할 거란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옥호동천 내부에 말을 전하기만 하면 자신들은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초막 뒤편에서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작은 마을을 벗어났다.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호래가 산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전과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았다.

호래에게는 정말로 자신만의 특별한 통로가 있었다. 바로 청창산 외곽의 어느 산봉우리 중턱에 자리한 개구멍만 한 크기의 땅굴이었다. 호래가 술 단지를 입에 물고 안으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기운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계연과 불인명왕은 호래를 보내고 난 후 산 아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계 선생님, 도사연이라는 여우가 바로 예전에 제게 말씀하셨던 그 요괴지요? 그 천서를 다시 돌려받으시려는 겁니까?”

불인명왕이 자신이 추측해낸 대로 묻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 천서는 여우들에게 준 것이니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요. 만약 그 천서를 돌려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천서를 처음에 쓴 분뿐일 거예요. 또 도사연이라는 여우는 절대 그저 그런 요괴가 아니에요. 이번에 계모가 여기까지 온 것도 실은 도사연을 죽이려고 온 거예요.”

계연이 상대가 머무는 동천 밖에 서서 태연하게 그 안의 여우선인을 죽이러 왔다는 말을 내뱉자, 불인명왕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계연은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에게 천우주가 온통 도탄에 빠진 현 상황과 도사연과 얽힌 이해관계를 설명해주었다. 다만 천지 간의 바둑판에 대한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불인명왕이 연이어 불호를 읊조리더니 말했다.

“자비로우신 부처님! 천우주의 혼란이 이 노승의 생각보다 더욱 심각한 듯하군요. 요마 놈들이 감히 그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다니……. 하지만 도사연이 아무리 악행을 벌이고 다니고 이번에 큰 대가를 치렀다고는 해도, 이미 구미호로 거듭났는데 옥호동천에서 그 여우를 내어주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겠죠. 그들이 순순히 내어줄 거라 여겼다면 저도 대사께 도움을 청할 필요 없이 혼자 왔을 거예요. 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절대로 그 여우를 놓아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불인명왕도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합장하며 불호를 외쳤다.

“선재! 정 그러시다면, 이 노승도 계 선생님을 도와 함께 그 요괴를 징벌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옥호동천은 당연히 크기가 작지 않았지만, 호래는 ‘큰할머니’를 대신해 술을 받으러 간 것이었으므로 오가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에 그가 특별한 통로를 따라 자신이 머무는 곳까지 도달하는 데는 반 시진이면 충분했다. 그가 머무는 곳에는 아름다운 화원이 가꾸어져 있었고 중앙에 정교하게 지어진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이때 건물 앞에 놓인 당의(*躺椅: 누워 잘 수 있는 휴식용 의자)에는 한 여인이 나른한 자태로 앉아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그러다 여우가 입에 술 단지를 물고 뛰어오는 걸 발견한 여인이 두 눈을 밝게 빛내며 맞이했다.

“호래야, 돌아왔구나!”

“큰할머니, 큰할머니!”

호래는 그녀를 부르며 뛰어오더니, 화원에 들어선 후에는 14,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 술 단지를 들고 안으로 걸어왔다.

여인은 누워있던 당의에서 일어나 앉더니, 술 단지를 받자마자 봉니(*封泥: 술을 밀봉하기 위해 사용한 진흙 덩이)를 떼어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입가로 새어 나온 술이 목을 따라 여인의 가슴께까지 타고 내려갔다.

그녀는 거의 한입에 술 단지를 비우고는 꺼억, 트림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술이 묻은 목과 가슴께를 쓱 훔친 다음, 그마저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핥았다.

여인이 술을 다 마시자 호래가 서둘러 말을 전했다.

“큰할머니, 제가 돌아오던 길에 수선자와 승려 두 분을 만났는데, 저희 옥호동천에 방문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또 도일 조사를 안다고도 말씀하셨어요. 그 스님께서는 자신이 불인명왕이라고 하셨고요.”

“뭐라고?”

여인이 경악한 얼굴로 되물은 다음, 미심쩍은 눈길로 호래를 쳐다보았다.

“너 혹시 술 훔쳐 마신 거 아니냐? 어찌 불인명왕을 그리 쉽게 마주쳐?”

“아니에요, 할머니! 저도 그 스님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말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도일 조사를 뵙지 못하니, 할머니께서 가셔서 대신 말씀드려 주세요.”

여인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 엄청난 소식에 단번에 얼굴에서 웃음꽃을 피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어찌 되었든 도일 선배께 가서 알리긴 해야지. 참, 그 승려는 자기를 불인명왕이라고 했고, 그 수선자는 누구라고 하더냐?”

“아, 성이 계씨라고 하던데요. 이름은 모르겠어요.”

“그래, 알겠다. 잘했구나. 여기서 기다리거라, 나는 수각(樹閣)에 갔다 오마!”

여인은 곧장 하늘로 치솟더니 한 줄기 빛이 되어 멀리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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