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47화 (847/892)

847화. 죄를 물으러 오다

동천 안의 모든 영기가 모여드는 산골짜기의 한 호수 옆에는 푸릇푸릇한 수풀 위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자라난 고목(古木)이 한 그루 있었다. 이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했으나 내부는 텅 비어있었는데, 창문과 문이 달려있었고 안에는 따로 방도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도일이 머무는 거처였다.

수각에 가까워지자 여인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해,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태도로 도일에게 호래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언제나 차가운 얼굴을 하던 도일이 ‘계씨’라는 말을 듣고는 안색이 일변했다.

“계연? 이런 때에 옥호동천에는 왜 왔지? 나를 찾아왔다고?”

도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점괘를 쳐보았다. 비록 아무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는 계연이 정말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온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잠시 망설이던 도일은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사(思思), 가서 그 여인에게 도사연을 잘 지켜보고 계연이 왔다고 전해라.”

여인은 도일의 안색이 바뀐 걸 보고는 바로 큰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얼른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서려다 이렇게 물었다.

“도 선배께서는 그들을 탐탁잖게 여기는 게 아니었나요?”

도일의 말을 들어보니 찾아온 이들이 좋은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게 확실했지만, 어쨌든 그들이 노리는 건 도일이 아니었다.

여인의 물음에 도일이 웃으며 대답했다.

“같이 옥호동천에 머무는 이들이니 소식을 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베푸는 인의도 딱 거기까지지. 자, 너는 어서 가보거라. 나는 청창산에 나가 계 선생과 불인명왕을 맞이해야겠다. 내가 잠시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만 너무 오래 붙잡아둘 순 없을 것이다.”

“예.”

이내 빛 두 줄기가 수각에서부터 솟구치더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 *

일각(7~8분) 뒤, 계연과 불인명왕은 오래된 나무 몇 그루에서 빛이 나는 걸 발견했다. 곧이어 나무들 사이로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붉은 칠을 한 대문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부터 도일이 홀로 걸어 나와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계 선생님, 그때 헤어진 후로 때때로 선생의 풍모를 떠올리곤 했었습니다. 어쩐지 최근에 그때 생각이 자주 났는데, 오늘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실 줄은 몰랐군요. 게다가 불인명왕께서도 함께 와주시다니, 정말이지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도일은 깍듯이 예를 올렸고 말투도 겸손하고 온화했다. 그러자 계연은 저도 모르게 이자를 첫 대면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 여우선인은 차가운 표정에 딱딱한 태도를 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 한번 짓지 않았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계연은 이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자신이 손님으로 온 입장이니만큼, 아무리 목적이 딴 데 있다고 해도 지켜야 할 예의는 다하기로 했다. 일단은 먼저 예를 지키고 안 될 때는 무력을 행사한다(先禮後兵)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연도 도일을 향해 읍했고 불인명왕도 불교식 인사로 화답했다.

“도일 도우, 계모(某)가 오늘 이리 급작스럽게 방문하게 되어 혹시 옥호동천의 수행자들에게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선재, 노승이 인사 올리오.”

도일은 그 말에 미소 짓더니 몸을 살짝 틀어 안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하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계 선생님! 저희 옥호동천이 비록 손님 접대로 이름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동료 수행자들을 환영하고 마땅한 예를 다해왔습니다. 두 분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예, 그럼.”

“예.”

나무 사이로 생겨난 붉은 대문은 아마 옥호동천의 보물인 듯했다. 계연은 원래 이 문이 환술로 만들어진 것이라 여겼으나, 문을 통과하던 중 대문 위로 흐르는 영기와 보일 듯 말 듯한 영문(*靈紋: 신령한 무늬)을 보고는 이것이 방어 금제의 일부임을 알아차렸다.

문의 한쪽은 두 그루의 고목 사이에 있었는데, 그들이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더는 그쪽의 풍경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면 문의 다른 한쪽은 절벽에 있었다.

계연과 불인명왕이 도일을 따라 붉은 대문을 통과하니, 대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 문은 마찬가지로 붉은색을 띤 커다란 암석에 박혀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지대가 높은 곳이었는지, 처음에는 푸르른 수목과 산봉우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간 앞을 향해 걸으니 저 멀리 수려한 풍광이 펼쳐졌다.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산이 보였는데, 대부분은 평탄한 언덕으로 되어있었고 곳곳에 작은 강줄기가 흐르거나 샘이 고여 있었다.

계연이 보기에 옥호동천은 여느 선도의 성지처럼 심오하거나 속세를 초월한 듯한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꽃향기가 그윽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계연은 사실 이런 풍경을 좀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자, 저희 옥호동천의 풍광이 어떠십니까?”

도일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좀 더 담담해 보였다. 그가 이렇게 묻자 계연도 당연히 웃으며 감탄을 내뱉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풍광이 보는 이의 마음을 이끄니,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곳이군요.”

“과찬이십니다, 계 선생님. 그럼, 이제 제가 머무는 수각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분께서 오셨으니 저도 그간 아껴둔 것들을 꺼내 대접해야겠군요.”

도일이 이렇듯 친절하게 나오자, 계연과 불인명왕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계연은 도일이 정말로 눈치채지 못한 것이든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든,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도일 도우, 계모가 오늘 옥호동천에 방문한 데에는 도우를 만나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실 만나고 싶은 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 그게 누구인지요?”

계연은 멀리 풍경으로 눈을 돌리더니, 옥호동천의 영기가 담긴 바람을 느끼며 대답했다.

“도사연입니다. 그녀는 외부에서 많은 사달을 일으켰는데, 삼강오륜을 어지럽히고 수많은 살생을 저질렀으며, 요마들이 모인 천계맹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천우주를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그녀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사도(邪道)를 닦는 이들이 그녀를 따라 천우주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러자 도일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멀리 시선을 돌리며 ‘도사연이 또 그리 많은 사달을 냈군…….’하고 생각했다.

“하하, 알고 보니 계 선생님께서는 죄를 물으러 오신 것이었군요. 하지만 저도 도사연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딱히 그녀에게 관심도 없고 말입니다. 옥호동천의 여우들은 어느 한 여우가 이끄는 게 아니어서요. 일단은 제 누추한 거처로 모실 테니, 그곳에서 쉬시는 동안 제가 도사연과 잘 아는 도우들께 소식을 전해, 계 선생님과 명왕 존자(*尊者: 학문과 덕행이 높은 부처의 제자를 일컫는 말)께 꼭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불인명왕이 두 눈을 번쩍 떴고, 그의 눈 깊은 곳에서 불법의 기운이 반짝 빛났다.

“선재, 정말로 그 답을 내어줄 수 있겠소?”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말했다.

“대사, 일단은 도우의 말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동천 안의 여우족들이 어찌 대답하는지 들어보지요.”

세 사람은 저마다 말에 가시를 숨기고 있었지만 아직은 누구도 예의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내 계연과 불인명왕은 도일을 따라 수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실 계연은 옥호동천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해서 <운중유몽>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보아하니 옥호동천의 여우들은 <운중유몽>이 귀중한 천서(天書)이며, 글자들에 심오한 도와 힘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보았는지 그 책에 뭔가 술법을 부린 모양이었다. 계연이 느끼는 천서의 감응이 약간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상대방이 천서를 통해 그 속의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면, 계연의 천서에 대한 감응을 끊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계연이 남긴 주석은 중평휴의 필적과 정취를 모방한 것이라, 이미 천서와 한 몸이 된 후였다. 그러니 실은 주석이라기보다도, 원문의 보충이라 할 수 있었고, 이는 천서를 완성 시키는 일부이기도 했다. 계연이 남긴 주석은 다른 이가 남긴 거라는 걸 알아보기가 어려웠으므로 그 천서를 계연과 연결 짓기는 더욱 불가능했다.

수각 바깥에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탁자가 있었는데, 도일은 두 사람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더니 직접 차를 우려 두 사람을 접대했다.

차가 다 우러나자 마치 수많은 꽃이 피어난 것처럼 차향이 골짜기에 그윽하게 퍼졌다. 차 맛은 달고 마신 후에는 입안에 향이 남아 계연과 불인명왕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차 맛이 아주 좋네요!”

“선재, 정말 좋은 차로군!”

도일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라 살짝 맛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차를 다 마시면 곧 소식이 올 겁니다.”

사실 도일이 말을 하기도 전에, 계연과 불인명왕이 처음 차를 마시는 순간부터 산골짜기 외곽의 하늘에서는 흐르는 빛 몇 갈래가 날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수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빛이 흐르듯이 떨어지더니 그 속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계연과 불인명왕의 시선은 주로 중년의 미부인과 양강(*陽剛: 남자의 강건한 기질)의 기운이 부족한 듯 수려하기 짝이 없는 외모의 젊은이에게 향했다. 그 외에도 여러 여우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도일에게 소식을 전한 ‘사사’라는 여우도 있었다. 그녀가 바로 호래가 큰할머니라 부르는 여우였다.

계연은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고 불인명왕은 눈꺼풀을 내리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찾아온 즉시 구미호를 세 마리나 만나다니, 대체 이 안에 몇이나 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도사연도 비록 수단을 좀 부리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구미호라고 쳐줄 수 있는 존재였다.

“두 분이 바로 계 선생님과 불인 명왕 존자이시군요. 천첩 도동(涂彤)이 두 분께 인사 올립니다!”

“하하하, 소인 도막(涂邈)이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두 분께서 저희 옥호동천에 와주셨는데 미리 나가 맞이하지 못해 실례가 많았습니다. 만약 도일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희도 두 분께서 동천에 오신 걸 모를 뻔했습니다!”

그러자 계연과 불인명왕도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인사했다. 도일은 미적지근한 태도로 둘을 향해 빈자리를 가리키며 “앉게.”하고 말했다.

물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것은 계연과 불인명왕, 세 구미호를 포함한 다섯 명뿐이었다. 다른 여우들은 모두 서 있어야 했다.

게다가 계연과 불인명왕이 찾아온 것이 동천 안에 퍼진 듯, 수각 주위의 여우들을 제외하고도 골짜기 변두리에도 속속 여우들의 요기(妖氣)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꽤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은밀히 행동하려는 듯이 보였으나, 그 호기심 어린 시선과 몸에서 내뿜는 요기는 계연의 법안과 민감한 후각을 피해갈 수 없었다.

계연은 곧이어 도운의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전보다 훨씬 약해지긴 했지만, 혼비백산한 그녀가 도일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도 어찌 보면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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