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49화 (849/892)

849화. 술을 마시며 검을 논하다 (2)

한편, 도막은 둔술을 펼쳐 날다가 도일의 수각이 있는 골짜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연에게서 풍겼던 선술의 기운과 불인명왕에게서 흘러나왔던 불법의 기운은 일찍이 거둬진 상태였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잘 보였다. 수각에는 자신 대신 도동이 있고 오늘 도일도 나름대로 그들을 돕고 있으니, 저 두 손님을 단단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도막은 먼저 술을 가지러 돌아갔다가 다시 멀리 둔술을 펼쳐 날아가더니, 설치된 진법을 통해 어느 삼림 중앙의 공터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전부 나무로 지어져 평범한 농가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건물 내부는 전부 나무 바닥으로 되어있었고 의자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아리따운 여인 둘이 낮은 탁자 앞에 앉아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도사연이었다. 그녀는 반쯤 흘러내린 옷자락을 정리하지도 않고 탁자에 기대어 늘어진 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도사연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바로 계연도 잘 아는, 예전에 호운에게 악몽을 가져다주었던 그 여우였다.

“흥, 여기는 아주 한가해 보이네!”

도막이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안으로 들어와 바둑판과 그 곁의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도사연의 살짝 드러난 상반신에 잠시 머물렀다.

“그럼 뭐 어쩌겠어, 내가 가서 그자를 만나기라도 할까?”

도사연이 이렇게 대꾸한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도막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순순히 떠날 것 같아?”

두 사람은 모두 계연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고, 계 선생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이는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싫을 정도로 계연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저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도사연은 지금 동천 안에 없다고 했어. 그러니 뭐 어쩌겠어? 믿든 말든 그쪽 사정이지!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떠날 때 들으니 도일과 술을 마시며 검을 논한다던데.”

“검을 논한다고!”

그러자 도사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적어놔. 나도 보고 싶으니까.”

도사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인도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검을 논한다는 핑계로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보도록 해.”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도막은 곧 몸을 돌려 떠나갔다.

* * *

잠시 후, 도막이 내뿜는 둔광이 도일의 거처 뜰에 내려섰다. 그는 탁자 앞에 앉은 이들을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계 선생님, 미주를 갖고 왔습니다!”

도막이 소매를 한번 휘두르자, 술이 담긴 단지와 주전자 등이 차례로 탁자 근처의 풀밭 위에 나타났다. 그가 가져온 수량은 족히 언덕을 이룰 정도였다.

술을 마시며 검을 논하겠다고 한 것은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연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민감한 후각을 이용해 술병이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도막이 선뜻 물러나더니 계연이 원하는 대로 고르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계연은 후각을 이용해 가장 뛰어난 선양(*仙釀: 선인이나 선문에서 빚은 술) 한 단지를 고른 뒤, 입구를 봉인한 봉니를 떼어낸 뒤 곧장 술을 맛보았다.

“좋은 술이군요! 도일 도우, 예전에는 간단히 검을 한 번 겨뤘을 뿐이니, 오늘 좋은 기회가 생긴 참에 계모(某)가 손가락으로 검을 대신하여 도우와 심도 있는 논의를 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계연은 여느 때의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를 벗어던진 듯 보였다. 그러자 도일도 눈을 반짝 빛내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좋습니다, 계 선생님의 제안을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공격하겠습니다!”

휘익-!

도일을 가볍게 뛰어올라 손으로 검지(*劍指: 검지와 중지를 모아 곧게 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접은 모양으로, 무술에서 검을 대신하는 모양)를 취한 다음, 흰 무지개처럼 계연을 향해 날아갔다. 계연도 마찬가지로 검지를 뻗어 그를 상대했다. 양측의 손가락이 부딪친 순간, 날카로운 검의(劍意)가 솟구치더니 어마어마한 검기가 폭발하며 골짜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골짜기 곳곳에 숨어있던 여우들은 그 순간 장검이 몸을 꿰뚫는 듯 느껴져 화들짝 놀라 땅에 쓰러졌다. 도운처럼 도행이 높은 이들은 두피가 저릿해지거나 온몸에 닭살이 돋았지만, 눈도 돌리지 않고 수각 앞의 공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두 고인(高人)이 검을 논하니, 비록 검지를 이용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절세의 검 두 자루가 서로 맞서 싸우는 듯했다. 그 모습은 때로는 광풍과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나비 두 마리가 가만가만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움직임 속에는 보는 이를 질식하게 할 정도의 날카로움이 감춰져 있었다.

“선재,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신묘한 검술 중에 이것이 제일이로군!”

불인명왕은 검을 쓰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나는 논검(論劍)은 이미 일종의 ‘도’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무슨 병기를 쓰든, 혹은 병기를 아예 쓰지 않든 논검을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는 절로 현묘함이 생겨났다.

이는 도동과 도막도 마찬가지여서, 이들은 잠시 잠깐도 계연과 도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둘의 검술은 생사를 건 대결보다 더욱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살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세상을 궤멸할 듯한 위력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논(論)’이라는 말에 완벽히 부합하는 대결이었다. 둘은 손가락으로 검을 논했고, 검으로 도(道)를 논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도일 도우의 검술은 과연 예상대로 뛰어나군요.”

계연은 한 손으로 도일을 상대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다 마신 술 단지를 휙 던져버리고는 다시 새 술을 집어 들었다. 반면 도일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의 눈빛에서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투지가 엿보였다.

이 논검은 지켜보는 이들이 충분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신묘했으므로, 골짜기를 둘러싼 여우들은 두 눈이 찌를 듯 아파도 법력을 써서라도 자리에 남아있으려 했다.

검기의 날카로움은 이곳까지 침투해오지 않더라도, 검의가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강했다. 이에 어떤 여우들은 두 눈에서 피를 흘리기도 했는데,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적당한 거리까지 물러나 자신의 기운을 다스려야 했다. 남은 여우 중에는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며 하나하나 잊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거나, 지필을 꺼내 속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반작용이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욱 고통이 느껴지거나 조금 전에 본 걸 까맣게 잊기까지 했다.

도일은 어떻게든 계연을 이기고 싶어 했고, 반면에 계연은 전혀 승패에 집착하지 않았다. 계연은 왼손으로 검지를 휘두르고 오른손으로 술병을 들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양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고 술도 거침없이 마셨다. 그는 뱃속이 무저갱(*無底坑: 바닥이 없는 구덩이)이기라도 한 것처럼, 술 한 단지를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게다가 세 구미호와 불인명왕 모두 계연이 술기운을 흩트리려고 법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그는 약간의 취기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 넘게 논검이 이어지는 동안 술 수십 단지가 동났고, 마침내 계연의 볼이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계 선생님, 이렇게 마시다간 검이 불안정해질 텐데요. 계속 논검을 이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도일은 계연이 자신을 얕보고 있다고 느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하, 도일 도우, 논검은 검으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술을 마시는 건 예외지만요.”

도일은 계연의 태연한 웃음에 화가 치밀었는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검의도 전보다 3할은 더 강력해졌다.

“마침 잘됐군요!”

술을 마셔서인지 계연은 전보다 훨씬 방종한 태도로 크게 웃으며 검지를 뻗어 그를 상대했다. 검을 움직이는 속도와 검의가 도일과 비교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이에 양측의 검법은 여전히 막상막하인 상태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도일은 속으로 깜짝 놀라서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얼른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고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계연의 검법은 점점 규칙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검의는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계연은 바짝 따라붙어 상대를 향해 찌르고, 손가락이 교차하면 검을 거두고 다시 공격했다.

* * *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도일은 모든 심신(心神)을 쏟아부어 계연의 검술을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더는 계연의 다음 수나 다다음 수를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연의 검술에 일어나는 변화는 그의 마음에 따라 바뀌었으므로 눈앞의 변화를 잘 보고 그때그때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가 느끼는 압박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설마 이렇게 지게 되는 건가!’

그 순간, 도일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그 약간의 동요는 계연의 변화무쌍한 검술을 상대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도동과 도막, 불인명왕은 이미 승패가 갈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편 골짜기 주위에는 여우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저 선인의 검술이 기상 변화처럼 짐작하기가 어렵고, 도일 조사(祖師)의 검은 이제 선인의 검술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아무래도 조사께서 질 것 같아…….’

도운은 산봉우리에 꿋꿋이 버티고 앉아 두 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부릅뜬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이 담겨있었다.

사흘간의 논검은 사흘간의 음주이기도 했다. 계연의 검법은 지켜보는 이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계연의 얼굴은 온통 달아올라 있었고 계연은 때로 딸꾹질을 하기까지 했다.

“꺼억! 하하하하, 통쾌하구나, 통쾌해…….”

계연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고, 연속으로 백 초식이나 공격을 쏟아부으며 도일을 연이어 물러나도록 했다.

그 순간, 계연이 두 눈을 살짝 감고 몸을 회전하자 주위 풀밭의 낙엽과 가지들이 모두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다시 술을 한입 머금은 뒤, 몸을 측면으로 돌리고 선 채 오른손으로 검지를 뻗어 전방으로 일검(一劍)을 날렸다. 그러자 주위의 낙엽이 회오리치더니, 검의를 따라 용으로 변해 도일을 향해 날아갔다.

막 백번이 넘는 초식을 연속으로 막아냈던 도일은 이 일검을 막아낼 수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사흘간 억누르고 있던 법력이 움직이기까지 했다. 비록 검지에서 법력이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온몸에 가득히 흐르는 상태였다.

법력이 발산되는 순간, 도일이 규칙을 어겼음을 깨닫고 공황에 빠진 찰나, 검의로 이루어진 용이 돌연 흩어져 버렸다.

용을 이루던 낙엽들은 공중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도일이 멍하니 2장(약 6m) 밖 거리의 계연을 바라보니, 그는 술병을 든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좋은 술이군……. 좋은 대결이야…….”

그러더니 계연이 풀썩 땅으로 쓰러져버렸다.

“계 선생님!”

도일은 즉시 계연에게 다가갔지만, 그가 고른 호흡을 내쉬고 있고 안색도 평온한 것을 보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연은 그저 술에 취해 잠이 든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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