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화. 사맹(邪盟)의 붕괴 (1)
계연과 불인명왕은 구름을 타고 청창산을 떠났다. 구름 위 계연의 옷자락과 불인명왕의 승복이 바람에 맞아 펄럭였다.
이때가 되자 불인명왕도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계 선생님, 대체 어떻게 저희 모두를 속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도사연을 죽일 수 있었던 겁니까?”
“예? 대사, 저는 감쪽같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알아차리신 거죠?”
계연이 일부러 과장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자 불인명왕이 피식 웃었다.
“선재, 농이 심하십니다, 계 선생님. 저는 물론이고 구미호들도 일찍이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음기를 거두더니,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보이는 청창산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자기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인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저는 술에 취해 꿈속에서 도사연을 벤 것뿐이에요.”
“정말로 꿈에서 하신 일이었다고요!”
불인명왕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치더니, 다시 두 눈을 내리뜨고 합장했다.
“선재! 이 세상의 법(法)은 무궁무진하고 도(道)는 변화무쌍하다더니, 선생님의 법력은 정말이지 심오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대사!”
그 누가 자신을 찬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겠는가? 게다가 계연은 꿈속에서 도사연을 베어버린 일로 꽤 득의양양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흡족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도사연이 죽었으니 ‘추일’이란 바둑돌도 완전히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배후의 상대도 이번 탐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 * *
그리고 계연이 예상한 대로, 도사연이 죽던 바로 그 순간, 어딘지 모를 곳의 또 다른 바둑돌을 쥔 자가 화들짝 놀랐다.
“음?”
그의 기척에 옆에 있던 이도 놀라 의혹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추일이 죽었다.”
“정말? 옥호동천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 아니었나? 대체 어쩌다 죽은 거지?”
“바로 그 옥호동천 안에서 죽은 거야…….”
그의 허상이 허공과 안개를 꿰뚫고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저토록 대단한 수선자가 탄생했다니!”
중생을 바둑돌로 삼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자신은 이미 모든 중생을 압도하는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최소한 바둑돌은 쥔 자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일개 수선자에게 ‘저토록 대단한’이란 표현을 쓰는 건 아주 희귀한 일이었다.
“어떻게 대단한데?”
옆에 있던 이의 목소리는 아주 지척에서 들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바둑돌을 쥔 자는 손바닥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가루를 보며, 바둑돌과의 연결이 순식간에 옅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바둑돌에서 느낀 마지막 인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옥호동천에서 거의 장난에 가까운 방식으로 도사연을 죽일 정도이니, 어쩌면 그 선인은 이미 어떤 모호한 한계를 느꼈을지도 몰라…….”
그러자 상대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들려오지 않았다. 바둑돌을 하나 잃은 이도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 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이젠 정말로 때가 됐어.”
“맞아. 몇 없긴 하지만, 저런 선인이 세상에 나왔다는 자체가 또 하나의 증거야!”
“일리 있는 말이군!”
바둑돌은 잃었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게다가 의외의 기쁨도 있었다.
* * *
계연은 도사연의 죽음이 배후에 있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주목하게끔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마음을 먹기 전에 생각했던 자신의 한 수였다. 너무 많은 바둑돌의 힘을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주동적으로 대국에 들어선 것이다.
비록 ‘제삼자가 사물을 냉정히 볼 수 있다’라는 말도 있지만, 어떤 일은 몸소 나서야 하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자신은 바둑돌을 쥔 방관자인 동시에, 이제는 대국에 뛰어들어 국면을 어지럽힌 자인 셈이었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이 바둑돌을 쥐고 있다는 걸 모르니 너무 움츠릴 필요는 없었다.
계연은 그저 높은 도행을 지닌 일개 수선자일 뿐이었다. 소속된 문파도 없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무슨 일을 할 때도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다. 계연은 오지랖이 넓었지만, 때로 아무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계연은 선도(仙道)를 닦았지만 요마며 정괴와의 접촉에도 열린 태도를 보여, 도법자연(*道法自然: 자연을 따르는 것이 도라는 뜻으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을 추구했다.
계연은 주동적으로 천지와 교감을 나누며 더욱 많은 도리를 깨우칠 수 있었다. 계연은 천지와 중생을 보호하겠다는 큰 뜻을 지니고 있었지만, 상대는 계연과는 정반대였다.
천지는 어질지 않지만 영(靈)을 지녔기에, 설령 계연이 상대와 마주치더라도 그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계연이 본인을 상대의 입장에 대입해보면, 수많은 중생 중 자신 같은 수선자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자신과 접촉하고 싶어 할 것 같았다. 비록 직접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계연은 상대가 그렇게 했으면 하고 바랐다.
‘만약 그들이 하려는 것이 내 예상과 같다면…….’
계연은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천지만은 아니었다. 이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저들을 미쳤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연이 저들을 이해한다 해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계 선생님. 도사연도 이미 처리했으니, 저와 함께 돌아가 경문을 들으며 불리(佛理)에 대해 논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불인명왕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계연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대사의 호의는 마음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편히 앉아 경문을 들을 때가 아니라서요. 도사연이 죽었으니 천우주의 국면에도 점점 변화가 생길 겁니다. 흑황의 요왕들은 그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납치해갔는데, 이제 도사연이라는 연결이 끊겼으니 요마들은 더욱 그간 모은 ‘재산’들을 알뜰히 가져가려 하겠지요…….”
불인명왕은 계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재차 붙잡지 않았다.
“선재로다. 계 선생님께서는 정말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계십니다. 그럼 어서 가보십시오. 옥호동천에는 이 노승이 더욱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불인명왕을 향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대사. 앞으로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질 터이니, 대사께서도 조심하세요!”
천하의 정도(正道)는 명의상으로는 모두 같은 세력이었으나, 그래도 지역 구분이 있었다. 천우주의 혼란은 일단 천우주 수선자들의 문제였으므로, 불문의 명왕인 불인 대사가 간다면 비록 막지는 않겠지만, 다른 종파에서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현재 상황은 더욱 안정되고 있으니 괜히 그가 가서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계연이 인사한 뒤 막 떠나려는 찰나, 불인명왕이 돌연 웃으며 물었다.
“계 선생님, 도막이라는 구미호가 쓴 <검서(劍書)>가 어땠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옥호동천에서 말했다시피, 그림도 잘 그렸고 글씨도 보기 좋더군요.”
불인명왕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주 대량사 도장(道場)에는 제 화신이 있고, 저는 선생님께서 뛰어난 실력을 지니셨다는 것도 압니다. 옥호동천에서의 논검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제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어쨌든 이 노승은 논검을 직접 봤으니, 그게 책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요. 하지만 앞으로 백 년, 천 년이 지난 후에 세상 사람들이 도막이 쓴 <검서>가 그 당시 논검의 광경을 담았다고 여긴다면 조금 아쉬울 듯합니다.”
계연은 불인명왕이 그때의 논검에 대해 이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계연은 사실 도막의 기록이 그때의 논검을 욕되게 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네. 이왕 대사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한가한 시간에 그때의 논검에 대해 한번 적어보도록 하지요. 그럼…….”
계연은 돌연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그것도 <검서>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불인명왕이 웃으며 다시 한번 합장했다.
“선재!”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을 나누었고, 이내 빛들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불인명왕은 불국(佛國)으로 돌아갔고, 계연은 동남쪽으로 날며 점점 바람이 거세게 부는 대기층으로 고도를 높였다.
* * *
계연이 꿈속에서 도사연을 죽인 순간, 천우주 어느 곳 지맥과 가까운 땅굴에서는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요마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이 땅굴 안에는 탁자와 의자가 여럿 놓여있었고 흐르는 샘물에도 땅의 기운(地氣)이 충만했는데, 겹겹의 금제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이에 그들의 어마어마한 기운은 조금도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다. 그들이 자리한 곳은 어느 토지신의 관저였는데 토지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한 무리인 건지 아니면 일찍이 해를 입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탁을 둘러싸고 앉은 요왕과 대마(大魔)들을 제외하면, 그 외곽에는 왕유홍이나 시구 같은 천계맹의 중요한 일원들이 여럿 서 있었다. 한편, 다른 이들에 비해 확연히 수행이 뒤떨어지는 북목은 원탁 앞에 앉아있었다.
이때, 이들은 마침 어떤 일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주 부인은 찾았나?”
일전에 모였던 성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요마들은 모두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자연히 먼저 도망친 주 부인을 찾으려 했다.
“아직일세, 어디에서도 주 부인의 종적을 찾지 못한 상태야. 현재 천우주의 천기(天機)가 우리와 정도의 수행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워진 상황이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점칠 수가 없네.”
“만약 주 부인이 죽었다면, 그건 누군가 배신을 했다는 소리야. 만약 죽지 않았다면…… 그럼 대체 왜 우리를 피해 숨어있는 거지? 자네들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
어느 날카로운 목소리를 지닌 남자가 의혹 어린 얼굴로 추측을 늘어놓더니, 왕유홍과 시구를 향해 물었다.
왕유홍은 속으로 살짝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조금의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 성에 갔을 때 만난 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주 부인은 방해받는 걸 싫어해서, 저희도 감히 자주 찾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음 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고, 성안에 있던 이들 모두 경악하여 그녀의 뒤를 따랐지요. 그렇게 천 리 정도 도망친 후에야 도망친 동료들이 몇 없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감히 돌아가서 조사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탁자에 나른히 기대앉은 요염한 자태의 여인에게 물었다.
“도사연, 자네 생각에는 주 부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나?”
“흐음, 별로 관심은 없네요. 지금 내가 바둑을 두고 있어서요. 그러니 다들 속이든 무슨 수를 쓰든 천우주로 수하들을 좀 빨리 데려오도록 하세요. 아직 소란이 충분치 않으니…….”
“흥! 자신의 진짜 몸은 옥호동천에 숨긴 채 분신으로 나타나서는 이래라저래라하면서, 우리에게는 목숨을 걸라고? 난 이미 거느리던 요괴군을 적잖게 잃었네!”
도사연은 여전히 나른한 자태로 상대를 보더니 교태롭게 웃었다.
“내가 구미호의 몸으로써 채보(*采補: 도교에서 타인의 정혈(精血)을 취하여 자신을 보신하는 것)하게 해 주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나요?”
“물론 맛이 좋긴 했지. 하지만 자네는 이제 구미호가 아니지 않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웃던 도사연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그녀의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공포가 온몸을 뒤덮었다.
그 순간 귓가에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일검을 네게 날려주마…….”
그 순간, 엄청난 한기가 온몸을 휩쓸더니 한순간에 의식이 끊어지고 그녀의 요기(妖氣)가 흩어졌다.
주위에 있던 요마들 모두 당연히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도사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조금 전에 코웃음을 친 요왕이 도사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분신이 흩어졌어?”
“아니, 이건…… 본래의 몸에 문제가 생긴 거야. 도사연은 죽었어!”
“뭐라고?”
“어찌 그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