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58화 (858/892)

858화. 한발 먼저 잠입하다

건원종의 결정권은 도원자에게 있었으므로 계연도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도원자는 건원종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선도 세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도원자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 종파에 통지는 하겠지만 오고 말고는 전부 그들에게 달렸습니다. 하지만 저희 건원종은 흑황으로 가서 백성들을 구하는 데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다만 천우주의 형세가 아직 안정적이지 못해, 저희가 모든 힘을 쏟을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명확한 목표 없이 곧장 흑황에 쳐들어가면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을 터인데, 혹시 계 선생님께 무슨 계책이 있으신지요?”

계연도 이미 그 점에 대해 진작 생각해둔 참이었다.

“계모가 일전에 손을 써둔 덕분에 몇몇 요마들을 유용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들을 시켜 흑황 어디에 인축국이 있는지 직접 조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긴박하니, 천우주의 정도 세력이 모이는 집회에는 참여할 수 없겠네요.”

“계 선생님께서 직접 가시려고요? 흑황에 먼저 잠입하시려는 겁니까?”

도원자가 묻자 계연은 대충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문제 될 건 없겠군요. 선생님의 실력이라면 무슨 변수가 생겨도 능히 대응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설령 몸을 빼야 할 지경이 되더라도 선생님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없겠지요.”

그러자 노염생이 다리를 탁 내리치며 말했다.

“그럼 질질 끌지 마시고, 사형, 어서 천우주 수행자들을 소집해 바다 건너 치를 결전에 대해 상의합시다! 저 이매망량 놈들이 감히 천우주의 기운을 어지럽혔으니, 우리도 그들에게 쓴맛을 보여줘야 하오!”

“알겠다. 계 선생님, 혹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너무 많은 이가 참여하는 것보다는, 실력이 뛰어난 소수를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발각될 수도 있고…….”

계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노염생이 곧장 그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제가 계 선생님과 함께 가는 게 좋겠습니다. 사형은 어서 다른 종파에 알리기나 하시오. 우리 둘이 요마들의 소굴을 소탕할 때 시간 맞춰 나타나려면 말이오.”

원래 계연은 혼자 가려고 했으나, 노염생이 같이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도원자도 자기 사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럼 계 선생님, 사제 너도, 부디 조심하십시오.”

계연과 노염생은 건원종 고인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한발 먼저 법산을 떠났다. 뒤이어 수많은 갈래의 검광(劍光)과 둔광이 법산을 빠져나가 여러 종파를 소집하기 위해 천우주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 * *

노염생과 계연과 함께 흑황으로 향하는 길에 두 제자를 데려갈 순 없었으므로, 두 사람이 건원종 법산을 떠나자마자 계연은 계속해서 법력을 펼쳐 속도를 높였다.

“계 선생님, 이미 흑황에 어떻게 잠입할지 생각해놓으신 거 압니다. 이젠 말해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노염생을 힐끗 보더니, 저 멀리 우패천이 지키고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도(邪道)를 닦는 요마들은 그간 천우주에 수많은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놓았어요. 대부분 훼손됐지만 제가 그중 비교적 은밀하게 숨겨진 통로를 하나 알고 있어요. 곧 요물들이 배에 인간들을 싣고 올 테니, 그걸 이용하면 문제없이 흑황에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랬군요. 그럼 선생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계연은 당연히 노염생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패천과 시구 등에 관한 일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후에 노염생이 실수로라도 그들을 공격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흑황에 공격을 가하기 전에 그들은 먼저 떠날 계획이었다.

사실 계연은 흑황을 아예 뒤집어엎자고 말했지만, 건원종 측의 반응으로 볼 때 설령 천우주 정도 세력의 힘이 아주 강하더라도 흑황 전체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연의 주된 목적 두 가지를 달성하기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는 천우주의 백성들을 구출하고 최대한 많은 인축국을 소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계맹에 속하거나 천계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요마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번은 천계맹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이니만큼, 최소한 핵심 인물만큼은 확실히 제거해야 했다.

* * *

사흘 뒤, 우패천이 지키고 있는 땅굴의 진법 외곽에 요기가 어린 희미한 구름 한 점이 천천히 날아왔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운 하늘은 구름을 그리 눈에 띄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자 당의(*躺椅: 누워 쉴 수 있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발을 흔들던 우패천이 벌떡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석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계 선생님, 노 선장(仙長)님, 왔습니다!”

계연과 노염생은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우패천의 목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고는 천천히 석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들은 어느새 꽃과 옥처럼 아리따운 낭자들로 변해 있었는데, 바로 우패천이 육 산군에게 안전한 곳에 데려다 달라 부탁했던 그 여인들의 모습이었다.

계연과 노염생은 일반적인 수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변신한 모습은 그야말로 도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완벽했다. 이에 우패천은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두 사람을 보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뜰 정도였다.

환술을 쓴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의 묘사만 듣고 만들어 낸 모습인데도 며칠 전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 거의 같았다. 겉모습만으로는 그들이 그때 그 낭자들이 아니라는 걸 전혀 알아낼 수 없었고, 기운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분, 낭, 낭자…….”

그러자 흰옷을 입은 여인이 우패천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정체가 탄로 나지 않게 알아서 조심하세요.”

그러자 우패천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곧 마음을 평온히 가라앉혔다. 곧이어 구름이 다가오자 구름 위의 요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우패천이 잽싸게 진법을 열어주었다.

“하하하하, 고맙소, 우 형제!”

요괴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지난번 그자였다. 이에 우패천도 목청 높여 대답했다.

“그리 예의 차리지 말게나. 마(馬)형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이 진법은 곧 봉쇄하겠네.”

“그렇네, 더 오래 있다간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천우주에서 죽을 생각이 없거든.”

구름이 천천히 내려오자 그 위로 거대한 나무배 여러 척이 보였다. 배 위는 겁에 질리거나 절망에 찬 표정을 한 백성들로 가득했고 그중 누구도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형,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얼른 입구만 닫고 가겠소.”

“알겠네, 내게는 진기(*陣旗: 진법의 주요 위치마다 꽂힌 깃발)가 없으니 도울 수 없겠군.”

“하하하……. 잠시만 기다리시게.”

우패천은 진기를 들고 언뜻 보면 거칠어 보일 정도로 요법(妖法)을 마구 펼쳤지만, 진법을 통제하는 데는 아주 정확했다. 곧이어 우패천의 말처럼 얼마 걸리지 않아 진법이 봉쇄되었고 땅굴 위쪽이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법술로 인한 빛이 반짝이며 거대한 암석이 천천히 땅굴의 상공을 뒤덮자, 외부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땅굴 내부가 완전한 암흑이 되자, 배 옆에 서 있던 요괴들의 두 눈이 오싹한 빛을 내뿜었고, 이에 배 위에 있던 백성들 사이에 한 차례 동요가 일었다.

우패천의 곁에 서 있던 두 ‘낭자’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뒤로 몸을 숨겼다.

“우 형제, 어서 타게나.”

“알겠소!”

우패천이 바람을 일으키더니 두 여인을 데리고 말요괴가 있는 커다란 배 위로 날아가 안착했다.

말요괴는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두 여인을 살펴보았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니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겁내기는, 너희들이 시중만 잘 들면 누구도 너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 마형, 인축국에는 미인이 많소?”

그러자 말요괴가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모두 살이 야들야들한 것들이오!”

요운(妖雲)에 휩싸인 배들이 다시 움직이더니 곧 땅굴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래로 약 백 장(丈) 넘게 내려가자, 우패천이 후방을 향해 다시 진기(陣旗)를 휘둘렀다. 그러자 땅굴 위로 돌과 흙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주위 식물들의 뿌리가 늘어나면서 땅굴의 존재를 완전히 은폐해버렸다.

배 위의 평범한 사람 가운데 많은 이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몰래 숨죽여 울고 있었고, 요괴들은 그들과 달리 가벼운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무사히 땅굴에 들어온 후로는 완전히 긴장을 내려놓은 듯했다.

요운이 받치고 있는 누선(樓船)들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다 마침내 지하의 텅 빈 공간에 이르렀다. 그곳에 흐르는 강줄기 위로 배를 대자, 나는 것보다 더욱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계연과 노염생은 곧 지하에 흐르는 물길에 시선을 빼앗겼다. 요괴들은 요법(妖法)을 이용해 배를 움직였는데, 물속에 은은한 빛이 흐르는 것이 마치 작은 파도가 배를 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수령(*水靈: 물의 정수) 말고도 짙은 땅의 힘이 감돌았다. 계연과 노염생은 이를 통해 산과 물의 신령들이 자신이 담당하는 곳을 돌아다닐 때의 감각이 어떤지 체험해볼 수 있었다.

이 접인 진법만 봐도 천계맹 혹은 흑황의 요마들을 결코 낮잡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진법을 만들어낸 인물은 선도(仙道)에서도 고인에 속할 것이다.

“으흐흑…… 흑흑…….”

계연이 타고 있는 커다란 배 위에는 한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진즉 말라 버린 듯했다.

“울지 마라! 계속 울면 너부터 먹어버리겠다!”

한 요괴가 험악한 얼굴로 이렇게 소리치더니, 기다란 혀를 내밀고 입술을 핥았다. 그는 아주 부드러울 게 분명한 이 아이를 내심 먹어 치우고 싶었지만, 겁을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는 겁에 질려 울음을 참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목이 막혀 끅끅댔고, 이에 옆에 있던 한 노부인이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아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얘야, 울지 마라, 울지 마…….”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장면을 보던 계연과 노염생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들은 잡혀 온 이들의 괴로움을 이해했으나, 지금 당장은 구출해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주위 요괴들을 관찰해본 결과, 대부분은 사사로이 백성들을 잡아먹을 수가 없는 게 분명했다.

선상의 백성들은 꽃과 옥처럼 아리따운 두 낭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습이 단정했고 옷도 깨끗했는데, 요괴의 등 뒤에 숨어 그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눈에는 적대시하는 눈빛과 여러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진법을 빌려 이동한 덕분에 그들은 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지하를 얼마간 이동한 결과, 어느 해저의 골짜기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곧장 수면 위를 향해 배를 몰더니 어느 섬에 정박했다.

만약 요괴들에게 붙잡힌 것만 아니라면, 배 위의 사람들은 지하에 흐르는 강줄기와 해저를 통과하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점점 더 고향과 멀어진다는 것이 실감 날 뿐이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점점 줄어들었다.

섬 위에는 여전히 사람의 기운이 남아있었고, 누군가 머물다간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아마 이들이 중간 거점으로 삼는 섬인 듯했다.

“하하하,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오. 지맥이 이토록 먼 곳까지 이어져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지 않소? 내가 아는 수많은 비밀 통로 중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오. 남쪽으로 향한 지 2주도 되지 않아 영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엄청난 시간을 아꼈소!”

그러자 우패천도 긴장이 풀린 듯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저번에 잡은 이들은? 모두 옮겼소?”

“하하하, 당연히 먼저 운반해야지. 오고 가는데 적잖은 시일이 소요되는데, 어찌 그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제는 더 신경 쓸 것 없이 곧바로 영주로 향하면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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