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화. 인도(人道)의 기운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는 그들의 대화에 적절하게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다.
“무성 대인, 대인과 연 대협, 육 대협께서 죽인 그 요괴는 수행이 최소 수백 년에서 천년은 되는 대요(大妖)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무척 대단한 요괴인 셈이지요. 그런데 대인의 편장에 맞아 머리통이 폭발했고, 다른 고만고만한 놈들은 전부 핏빛 안개가 되어 사라져버렸습니다! 정말이지…….”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들끓더군요. 무성 대인께서 그 대요를 때려죽이시고 그 밑의 수하들도 전부 죽여버려서 안타깝지 뭡니까. 안 그랬으면 저희 모두 그놈들을 죽을 때까지 패줬을 텐데요!”
구레나룻 사내는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다는 듯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심지어 그의 진기가 정말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의 말에 밖에서도 떠들썩한 목소리로 찬동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그 요괴들과 제대로 한판 붙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무성 대인의 위무(*威武: 위세와 무력)는 과연 남다르십니다!”
“저희도 무공을 닦는 이들이니 마땅히 요괴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도 무성 대인과 함께 저 요괴들을 몰아내겠습니다!”
“무성 대인을 따르고 싶습니다!”
…….
“조용! 모두 조용히 하게나!”
바깥의 소란이 점점 커지자 결국 나이 든 의원이 밖으로 나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잠잠해졌다.
좌무극은 여전히 정신이 멍한 상태였으므로 구레나룻 사내와 또 다른 의원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과 저 사람들이 일컫는 ‘무성’이 저인가요?”
“그렇습니다! 무성 대인께서는 천하에 그 무공을 대적할 자가 없을뿐더러 장대 하나로 대요를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대단한 요괴 놈들에게 우리 인간들 대신 성현의 가르침을 내려주신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연 대협께서도 스스로가 이제 더는 대인께 비기지 못한다고 하셨을 정도니, 대인께서 무성이 아니면 누가 감히 그런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
“아뇨, 제 말은…….”
좌무극은 그 이름이 무척 위풍당당하다고 느꼈지만, 그렇게 불리기에는 너무 황송했다. 이에 막 입을 뗀 순간, 바깥에서 연비와 육승풍의 목소리가 들려와 그의 말을 끊었다.
“무극아!”
“무극이가 깼구나!”
연비와 육승풍은 당시 정말로 상황이 위급했었는데, 의원이 진료해본 결과 강력한 생기가 그들의 요혈(*要穴: 주요 혈자리)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이에 의원은 그들의 진기가 참으로 두텁고 왕성하다며 감탄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안색이 조금 창백하고 다리를 절뚝이긴 했으나, 그래도 부축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큰 사부, 넷째 사부!”
좌무극이 감격한 얼굴로 다급히 침상에서 내려서자 곁에 있던 구레나룻 사내가 얼른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좌무극이 가볍게 그의 손을 피했다. 좌무극은 자신의 몸이 아직 허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축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몸 안에서 불덩이처럼 뜨끈한 감각이 느껴져 계속해서 힘이 솟고 있었다.
“사부님들께서 무탈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하하하, 우리는 괜찮다. 무극아, 진기를 한번 살펴보거라. 무슨 변화가 없느냐?”
연비의 말에 좌무극이 정신을 몸 안으로 집중하자 정말로 불처럼 뜨끈한 감각이 훨씬 강렬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진기마저 전과 차이가 있었는데, 마치 펄펄 끓는 물이 몸속에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이에 그가 점점 정신을 집중하자 갖가지 특이한 감각이 연달아 느껴졌다.
가장 먼저 오감과 직감이 더욱 예민해졌는지, 아주 미세한 바람의 변화와 여러 특이한 기운들도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지닌 각기 다른 ‘불’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진기를 움직이려 해보니 더욱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느껴졌다.
스스로 놀라는 좌무극과는 달리, 곁에 있던 이들은 좌무극보다 훨씬 또렷하게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좌무극의 진기가 점점 더 강하게 뿜어져 나오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벽이 자신들에게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건물 밖에 있던 이들도 뜨거운 바람이 방안에서부터 불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연비와 육승풍이 좌무극에게 일어난 변화를 관찰해보니, 과연 진기와 무살원강은 서로 구분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보다 훨씬 크고 놀라웠다. 마치 좌무극의 육체와 혼연일체가 된 것만 같았다. 밖으로 드러나 있던 좌무극의 팔 위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색깔이 한 겹 덮여 있어,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진기를 가라앉힌 좌무극이 놀라움과 기쁨이 담긴 눈을 번쩍 떴다.
“큰 사부, 넷째 사부, 아무래도 제가 선천의 경지를 돌파한 것 같아요. 진기에 일어난 변화도 환골탈태라도 한 듯한 수준이고요!”
연비는 가만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육승풍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무극아, 무공으로 따지자면 너는 이제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다.”
“예? 어찌 감히…….”
좌무극은 무의식적으로 연비를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큰 사부인 연비만이 천하무적이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비도 이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형의 말이 옳다. 무극아, 너는 이미 천하무적이 되었다. 설령 내가 최상의 상태를 회복한다 해도 네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무성이라 불리는 게 당치 않다고 느낀다면, 이 천하에 누구도 감히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을 것이다.”
계연, 우패천 그리고 노염생은 사실 그들이 있는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좌무극의 몸에 일어난 변화도 느꼈는데, 심지어 계연은 좌무극 그 자신보다 더욱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때 계연과 노염생은 더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말요괴도 죽은 마당에 더는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성이라, 거창한 칭호로군요. 그에 담긴 뜻은 또 어떻고요!”
노염생이 이렇게 감탄하자 옆에 있던 계연이 웃으며 덧붙였다.
“계모(某)가 느끼기엔 좌무극이 그 호칭에 충분히 어울리는 것 같네요. 속세에 무도의 기운이 자생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더는 걷잡을 수 없을 거예요.”
노염생이 입을 삐죽대더니 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도의 기운이 정말로 ‘자생’한 겁니까? 계 선생님께서는 조금도 관계가 없으시고요?”
그러자 계연이 노염생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조금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보다는 여기 우 도우가 공헌한 바가 더 커요.”
“아, 아닙니다. 선생님, 제발 저는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큰 인과(*因果: 선업을 쌓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을 쌓으면 나쁜 과보를 받는 불교의 사상)는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패천이 연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살원강의 구상 단계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계연이 말한 것처럼 대단한 공로가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저희가 여기에 머문 지도 사흘이나 되었는데, 말요괴가 죽은 것도 모르는지 어째 다른 요마들이 한번 와보지도 않는 걸까요? 경계가 이렇게 허술하다니요?”
그의 물음에 노염생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마 문안대왕 측에는 혼등(*魂燈: 선도의 종파에서 흔히 쓰는 술법으로 누군가 죽었을 때 그와 이어진 등불이 저절로 꺼짐) 같은 정밀한 술법이 없는 것이겠지. 또한, 거느리는 요마들에게 관심을 두는 자도 아닌 듯하고 말이오. 아마 가까운 벗을 초대해 한바탕 놀 생각에 바쁜 모양이오. 그나저나 동천 안에 있는 나라는 이곳 하나가 아닌데, 몇 대에 걸쳐 이곳에 살아왔던 이들은 대체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노염생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계연과 우패천도 알고 있었다. 사흘 동안 이곳에 식량을 날라 온 이들은 전부 이곳의 원주민들이었다.
“노 선생께서는 무슨 견해가 있으신지요?”
노염생은 계연의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계 선생님, 저들은 요마들에 의해 온갖 해를 입어온지라 요마들에게 아주 순종적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지금의 천우주에서 다시 시작하긴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차라리…….”
노염생은 두 제자들의 고향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의 소견으로는, 운주의 대정국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적합할 듯합니다. 그곳에서 충분한 교화를 받으면 다시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겠지요!”
노염생의 의견에는 자신의 제자들과 건원종을 위한 사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그의 의견이 마음에 쏙 들었다.
“대정국은 문치(文治)와 무공이 모두 흥성했으니 확실히 적합하긴 하죠.”
그때, 우패천이 마치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좌무극, 연비, 육승풍 모두 대정국 사람이 아닙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자 노염생이 심오한 말투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인도(人道)는 더욱 발전할 겁니다. 윤재성과 좌무극 같은 인물은 어쩌면 다시 없을지 모르지만, 문무의 기운은 마치 음양처럼 서로를 보완하며 발전하고 있으니, 이 커다란 천하에는 앞으로 수없이 많은 걸출한 인재들이 나타나겠지요. 저 두 사람을 따르는 이들도 점점 더 많아질 테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우패천이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하하, 앞으로 재미있어지겠습니다.”
“자, 그럼 저 세 사람 모두 탈 없이 깨어났으니 우리도 나눠서 움직이도록 하죠.”
이에 우패천이 즉시 진지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예, 그럼 저는 문안대왕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 선생께서는 동천 내부를 조사해주십시오.”
“조심하세요.”
계연의 말에 우패천은 “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 줄기 요사한 빛이 되어 날아가며 소리쳤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선생님! 세상에 수많은 아리따운 낭자들이 제가 품어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노염생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빛을 보더니 쯧쯧, 혀를 차며 물었다.
“계 선생님, 어디서 저런 소요괴를 찾아내신 겁니까? 한 수백 년 전에 선생께서 몰래 가르쳐낸 요괴입니까?”
“하하, 길에서 주웠어요.”
계연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더니,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게 역력한 노염생을 데리고 빛이 되어 날아갔다. 그들은 동천 안 다른 인축국의 상황을 살펴보러 가는 것이었다.
예상에 따르면, 천우주 정도 세력의 수행자들은 이때쯤이면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비록 얼마나 많은 이가 오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최소한 이 동천만은 결코 남겨둘 수 없었다.
* * *
요마들의 동천 안에 있는 여러 인축국은 각기 다른 요마 세력들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하지만 말요괴가 무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로도 사흘 동안 그 어느 요괴도 순찰하러 오지 않았다.
지나는 길에 본 몇몇 커다란 성에서는 수가 그리 많지도 않고 수행이 그다지 높지도 않은 요괴들이 꽤 있었다. 그 외에도 계연과 노염생은 인축국의 경계를 지나면서 순찰을 도는 요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인축국의 역사가 꽤 길고, 요마들이 사람들 앞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다른 데서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동천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금 깨닫게 하는 일이 있긴 했다. 천우주에서 잡혀 온 이들이 새로운 나라에 자리 잡으면, 원주민들이 식량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게 되어있었다. 그들은 요괴들에 의해 요법으로 생성된 바람을 타고 정해진 위치로 식량을 운반했는데, 그때면 감각이 둔해진 원주민들도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 공포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다시 천천히 이 사실을 잊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