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65화 (865/892)

865화. 잿빛의 세계

계연과 노염생은 약 한 시진쯤 날다가 다시 원래의 인축국으로 돌아왔는데,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주위 여러 성의 화기(火氣)가 아주 약하고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인구가 적어서가 아닌, 불씨 자체가 작은 듯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지나면서 본 곳 중 규모가 가장 큰 성안에 내려섰다. 때는 마침 가장 인파가 북적이는 오전 시간이라 거리에 행인이 아주 많았다. 거리에는 영업하는 가게도 있었고, 갖가지 작은 품목을 파는 행상도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새로 생긴 나라에 식량을 전달하러 온 이들처럼 뻣뻣한 얼굴이 아니라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흥, 애써 만든 허상 속에 사는구먼.”

노염생이 이렇게 조소하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사람은 모두 칠정육욕과 희로애락이 있는 존재이니 이것이야말로 정상이죠.”

두 사람이 거리에 내려 걷다 보니 주위 백성들이 자신들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들뿐만 아니라, 길을 지나는 이들도 둘을 힐끔댔다. 어떤 이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고, 어떤 이는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다급히 거리를 벌리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움직이며 최대한 자연스레 멀어졌다.

“정말 재미있군요, 계 선생님은 어찌 보십니까?”

노염생과 계연은 당연히 이들의 반응을 모두 눈치챈 상태였다. 노염생이 흥미롭다는 듯 묻자, 계연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 선생님의 옷은 그리 튀지 않지만, 계모(某)가 입은 옷이 문제인 듯하네요. 바깥에서는 그리 화려한 차림새가 아닌데, 여기서는 눈에 확 띄니까요. 저처럼 입은 사람을 보면 이곳 백성들이 처음엔 호기심을 느꼈다가도 곧 무엇을 떠올릴 것 같으세요?”

그러자 노염생이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 잡아먹는 요마라고 생각하겠지요.”

천우주에서 새로 잡혀 온 수백만의 백성들과 달리, 이곳의 원주민들은 대를 이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원주민들이 몸에 걸친 옷은 외부 세계와 크게 달라서 적잖은 이들은 옷이 제대로 몸을 가리고 있지도 못했다. 외부 세계의 거친 베옷조차 이곳에서는 아주 고급스럽게 보일 것이다.

백성들의 두려움 담긴 시선에도 계연과 노염생은 애써 못 본 체하며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점차 바깥과 다른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차림 말고도 이곳에는 사람 사이의 예절이 적었고, 글이나 서책이 보이지 않았다. 점포에는 간판이 없어 주인장들이 바깥에 나와서 소리치고 있었다. 지나는 곳마다 글씨 하나, 책 한 권 보이지 않았으며, 거래를 위한 화폐도 없는 듯했다. 사람들은 주로 물물교환을 했고, 때로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은’ 돌멩이가 교환되었는데, 그중에는 금덩이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든 통하는 화폐는 약재였다.

식량은 오히려 그리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요괴들이 매해 이곳의 풍년을 조성하기 때문인 듯했다.

성을 반이나 넘게 돌다 보니 계연과 노염생은 곧 걷는 게 피곤해져서 지붕이 없는 어느 천막에 앉았다. 그들의 등장은 천막을 지키던 조손(祖孫)을 겁에 질리게 했다. 하지만 노인은 감히 그들을 못 본 체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주위의 행인들은 아예 이곳으로 오지 않거나,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노인은 사실 계연과 노염생을 본 순간 두피가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이 순간, 계연이 지닌 특유의 친근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노인은 한쪽에서 놀고 있던 손자를 끌어와 낮은 소리로 당부했다.

“수레 뒤에 숨어있거라. 좀 이따 해가 지면 네 아비 어미가 데리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절대 나오지 말고 여기 숨어있어야 한다, 흐윽…….”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고,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얼른 할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노인은 아이를 잠시 끌어안고 있다가, 곧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찻주전자를 받쳐 들고 계연과 노염생이 앉은 식탁 앞으로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두, 두 분, 차, 차 드십시오…….”

노인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그가 명백히 겁에 질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므로, 곧 노염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가 당신을 잡아먹으러 온 요괴인 줄 아는 모양이군? 하긴, 당신 나이로는 인축국의 규칙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때가 되었으니까.”

그러자 노인이 공포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간 그는 인생의 희비와 여러 곡절을 겪었지만, 사실 내내 칼 한 자루가 머리 위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무탈하게 이 나이가 된 것만 해도 사실 운이 좋은 편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계연은 노인이 놀라 창백해진 걸 보고,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노인장,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노 선생님은 요괴가 아닙니다. 그저 다리를 좀 쉬려고 여기 와 앉은 것뿐이에요. 절대 노인장을 잡아먹지 않을 테니, 오늘 장사를 접으면 손자를 데리고 집에 갈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르신! 이 늙은이가 절을 올리겠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고맙습니다, 어르신!”

노인이 털썩 자리에 꿇어앉았지만 노염생이 한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아이고, 계 선생께서 말했잖소. 우리는 요괴가 아니라니까. 그러니 꿇지 마시고 가서 먹을 거나 좀 가져오시오.”

노인은 얼굴에 흘린 땀을 닦으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얼른 수레로 돌아가 가지고 온 고기를 전부 꺼냈다. 감히 아무렇게나 대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며 살아도, 언젠가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법이죠.”

계연이 이렇게 탄식하며 찻잔을 뒤집어 노염생과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차를 한 입 마신 계연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그래도 계속 마셨다. 노염생도 굳이 불평하진 않았지만, 계연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잔을 따르지는 않았다.

“예전에 처음 운주에서 계 선생님과 만났을 때, 저는 이미 속세 곳곳을 돌아다닌 후라 자주 세태를 한탄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견식이 늘었습니다. 사실 고된 나날을 보내는 거로 치자면 이곳보다 더한 곳도 널렸지요. 하지만 사람처럼 살지 못하는 거로 따지면 이곳만 한 곳은 없을 겁니다. 나중에 동천이 무너지고 인축국 백성들이 다시 바깥 해를 보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들을 교화할 사람들이 필요하겠지요. 이곳 사람들은 수백 년 혹은 천년이나 박해받으며 살았으니, 억눌린 만큼 반발도 클 거예요. 천우주에서 막 잡혀 온 이들이 있는 성으로 식량을 가져온 원주민들도, 좌무극 일행이 요괴를 죽이는 걸 보고는 똑같이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계연과 노염생은 전음을 통해 대화한 게 아니었고, 목소리를 구태여 낮추지도 않았으므로 음식을 준비하던 노인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이에 점점 두려움이 가신 그는, 왜인지 저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곧 이곳에서 가장 귀한 조미료인 소금과 그 외 적디적은 향신료로 맛을 낸 고기 요리를 들고 왔다. 쟁반 위에는 커다란 접시가 두 개 놓여있었는데, 한쪽에는 고기가 잔뜩 들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채소가 들어간 고깃국물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쟁반 위에는 적잖은 와두(*窩頭: 옥수수 가루·수수 가루 따위의 잡곡 가루를 원추형으로 빚어서 찐 음식으로 보통 가난한 집의 주식)가 쌓여 있었다.

노염생은 풍성한 음식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이렇게 풍족한 대접을 받다니, 우리 두 사람이 요마 놈들의 덕을 볼 때도 다 있군요.”

그러자 계연이 눈썹을 휙 들어 올리더니 담담히 대꾸했다.

“돈 내야 해요.”

“이 늙은이는 비렁뱅이니 계 선생님께서 내주시겠지요.”

노염생은 낯가죽이 아주 두꺼웠으므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젓가락을 들어 커다란 고기 한 점을 집었다.

계연은 이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맛이 꽤 괜찮은 것 같았다.

“노인장, 그간 이곳의 삶이 어떠했소?”

노염생이 고기를 씹으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갑작스레 질문을 받은 노인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처음처럼 과도한 반응은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노인장의 손자, 손자의 손자가 전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거요?”

노인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인 채, 수레 아래에 숨어있는 손자를 보며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머리가 굵어진 후로 그에게도 악몽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날 동년배의 누군가가 실종되기도 했고, 어떤 어르신이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정상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어떤 말들은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지만, 이때만큼은 그도 낮은 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타고난 명이 이럴진대…… 괜찮지 않다고 해서 또 어찌하겠습니까?”

그러자 노염생이 젓가락으로 그릇을 탁, 쳤다.

“아직 갱생의 여지가 있군.”

“없었다면 이 수천수만의 백성들을 그냥 놔두려고요?”

계연이 웃으며 말하더니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장, 사실 저희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 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그래서 저희가 지닌 것이 이곳에서 유통되는 화폐가 아닐 듯합니다…….”

노염생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금덩이가 있으시잖습니까…….”

하지만 계연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온화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계모가 이야기를 들려드릴 테니 그걸로 밥값을 제해주시지요.”

노인이 어찌 감히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끄덕이며 동의하자 계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지 간에 만물이 생겨나자, 화초와 나무는 햇빛을 받으며 자랐고, 날짐승과 들짐승은 각자의 서식지를 만들었으며, 인간들은 속세에 저마다 터전을 만들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게 되었어요…….”

계연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가 종내에는 점점 더 많은 행인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계연의 이야기를 아주 멀고 먼 어느 괴이한 곳의 이야기처럼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희로애락이 있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기도 했고 천재지변이 일어나기도 하며 인생에 곡절을 겪었다. 만남과 헤어짐, 시서(詩書)와 음악, 각양각색의 직업이 있었다. 비록 모든 일이 완벽하고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곳은 색채가 있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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