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곧 시작되겠어
문안요왕이 떠나자 이쪽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피식 웃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천계맹 일원 중 많은 이들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본 우패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작 저 정도로 천계맹의 요마들을 탄복시킬 수 있다 믿은 것인가?’
하지만 저 요왕이 이들을 수하로 받든 말든 그의 대업에는 별 상관이 없었다.
대청 안의 천계맹 일원들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을 때, 동굴 밖 산허리 춤의 광장에는 계연과 노염생이 와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문안요왕은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요괴’ 둘을 발견했다. 이 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천계맹 일원들보다 훨씬 옅었는데, 가만히 서서 먼 곳을 조망하는 모습이 보통 요괴 같지 않았다.
“하하하하……. 두 분은 천계맹의 형제들이군? 이곳 만요연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소. 여봐라, 술을 올려라.”
요왕의 명령에 즉각 어느 요괴가 술병을 들고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연과 노염생에게 각기 한 병씩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구동성으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대왕.”
“음? 내가 요왕인 건 어찌 알았나? 본왕은 요기(妖氣)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문안요왕이 놀란 듯 과장된 표정으로 묻자, 계연이 인내심을 갖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한눈에 봐도 자태가 위풍당당하십니다. 또한, 주위의 요족(妖族)들이 대왕을 경외가 담긴 태도로 대하고 흐르는 기질 또한 비범하시니, 대왕께서 요왕이 아니면 또 누가 요왕이겠습니까?”
“하하하하, 말 한번 잘했네! 형제의 안목이 아주 뛰어나군!”
문안요왕은 이렇게 웃으며 계연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지만, 계연이 휙 피해버리는 통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계연이 그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가볍게 그의 손을 피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천계맹은 과연 와호장룡(*臥虎藏龍: 엎드린 호랑이와 숨어있는 용, 숨어있는 고수를 의미함)인 곳이로군!’
“형제들, 어서 안으로 들어가 쉬시게. 접대를 끝내고 나면 꼭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술잔을 부딪치도록 하세.”
“예, 편한 대로 하십시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문안요왕이 떠나는 걸 눈으로 배웅했다. 그러다 노염생을 힐끗 쳐다보니, 그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뭐가 그렇게 우습다고요.”
계연은 입을 비죽이며 대꾸한 뒤, 기다린 머리칼을 한번 쓱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 몇 개가 떨어지더니 미풍을 타고 천천히 깊은 동굴 내부로 날아갔다.
잠시 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우패천과 육 산군의 표정이 거의 동시에 굳었다. 그들이 적절한 틈을 타 고개를 숙여보니, 어느새 자신의 손에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가 날아와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우패천과 육 산군은 즉시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알아차렸다.
‘계 선생님의 머리카락이군!’
‘사존(師尊)의 머리카락이다!’
왕유홍과 시구의 손에도 머리카락이 나타났으나, 두 사람은 사정을 몰랐으므로 즉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머리카락에서 계연의 신의(神意)가 전해지자 의심을 거두었다.
“이건 계모(某)의 머리카락입니다. 후에 여러분을 지켜줄 물건이에요. 물론 여러분도 스스로 재빨리 움직여야겠지만요.”
바깥에서는 노염생이 문안요왕이 내린 술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계 선생님, 이 늙은이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솜씨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어서 가보세요, 노 선생님. 사흘 뒤에 만요연이 시작될 거예요.”
노염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는 천우주 수선자들에게 상황을 직접 전달해야 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조율해봐야 했다. 이에 계연만이 홀로 이곳에 남게 되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곧 시작되겠어!”
계연이 담담히 중얼거리며 술을 한입 머금더니, 고개를 들어 사악한 기운이 자욱이 깔린 어두컴컴한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든 것을 바라보았다.
* * *
무수한 요마들이 운집한 이런 상황에서 비검전서를 이용한 단순한 방식을 쓰는 것은 무척 위험성이 높았다. 이에 노염생도 직접 천우주의 수사들과 합류하기로 한 것이었다.
노염생은 만요연이 열리는 범위를 어느 정도 벗어난 후에야 둔술을 펼치더니, 이내 강풍층 위를 뚫고 올라가 해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시진 뒤, 마침내 감응을 느낀 노염생은 하늘에 빛과 어둠이 섞일 때까지 미리 약속한 점괘의 변화를 따라 한참 동안 날아갔다. 그렇게 노염생은 마침내 천우주 수선자들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아래에는 강풍이 맹렬히 불고 위로는 강렬한 태양 빛이 내리쬐는 위험지대에 배 6척과 산봉우리 2좌(座)가 둥둥 떠 있었다. 배와 산 주위에는 은은한 빛이 감돌며 사방팔방에서 이들을 찢어버릴 기세로 불어닥치는 갖가지 파동을 막아내고 있었다.
6척의 커다란 배는 계역 나룻배로 쓸 수도 있는 크기로, 각 선문의 법보(法寶)였다. 선상 안은 여러 진법과 수미법(*須彌法: ‘수미개자(須彌芥子)’에 담긴 뜻을 빌린 술법. ‘수미’는 불교 전설 속의 산 이름이며 ‘개자’는 겨자의 씨를 말하는데, 거대한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는 것을 일컬으며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비유하는 사자성어)으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신묘한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산봉우리 둘 중 하나는 바로 건원종의 법산(法山)이었는데, 겉으로 보기만 해도 저 안에 적잖은 수선자들이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염생이 자신의 빛을 숨김없이 드러낸 채 곧장 이곳으로 날아오자, 수선자들도 즉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고도가 높아서 위험할 뿐만 아니라 강풍이 불어닥치고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지며 난류까지 흐르는 곳이라 방향을 제대로 잡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곳을 어려움 없이 찾아온 데다 거리낌 없이 빛을 드러내는 걸 보니, 저자의 정체가 먼저 흑황에 잠입한 두 고인(高人) 중 하나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원자를 비롯한 천우주에서 명망 있는 선인들이 모두 함께 건원종의 법산 밖으로 노염생을 마중 나갔다.
“사제야, 어땠느냐?”
도원자가 말을 끝맺었을 때 노염생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천우주의 수선자들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어느 선문의 법보에도 오르지 않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난류 속에서 상의하기 시작했다.
“흑황의 요마들은 천우주 백성들을 모두 잡아먹을 계획입니다. 뭇 요마들이 모두 모이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 백만 명이나 되는 인간들을 주요리로 내놓을 예정이라 합니다. 위치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뭐라?”
“수백 만에 달하는 백성들을 잡아먹으려 한단 말이오?”
“빌어먹을 놈들! 전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언제쯤 말인가? 만약 곧 시작될 예정이라면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게 좋겠소!”
이들은 가장 젊은 사람도 수백 살에 이르는 수선자들이었는데, 그중에도 성정이 급한 이들이 있어 저마다 분노에 눈을 부릅뜬 채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노염생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도원자가 사제를 재촉했다.
“사제야, 자세히 좀 말해 보아라. 계 선생님께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 게냐?”
노염생도 더는 뜸 들이지 않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계연과 상의했던 계획을 털어놓았다. 덕분에 천우주 수사들은 동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만요연에 모인 요마들의 수준이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요연은 정말로 그 이름처럼 만 명에 이르는 요괴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간단한 자리가 아니었다. 요왕이 수하로 부리는 요병(妖兵)이나 요장(妖將)만 해도 수천을 넘어 만에 가까울 테고, 어느 때고 불러 모을 수 있는 이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만요연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어느 수준 이상의 명망 있는 요괴들이었다. 그중에는 연회를 마련한 십여 명의 요왕에게 사적으로 초대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모두 흑황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요왕과 비슷한 경지의 요괴도 적지 않았고, 대요(大妖)들은 눈만 돌리면 어디에나 있었다.
노염생은 반각(半刻) 동안 자신이 본 광경을 대략이나마 설명해주었다. 이에 수선자들은 동천 안 여러 인축국의 상황보다는, 곧 열릴 만요연의 규모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노 도우, 그러니까 이번 만요연에 수행이 천요(天妖)에 비견된다는 요왕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노염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날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들도 반드시 있을 겁니다. 일전에 구미호 도사연은 제 사형이 처리했지만, 처리하기 쉽지 않은 요왕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애꾸눈의 독두꺼비인 문안요왕의 도행만 해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노염생의 설명에 천우주 각 종파의 고인들은 미간을 찡그린 채 깊은 침묵에 잠겼다. 천우주 정도(正道)에 속하는 고인들 태반이 전부 이곳에 와 있었고, 문중에서 출중하다 평가받는 제자들도 적잖이 와 있었다.
하지만 만요연에 참석하는 요괴들은 거의 전부가 대요(大妖)였고, 그런 대요를 따르는 수하들은 셀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선도 세력의 손실은 막대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천지에는 본래 정기(正氣)가 있으니, 우리 정도에서는 마땅히 천지의 정기를 계승해야 하오. 그러니 설령 전투 중에 죽게 되더라도 최소한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오.”
도원자의 탄식 섞인 말은 모든 수사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그 결론만은 모든 이들과 같았다.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어떻게 물러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만요연에서 요마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인원을 나눠 동천 내부를 소탕하고 동천의 여러 출입구도 지켜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요마들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이(李) 도우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본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니, 요마들을 죽이려다 되려 백성들을 잃으면 본말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원을 나누면, 아무리 기습이라 해도 우리 측의 전력이 너무 깎이는 게 아닐지…….”
이 말에 어떤 수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반대로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오. 자고로 옛날부터 정사(正邪) 두 세력은 양립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싸움에 임해야 하오. 또한, 이번 전투를 끝내고 살아남은 제자가 있다면 반드시 우리 선도의 앞길을 밝힐 재목이 될 것이오!”
“도우 분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번 싸움은 어찌 됐든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번 일은 백만여 명의 천우주 백성들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수선자들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켜보던 노염생이 제때 나서 수선자들의 논쟁을 제지했다.
“여러 도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계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천을 지키는 동시에, 가능하다면 만요연 외곽에 진법을 쳐 달라고…….”
노염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떤 수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노 도우, 나도 계 선생님의 도행이 심오하여 짐작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소. 또한, 만요연이 열리는 장소에 진법을 깔아야 한다는 것도 동의하오. 하지만 그 수많은 요마가 그걸 그냥 두고만 보겠소?”
“맞습니다. 계 선생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진선(眞仙)이라 할지라도 지닌 법력이 무궁무진한 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