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화. 그물을 뚫고 도망친 물고기는 없다 (1)
곧이어 까맣게 그을린 땅 위로 요기와 마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커헉…… 헉…… 허억…… 켁켁……!”
문안요왕이 원래 걸치고 있던 찬란한 은빛 갑옷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파손되어 있었다. 그는 몸 곳곳이 타긴 했지만, 그래도 갑옷 덕분에 상처가 그리 깊진 않았다. 이때 그는 아직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머리만은 애꾸눈을 가진 독두꺼비의 모습을 하고서 손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극(*戟: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창)을 든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갓 찜통에서 나온 것처럼 그의 온몸에서 흰 연기가 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나?”
문안요왕은 떨리는 손으로 강철 극을 꽉 쥔 채, 상공의 먹구름을 뚫어질세라 노려보았다. 마침내 뇌광이 점차 약해지고 느껴지는 압력도 줄어들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니, 곳곳에 검게 그을린 시체가 즐비했다. 물론 아직 살아있는 요마의 기운도 느껴졌다.
살아있는 요마 중에서는 반쯤 땅에 묻힌 이들이 있어, 그들은 막 온 힘을 다하여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또한, 문안대왕처럼 당당히 땅에 버티고 서 있을 실력이 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원래 눈 닿는 곳마다 요마로 가득하던 산에 이제는 살아있는 요마들이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이에 갑작스러운 뇌겁이 지난 후 살아남은 요마들은 안도하는 한편 망연자실한 느낌도 들었다. 그들은 저 멀리까지 이어진 참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반응이 좀 더 빠른 요마들은 이때쯤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바로, 뇌겁이 떨어지기 직전 술법을 펼치는 누군가의 도음(道音)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뇌겁은 누군가 고의로 펼친 것이 된다.
문안요왕은 대범한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멍청하지는 않았으므로, 이 점을 떠올리고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마침 하늘에서 한 줄기 은은한 금빛이 멀지 않은 산 정상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칙령 뇌주는 이렇게 많은 요마에게 내릴 벼락을 견딜 힘이 없었으므로, 계연이 술법을 펼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 역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소모한 힘이 너무 컸는지, 계연의 손에 돌아왔을 때 뇌주의 근간은 그대로였지만 뿜어내는 빛은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계연은 뇌주를 받아들며 살짝 마음이 아팠으나, 그래도 이 정도 대가를 치르고 뇌법을 비처럼 뿌릴 수 있었으니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안요왕의 시선을 느낀 계연과 도원자를 포함한 십여 명의 고인들은 애꾸눈의 독두꺼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뇌겁을 만들어내던 먹구름이 천천히 흩어지며,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대지를 비추기 시작했다. 햇빛은 요행으로 살아남은 요마들도 내리쬐었으나, 그들이 느낀 것은 따뜻함이 아니라 뼈를 에는 듯한 한기였다.
뒤이어 거대한 비행선이 하늘에 차례로 나타났다.
숭엄한 두 좌의 대산(大山)이 비행선 무리의 양쪽에 떠올라 있었다. 그 주위로는 법기(法器)나 부적을 든 수선자들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빽빽이 날고 있었다. 조금 전에 요마들이 느낀 것은 햇빛이 아니라 이들이 내뿜는 선기로 인한 빛이었던 것이다.
“도원자 도우?”
“사형!”
계연과 노염생의 목소리에 도원자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명의상으로는 그가 이번 계획의 발기인이었지만, 조금 전 계연의 뇌법에 너무 놀란 탓에 저도 모르게 계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원자는 어색한 모습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내 그의 천둥처럼 쩌렁쩌렁한 도음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도우분들, 지금이 바로 요마들을 처리할 때입니다. 모두 시작하십시오!”
내내 쉬면서 힘을 비축하던 쪽은 그 기세가 드높았고, 다른 한쪽은 이미 기력과 의지가 잿가루처럼 쇠한 터였다. 이렇게 무척이나 불공평한 정사(正邪)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산 정상에 서 있던 십여 명의 고인들도 마찬가지로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당연히 가장 위협이 되는 요마들이었다. 게다가 막 엄청난 법력을 소모한 계연도 쉬지 않고 곧바로 전투에 참여했다.
문안요왕은 도원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도원자가 엄청난 법력을 쏟아부은 물의 술법으로 그를 통째로 얼린 후 산산이 깨부숴 죽인 것이었다. 사실 이때 뇌법에 뛰어난 도원자 말고도 다른 선도의 고인들도 웬만해선 뇌법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 계연의 눈앞에서는 뇌법을 쓸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요마들은 만요연에 참석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뇌겁을 견디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뇌겁을 견디는 것은 ‘겁(劫: 재난, 화(禍))’이라는 말 그 자체처럼 본래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마들은 사실 너나 할 것 없이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였다.
기력도 자신감도 부족한 상황에서 요마들은 종파 단위로 모여 술법을 펼치는 수선자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 결과는 사실 자명했다.
하지만 요마들의 흉악하고 음험한 습성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선자들은 뇌겁과 달리 반격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으며, 자신의 강대한 요력(妖力)으로 두려움과 악한 기운을 퍼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사의 각오를 한 요마들이 온 힘을 쏟아부어 싸웠기 때문에, 그 저항력은 수선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계연은 넝쿨검을 쥔 손을 뒷짐 진 채 구름을 타고 움직였다. 그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이상, 다른 요마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천계맹 일원들만을 노렸다. 계연은 만요연이 열리기까지 사흘 동안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천계맹 일원들이 어디에 있고 어떤 특징과 기운을 지녔는지는 이미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어느 산봉우리를 지나친 순간, 계연은 갑자기 등 뒤에 있던 넝쿨검을 뽑았다.
챙……!
계연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고, 넝쿨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맑은소리와 함께 검광 한 줄기가 산 중턱으로 날아갔다. 곧이어 쿠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산이 반으로 뚝 잘렸다.
그 산봉우리는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는데, 단면에는 놀랍게도 붉은 핏빛이 번지고 있었다. 산봉우리 자체가 어느 대단한 정괴가 변신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를 알아챌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시 어느 산 정상을 지나치던 순간, 계연이 넓은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그의 소매가 끝도 없이 늘어나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그 소맷자락의 음영이 어느 산 중턱에 드리우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던 육 산군과 우패천을 비롯한 네 사람이 곧장 그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넷은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계 선생님에게 거둬졌으니, 자칫 잘못하여 수선자들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네 분 다 잘해주었어요. 시구, 제가 후에 당신의 사존(師尊)과 사조(師祖)를 뵙게 되면 대신 잘 말씀드릴게요.”
계연의 목소리가 소매 속에 전해지자, 구사일생의 기분을 느끼고 있던 시구가 안도와 함께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이제 다시는 사문(師門)에 받아들여질 희망이 없다 해도, 계 선생님께서 좋은 말을 몇 마디 해주신다면 사존과 사조도 자신에 대한 의견을 조금이나마 바꾸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다시 일반 백성의 피를 마신다면, 계모(某)는 당신 사문을 위해 대신 제자를 정리해 줄 용의가 있어요.”
계연의 어조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으나 아주 진지했다. 이에 한창 기쁨 속에 빠져있던 시구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계 선생님이 이미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시구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시구가 계 선생님의 법지(*法旨: 윗사람의 뜻이나 생각)를 받들겠습니다. 계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는 가슴에 깊이 새기고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우패천과 육 산군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왕유홍은 생각에 잠긴 눈길로 시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를 통해 그의 마음속에는 넷의 균형이 다시 재정립되었다. 이 넷 중, 시구의 위치가 원래 자신이 생각하던 것만큼 높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내 넷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말고는 그들에게는 바깥의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감이나 공간감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환경에 무척 호기심을 느꼈다.
‘계 선생님의 소매 속은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하지만 넷이 모르고 있던 것은, 바로 주위의 깊은 암흑 속에 그들을 또렷이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의첩 안의 작은 글자들이나, 두루마리 속의 해치, 또는 계연에 의해 그림 속에 봉인된 멍한 눈빛의 규치(*虯褫: 중국 신화 속에 나오는 백사(白蛇)의 일종으로, 잘못을 저지른 용이 규치가 된 것이라는 전설도 있음)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넷은 때때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 * *
대지에서 선광과 요법이 부딪치는 전투가 벌어지던 시각, 동천 안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동천 안에 숨어 있던 요마들은 요행히 계연의 뇌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계연은 구름을 탄 채 검을 뽑아 곧장 요마들을 베거나, 어검술로 검을 부려 죽이거나, 혹은 정신법(定身法)을 써서 수선자들이 요물을 죽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천계맹의 모든 일원이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도 계연은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에는 살아있는 요마가 없었다. 그러다 그는 마침내 악취를 내뿜는 어느 연못의 상공에 도달했다.
이 연못은 선기가 느껴지는 빛으로 뒤덮였는데, 건원종이 거느린 어느 종문 수선자들의 진법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면 윗부분은 유리처럼 다양한 색채가 반짝였다. 바로 동천 안에서 나오는 빛이 반사된 것이었다.
계연은 다른 수선자들에게 동천으로 들어가겠다고 알린 후, 즉시 진법 안으로 들어가 수면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연못의 모든 오염물질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더니, 계연이 내디딘 곳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청정 구역이 만들어졌다. 곧이어 그가 내디딘 곳이 푹 파이더니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잠겼다.
수면 아래로 완전히 내려간 계연이 다시 상공으로 솟구치자, 그의 눈앞에 동천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빛이 찬란히 빛나고 요사한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다.
이곳은 동천의 출입구 중 하나로, 요마들이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곳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싸움도 가장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래 동천 안 요마들의 저항이 가장 약하리라고 짐작됐지만, 오히려 바깥의 요마들은 계연의 뇌법에 당해 처리하기 손쉬웠고, 이쪽의 요마들은 무척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에 이곳의 요마들은 수선자들을 상대로도 거뜬히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고인들이 제자들을 이끌고 와 출입구를 점거하기 시작하자, 수선자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고 이에 요마들은 처음만큼 굳건히 버티지 못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로 요마들이 동천 안의 평범한 사람들을 정말로 ‘사유 재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동천의 출입구이기도 한 어느 강 부근에는 큰 성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도 적잖은 천우주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선자들이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요마들 또한 성 가까이 싸움을 가져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이용해 수선자들을 위협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첫째로는 아직 바깥에 무슨 참상이 벌어졌는지 몰랐으므로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였고, 둘째로는 저 백성들을 정말로 자신들의 재산이라 여기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