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화. 무도를 이끄는 이들의 풍채
“다들 드세요.”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경의를 표하기 위해 먼저 한입 마셨다. 연비는 평소 술을 적게 마시지만, 이 순간에는 사양하지 않고 좌무극과 함께 술잔을 비웠다.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이 술은 맛도 좋고 목 넘김도 일품이었으며 뱃속에 들어가면 따끈하게 몸을 덥혀주었다.
계연은 세 사람 모두 몸을 보양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술에 인색하게 굴지 않고 술잔이 빌 때마다 따라주었다. 그들은 그간 무공을 닦으면서 있던 일이나, 동천 안 인축국의 상황에 대한 것 외에도 이 천지가 얼마나 거대한지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하의 각 대륙, 사해(*四海: 동해, 서해, 남해, 북해)와 팔황(*八荒: 팔방(八方)의 멀고 너른 범위), 동천 안의 또 다른 천지, 요국(妖國)과 귀역(鬼域), 음양으로 나눠진 저승과 이승, 속세의 여러 나라…….
한 사람당 약 수십 잔을 마시자, 계연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좌무극과 연비, 육승풍 세 사람은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별안간 계연이 이렇게 물었다.
“이제 무도에 새로운 길이 열렸고, 세 분께서 무도의 기운을 이끌고 있는데, 만약 어느 선인이 자유롭게 속세를 거닐고 장생할 수 있는 선법(仙法)을 전수해줄 테니, 선도에 입문하라고 권유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연비가 웃으며 계연을 바라보았다.
“계 선생님, 설마 그 선인이 선생님은 아니겠죠?”
그러자 계연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예전이든 지금이든, 또한 앞으로도 계모는 절대 그리하지 않을 겁니다.”
좌무극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더니 한입에 술을 비웠다. 그에게서는 조금 전에 계연을 만났을 때의 조심스러움은 사라지고 대요를 죽였을 때의 오만함이 엿보였다.
“하하하하하, 계 선생님께서는 저희가 무도에 진정으로 새 길을 열었다고 하셨잖습니까? 전도가 유망하다지만 어찌 될지는 미지수고요. 그렇다면 저 좌무극은 반드시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 계속해서 돌파를 이룰 것입니다. 저는 정상에 우뚝 서서 무도가 번성한 광경을 굽어보고, 세상 모든 이들이 무도의 진정한 풍모를 돌아보게 할 것입니다!”
그러자 계연의 눈에 밝은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그는 직접 좌무극을 위해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도 마저 채운 뒤, 술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무성(武聖)이라는 칭호도 명실상부하게 되겠군요. 계모는 그때 보게 될 무성의 풍채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
좌무극은 계연과 술잔을 부딪친 뒤 한입에 술을 쏟아붓고는 연비와 육승풍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들께서도 이 제자가 훗날 어떤 풍채를 지니게 될지 기대하십시오!”
“이 쪼끄만 녀석이, 우리도 네게 지지 않을 것이다!”
“하, 어린놈이 패기는 있구나. 그런데 우리도 아직 늙지 않았다!”
“하하하하……. 건배!”
“건배!”
…….
그렇게 술을 한 잔, 또 한 잔 마셔도 작은 술병에서는 술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연을 제외한 세 사람은 전부 술에 혼곤히 취해버렸다.
육승풍은 대체 몇 차례인지도 모를 정도로 술병을 흔들다가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술잔을 가득 채우더니 이내 콸콸 넘치기 시작했다.
“으음……. 이 술은 어찌 된 게 끝나질 않지?”
“사부님,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은데요, 꺼억……!”
좌무극은 육승풍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연비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다 큰 사부는 이미 탁자에 널브러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 이번 잔만 마시고 쉬세요.”
계연은 술병을 가져와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흑돌 하나를 쥐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보니, 좌무극과 육승풍마저 탁자에 기대 뻗어있었다.
“하하, 젊어서 그런지 역시 오기가 있네. 잘됐어…….”
계연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뒤 술병과 술잔을 정리해서 밖으로 나가며, 세 사람을 대신해 문도 꼭 닫아주었다.
* * *
이틀 후가 되자, 정사(正邪) 세력 간의 전투는 일찍이 끝이 난 후였고 물론 그 결과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만요연에 참석한 요마귀괴들 중에는 무사히 빠져나간 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천우주 수사들은 이번 전투의 전과(*戰果: 전쟁에서 얻은 성과)가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흑황을 또다시 휘저어 혹시 모를 손실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한편, 수많은 인축국이 자리한 동천 안에서는 백성들이 놀란 얼굴로 상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함께 기대감이 묻어났다. 곧이어 백성들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왜냐하면,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구름도 없는 하늘에 번개가 치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불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서 있는 대지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래된 건물들이 위태롭게 휘청거렸고, 사람들의 귓가에는 갖가지 굉음에 전해지다 돌연 발밑이 다시 잠잠해졌다.
천우주 각 종파의 고인들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이곳 동천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동천 내부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종말의 날을 방불케 했으나, 곧이어 거대한 육지의 파편이 그대로 치솟더니 찢긴 하늘 사이로 날아갔다.
선도의 고인들은 동천 안의 일부 육지를 그대로 떼어 들어 올린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신속하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동할 수 있었고, 흑황처럼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찬 구역에서 시간을 더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계연이 예상했던 그대로, 좌무극 사제 3인방은 아직 돌파의 단계에 있었으므로 신체 변화를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들의 기혈과 기운이 모두 그토록 왕성하니, 당연히 천우주 고인들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선도의 다른 수사들은 소위 무도(武道)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이들의 천부적인 자질과 특별한 기운만은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모두가 이들을 문하로 들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들이 선인이 되기를 거절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에 수사들은 경악하는 동시에 아까움에 탄식만 흘렸다.
* * *
며칠 뒤, 계연은 홀로 바람을 몰고 망망대해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러다 바다 위의 어느 섬을 발견하고는 해안가 암초 위에 내려섰다.
그를 둘러싼 주위는 바람이 평온했고 파도도 잠잠했다. 이에 계연이 소매를 한번 휘두르자, 우패천, 육 산군, 왕유홍, 그리고 시구가 안에서 쏙 빠져나왔다.
“드디어 나왔군! 저는 계 선생님께서 저희를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우패천에게서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육 산군은 미소 띤 얼굴로 계연에게 예를 올렸는데, 허리 숙여 예를 올리는 모습에서 공손함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육 산군은 평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계 선생님. 소인은 육오라 하고 우형과 친한 사이로, 이번 일을 육모(某)도 전심전력으로 도왔습니다.”
왕유홍과 시구도 얼른 계연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들은 우패천과 육오처럼 이런 상황에서 안색도 바뀌지 않는 평정심을 갖추지 못했다. 특히나 육오 저놈은 계 선생님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얼마 전에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봤음에도 저렇게 평온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계연이 육 산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이런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분의 공이 컸어요. 예전의 죄를 이것으로 얼마간 보상한 셈이죠.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시구가 입을 달싹이며 사존과 사조께 자신이 이번에 선생님을 도운 일을 잘 말해달라고 하려다가, 계 선생님은 결코 잊을 리가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괜히 말해봐야 미움을 살 것 같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하, 계 선생님께서 저를 살려주셨으니 저는 이미 엄청난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그간의 행동을 반성하고 정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우패천이 웃으며 이렇게 호언장담했으나 왕유홍과 시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쪽에 서 있던 육 산군은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예를 올렸다.
“계 선생님께서는 신묘한 경지의 고인이시니, 선생님의 풍채를 뵌 것만으로도 제게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우패천과 육오의 말에도 계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구를 한번 쳐다본 뒤, 마침내 왕유홍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할 말이라도?”
왕유홍은 잠시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계 선생님, 혹시 제가 예전에 남긴 그 복사나무 가지를 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가지는 제가 제련한 지 오래되어 제 기운과 잇닿아 있고, 분신과도 같은 거라서요. 예전에도 바로 그런 이유로, 서, 선생님을 속일 수 있었던 거고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소매 안에서 복사나무 가지를 꺼냈다. 가지 위에 피어난 복사꽃은 여전히 색채가 선명하고 물기를 품은 듯이 생생했다.
우웅……!
넝쿨검이 소리를 내자, 검의(劍意)가 뿜어져 나오며 주위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왕유홍은 온몸이 저릿하고 솜털까지 곤두서는 것 같았다. 심지어 선검이 자신의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검의는 곧바로 사라져버려 마치 그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계연은 복사나무 가지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왕유홍에게 건넸다.
“이 가지가 어디서 온 것인지, 당신과는 무슨 관계인지 자세히 말해주세요.”
왕유홍은 기쁜 마음에 조심스럽게 가지를 받아든 다음, 안도하는 한편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아룁니다. 저는 원래 어느 황폐한 성에서 자라던 복사나무로, 어느 메마른 핏빛 복사나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이 점점 또렷해졌지요. 제가 정령이 되었을 때, 저는 옆의 오래되어 시든 복사나무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려 그것의 정화(精華)를 취해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이 복사나무 가지는 제가 연기법(*煉器法: 법기를 제련하는 술법)을 이용해 그 나무에서 제련해낸 것입니다…….”
우패천과 육 산군은 그제야 왕유홍이 복사나무에 맺힌 정령이고 후에 수행을 통해 진신(眞身)을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정체를 알 수가 없더라니, 정령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 모습도 진짜 모습이고, 황폐한 성의 복사나무도 그의 진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계연이 눈썹을 약간 찡그린 채 물었다.
“혹시 계모를 그 핏빛 복사나무가 있는 곳에 데려다줄 수 있나요?”
왕유홍이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이…… 그 복사나무의 정화는 이미 제가 흡수한 터라, 지금은 그저 썩은 나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왕모도 고작 몇백 년 만에 초목의 정령에서 이 정도 도행을 쌓은 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바로 그 이유로 저 스스로 이름도 유홍(幽紅)이라 지은 것이고요……. 선생님께서 만약 보시고 싶으시다면, 소인이 직접 가서 뽑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