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4화. 진룡으로 거듭나려는 응약리
‘이미 흡수했다고?’
왕유홍이 자신의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길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연은 왕유홍의 설명에 미간을 굳게 찌푸리다가 한참 뒤에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보시나요?”
그 물음에 왕유홍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고, 우패천과 육 산군도 직감적으로 자신들에게 묻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구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중 아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 순간, 계연의 소매 속에서 약간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자에게 피 한 방울을 달라고 해다오.”
“지금 말하는 게 누구인지요?”
왕유홍이 조심스럽게 묻는 어조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계연은 곧 소매 속에서 해치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왕유홍을 향해 말했다.
“이 그림 위에 피 한 방울만 떨어뜨려 주세요. 정혈(精血)일 필요는 없고 그냥 피 한 방울이면 됩니다.”
계연이 요구하는 게 무엇이든 목숨에 연관된 것만 아니라면 왕유홍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에 왕유홍이 검지에서 피 한 방울을 짜내 그림 위에 떨어뜨리자, 그림 위의 오래된 요수(妖獸)가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수는 입을 쩍 벌려 피를 받아먹고는 쩝쩝, 맛까지 음미했다.
“음, 맛이 괜찮군. 별로 큰 문제는 없다.”
해치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기복이 없었고, 계연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돌돌 말았다.
“그럼 그 오래된 복사나무 한 그루만 가져다주세요.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여기서 헤어지는 거로 하죠. 나중에 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지요.”
“예!”
“안녕히 가십시오, 계 선생님!”
네 사람은 각자 무슨 생각을 하든 일단 이구동성으로 계연을 공손히 배웅했다. 계연은 그들을 향해 간단히 예를 차려 보인 다음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얼마 후, 더는 계연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을 느끼지 못하게 되자 왕유홍과 시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씨 네가 초목의 정령이었을 줄이야. 아, 그래서 대체 수나무냐, 암나무냐?”
우패천이 뜬금없이 이렇게 묻자 왕유홍은 등에 열이 오르더니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뭐, 별 뜻은 아니다.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
우패천은 자신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되돌아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 어디선가 초목의 정령들은 날 때는 성별의 구별이 없고, 후에 자신의 선택으로 성별을 정한다고 들어 무척 호기심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왕유홍은 우패천을 무슨 뱀이나 전갈 보듯 꺼렸다.
“당연히 사내죠, 제 어디가 여인네 같습니까?”
우패천이 입을 비죽이더니 왕유홍을 위아래로 관찰하며 속으로는 ‘아무리 봐도 당연히 남자로는 안 보이는데. 이름도 그렇고.’라고 생각했으나, 상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그들의 대화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고, 시구는 미소 띤 얼굴로 육 산군을 향해 말했다.
“육오, 계 선생님을 처음 만나면서 그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군.”
그러자 육 산군의 눈빛에 살기가 스쳐 지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계 선생님께서는 내게 어떤 금제를 남기지도 않으셨고, 정말로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셨으니 자네들과는 달리 긴장할 이유가 없지.”
그 말에 몇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몇 마디 상의한 후, 얼마간은 함께 움직이기로 한 후 섬을 떠났다.
* * *
계연은 홀로 구름을 타고 날아가면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끝이 하늘과 만나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가 돌연 이렇게 물었다.
“해치, 왕유홍이 대체 어떻던가요?”
계연은 전에 해치의 태도에서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이번에 해치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하하, 계연, 그자가 말한 시든 혈도(血桃)는 아주 먼 옛날 천상에 있던 복사나무 중 한 그루일 거다. 그것은 살아있을 때 생기를 지니고, 죽은 후에는 죽음의 기운을 내뿜지. 사실 그 왕씨 놈도 혈도의 연장선인 셈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오래된 복사나무가 필사적으로 삶을 이어간 게 맞겠지. 그자 스스로는 아직 모르겠지만.”
계연도 곧바로 해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해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은 여씨 집안 아이이고, 이제는 복사나무 정령까지 발견하다니.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럴 때가 된 듯하군. 계연아, 아무래도 저승에서 골머리 썩던 일과 이번 일이 아주 비슷한 듯하구나.”
“환생 말이죠?”
계연은 담담히 물었으나 그 어조에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이내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도박일 텐데…….”
계연의 말에 해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해치의 목소리가 소매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졌다.
“사실 다 불쌍한 이들이지. 기회를 놓치기 싫었을 테니…….”
계연은 고개를 내려 소매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전부 당신께 먹으라고 넘긴다면요?”
“하하하, 그럼 나야 좋지! 하지만 그리할 테냐?”
그러자 계연이 입을 비죽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뇨.”
“제기랄…….”
해치의 목소리는 세 글자만 전해진 후 계연이 소매를 봉해버렸으므로 뚝 끊겨버렸다.
바로 그때, 계연의 마음이 움직이며 영각(靈覺)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 찰나의 감각을 따라 즉시 점괘를 쳐보니, 동토 운주의 남쪽에서 응약리가 곧 진룡으로 변하려는 듯했다. 아마 그녀가 내내 계연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 계연도 그 감응을 느낀 것 같았다.
“약리가 진룡이 되려 하다니.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지…….”
계연은 감개무량한 기색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생각을 바꿔 곧장 운주로 돌아가기로 정했다.
원래 계연은 먼저 남황에 한번 들르려고 했으나, 현재 그는 흑황과 가까운 바다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남황주와 동토의 운주는 방향이 아예 달랐고, 서로 거리가 아주 요원한 대륙이었다. 먼저 남황에 들렀다가 다시 운주로 돌아간다면 적게 잡아도 반년은 걸릴 것이고, 그리되면 응약리가 진룡이 되는 걸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배후에 있는 인물은 언제 나를 찾아오려나?’
이렇게 생각한 계연은 법력을 끌어올려서 한 줄기 빛으로 변했다. 곧이어 그는 쏜살같이 빠른 속도로 천우주 어느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반나절 뒤, 계연은 자신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커다란 육지 한 조각을 볼 수 있었다. 바로 흑황에 있던 요마들의 동천에서 뚝 떼온 땅이었다.
이 육지의 각 변두리를 각 종파의 보물인 누선(樓船)이 감싸고 있었고, 법산 두 좌중 하나는 육지의 상공에, 다른 하나는 육지의 아래쪽에 떠올라 있었다. 그런 형태에 천우주의 수많은 수선자가 힘을 합쳐 만든 진법과 엄청난 법력을 투입하여, 이 거대한 ‘육주(*陸舟: 육지로 된 배)’를 움직일 수 있었다. 흑황에서 곧장 바다를 넘어 천우주로 가는 길이었으니 속도도 그리 느리지 않았다.
이 ‘육주(陸舟)’로 전에 그들이 이용했던 접인 진법의 통로를 통해 가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이렇게 그들은 천천히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천우주까지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그들이 흑황을 벗어나기 며칠 전, 천우주의 수사들은 사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흑황의 수많은 요마가 자신들을 추격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우려가 우습게도, 요마들은 그들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고인들을 상황을 관찰할 겸 흑황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만요연에서 너무나 많은 도행 높은 요괴들이 죽은 덕분에, 남은 요괴들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와중에도 호시탐탐 빈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선자들이 떠나자 흑황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근거지를 쟁탈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요괴들은 수선자들이 완전히 떠났는지 아닌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이에 천우주 수사들이 남겨둔 매복들과 진법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되었다.
한편, 육주 안에서는 이제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선인들에 의해 요마들에게서 구출되었음을 알게 된 상태였다.
원래 천우주에서 납치되었던 백성들에게 이는 엄청난 위안이자 흥분되는 소식이었다. 많은 이들이 기쁨에 눈물을 흘렸고, 얼른 고향에 돌아가 흩어진 가족들을 찾게 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대로 인축국에서 요마들에 의해 사육되던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가 막막하고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얼마 동안은 소위 선인이라는 이들이 혹시 다른 무리의 요마들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계연은 먼저 도원자와 노염생에게 자신은 곧바로 운주로 돌아가겠다고 전한 후, 홀로 좌무극 일행이 머무는 육주의 어느 성으로 향했다.
* * *
좌무극 사제 세 사람은 여전히 그 낡은 건물에 머물고 있었는데, 계연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뜰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똑똑똑……!
계연은 열려있는 대문을 두드린 다음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그 소리에 문가를 바라보니 계연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보아하니 세 분 대협들께서 술에서 깨신 모양이군요.”
계연이 웃으며 농을 던지자, 이제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은 세 사람이 웃으며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연비는 최근 며칠 동안 아주 빈번했던 선인들의 방문을 떠올리며 이렇게 농담했다.
“과연 선생님의 말씀대로 며칠 동안 저희 세 사람은 평생 만날 선인을 전부 만났지 뭡니까.”
“모두 처한 상황에 따라 생각하는 법이니까요. 만약 계모(某)도 입장 바꿔 그들이었다면 여러분을 찾아왔을 겁니다. 참, 이번에 계모는 곧바로 운주로 돌아갈 예정인데, 만약 세 분께서 원하시면 저와 같이 가시지요.”
그 말에 육승풍이 연비와 좌무극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계 선생님, 건원종의 어느 선장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니, 인축국의 원주민들이 모두 저희 운주로 보내진다지요?”
“맞아요. 하지만 계모 혼자의 힘으로는 그렇게 많은 이들을 데리고 갈 수 없으니, 건원종 도우들께서 그 책임을 맡으신 거죠.”
계연이 설명하자 육승풍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왕 그들이 운주로 간다고들 하고, 어쩌면 저희 대정국으로 갈 확률이 크다고 하니 육모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있으면 원주민들의 걱정을 좀 덜어주고 대정국에 대한 설명도 해줄 수 있으니까요. 물론 무림의 고수들과 학문이 뛰어난 다른 선생들께도 도움을 청할 예정입니다.”
계연은 그제야 육승풍이 지금은 거친 무인처럼 보여도, 한때 ‘운각 군자’라 불리던 무림 세가의 학식이 높은 일원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수선자들은 확실히 그런 일을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했고, 그저 그들을 운주로 데려다줄 생각뿐이었다.
“그것도 좋겠네요. 그럼, 계모가 예전에 대정국 황제였던 이를 보내드릴게요. 그자는 이일에 더욱 세심히 신경을 쓸 테니까요.”
“여기에 대정국 황제가 있습니까?”
계연의 말에 육승풍을 비롯한 세 사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본 계연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거예요.”
“연모도 여기 남아 돕고 싶습니다.”
연비도 짧은 말로 제 뜻을 표했다. 게다가 그는 대정국 황제라는 이에게 무척 호기심을 느꼈다. 대정국에는 신선을 만나는 데 집착하던 황제가 몇 있었으나, 기록상으로는 모두 붕어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