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화. 오래된 이야기
응약리는 계연이 질문을 던질 때까지 기다리려다가, 그의 담담한 모습을 보고는 약간 풀이 죽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진룡이 되는 데 성공하시자 동해의 모든 용족이 축하하러 왔고, 사해(四海)의 용족 중에서도 많이들 찾아왔었대요. 하지만 오직 어머니께서만 오지 않으셨죠. 그때 저와 오라버니는 고작 수십 살에 불과할 때라, 너무 어리고 밖에 나가본 적도 없었거든요.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떠나신 후 치근덕대는 이들이 있을까 봐 멀리 용암도에 살면서 몇 년 동안 임신한 채 지내다가, 홀로 알을 낳고 부화하기를 기다리며 마침내 태어난 저희를 키우고 계셨죠. 그러다 아버지께서 진룡이 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기뻐 매일 같이 춤을 추실 기세였어요. 저와 오라버니에게도 너희 아버지가 진룡이라며 자랑스레 말하곤 하셨죠…….”
이렇게 말하는 응약리의 눈에 뿌연 안개가 차올랐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슬픔으로 인한 눈물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계연은 대체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문밖에 서 있던 세 용이 하늘에 모여드는 물기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응약리가 눈물을 흘리자 통천강 유역의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강물 위에 떠올라 있던 누선에서는 승객들이 하나둘 선실로 들어갔고, 강기슭의 행인들은 발걸음을 서둘렀으며, 나루터에 있던 백성들도 비를 피하려고 다급히 움직였다. 장대비도 가랑비도 아닌 빗물은 옅은 안개를 일으켰고, 강과 선박, 사람들과 주변 건물이 온통 몽롱한 안개비에 휩싸였다.
강물 아래 용궁에서는 응약리가 눈물이 고인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어머니께서는 내내 아버지께서 우리를 찾아오길 기다리셨어요. 하지만 그렇게 1년, 2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버지는 오지 않으셨죠……. 그러자 어머니께서도 마음이 상하셔서 용암도 해역을 아예 봉쇄해버리셨어요.”
“뭐라고?”
깜짝 놀란 계연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네 아버지는 그때까지 뭘 하고 계셨고?”
응약리가 깊이 탄식하며 대답했다.
“용족들의 애정 관계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아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한창 좋았을 때도,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예뻐서’ 좋다고 자주 말씀하셨대요. 그래서 아버지도 두 분의 관계가 끝이 난 것이려니 하고……. 게다가 어떤 용족이 저희 어머니가 수백 년 전에 다른 용을 만나 동해를 떠났고, 그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 알려 주었대요…….”
응약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버지께서는 그 소식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본디 용족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셨대요.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확실히 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하셨대요. 그렇게 그간 쌓은 수행을 다지고 용족들과 관계를 쌓고 진룡의 몸으로 사해를 순찰하면서 어머니를 천천히 잊으신 거죠…….”
“그래서?”
계연이 궁금해하며 묻자 응약리도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다 어느 날 거경 장군과 검은 교룡이 함께 서해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오셨대요. 그들에게서 그동안 어머니께서 황해와 가까운 어느 외진 섬에 내내 머물고 있었으며, 홀로 이교(螭蛟) 두 마리를 낳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즉시 서해에서 돌아오셨다고 해요…….”
이에 계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구나?”
응약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는 절대로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으셨어요. 처음 얼마간 아버지께서는 용암도 밖에서 내내 기다리셨고, 때가 되면 운주로 돌아가 비를 뿌린 뒤에 다시 돌아오셨죠. 그러다 나중에는 일정 시기마다 한 번씩 찾아오셨지만, 존귀한 진룡의 신분에 올 때마다 거절을 당하니 안 그래도 성질이 좀 있는 아버지께서는 마침내 화가 나셨대요. 그렇다고 강하게 나갈 수는 없어서 각종 수를 써 봤지만, 어머니께서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셔서 어떻게든 저와 오라버니라도 끌어내기로 한 거죠…….”
응약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깊이 원망하고 계셨지만, 결국에는 저와 오라버니의 앞날을 위해 저희를 데리고 섬에서 나오셨어요. 그리고는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에 모진 말을 남기고 다시 홀로 용암도로 돌아가셨어요. 저와 오라버니는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와 수행을 시작했고요…….”
응약리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 저와 오라버니는 비록 드러내놓고 아버지를 거역하진 못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미워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애정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마침내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하게 된 계연이 돌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네 어머니가 다른 용과 떠났다고 말한 용족은 지금 어디에 있고?”
그러자 응약리가 코웃음을 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 성격에, 그자들이 어떻게 여태 살아있겠어요!”
응약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계 숙부님, 그래서 약리를 도와주실 건가요?”
계연은 응약리의 눈에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도와주마!”
윤씨 일가와 마찬가지로, 계연은 이 세상에서 응씨 일가 또한 자신과 가장 친밀한 이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어찌 이런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깥의 세 존재가 한참을 서서 기다리니 마침내 응약리의 궁전 대문이 열렸다. 미간을 굳게 찌푸린 채 걸어 나오는 계연의 모습 뒤로, 응약리가 전과 다름없는 자세로 빛을 내뿜으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계연은 다시 한번 응약리를 한번 살펴보고는 문을 닫고 금제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마침내 인내심이 극에 달한 응굉이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 약리가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어째서 진룡에 가까워질수록 기운이 불안정한 것이오?”
계연은 잠시 말없이 응굉과 그의 전처를 살펴보다 다시 늙은 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응굉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가 한때는 응약리의 말대로 곱상한 생김새를 지녔으리라고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찌 그리 빤히 보는 거요?”
늙은 용은 계연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계연이 탄식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휴우! 계모(某)는 언제나 약리가 진룡이 되는 게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우리라고 여겼는데,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물길을 타다가 무슨 착오가 생길 수도 있겠어요. 진룡이 되는 것에 실패하는 건 별일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계연이 말을 얼버무리자 응굉과 응굉의 전처, 응풍의 안색이 대변했다.
“예? 그렇게 위험한 상황입니까?”
응풍이 경악한 얼굴로 묻자, 늙은 용이 엄청난 손아귀 힘으로 계연을 잡아끌더니 재차 물었다.
“계 선생, 그게 정말이오?”
“계모는 그저 혹시 놓친 게 있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에요. 약리도 아마 스스로 느끼는 바가 있어 내내 자신의 수행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간 진룡이 되는 것을 위한 준비를 너무 많이 해왔던 터라, 이제는 물길을 타야 마땅하거늘 계속해서 억누르고만 있으니 점점 더 그 반작용이 심해지는 듯해요.”
계연은 늙은 용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고는 그를 향해 물었다.
“응 선생님께서는 진룡이시니 자연히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선생께서 보시기에는 약리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응굉은 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기에 오히려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고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쥔 채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계연이 응굉의 전처의 반응을 살펴보니, 그녀의 시선도 응약리의 궁전과 응굉 사이를 어지러이 왔다 갔다 했다.
그때, 응굉이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 억누르기만 해서는 안 되오. 지금 당장 물길을 타든가, 백 년간 쌓은 수행을 없애버리고 이번 기회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소.”
“예? 아버지, 그럼 약리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던 응풍이 조급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 강제로 백 년 동안 쌓은 수행을 없애 버린다면, 이번에 진룡이 되는 것만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아예 진룡이 되는 기회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기개가 아예 꺾여버릴 테니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약리는 이미 용심(龍心)을 지니고 있고, 진룡의 이치도 깨달았거늘…….”
응굉의 전처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계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계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신묘한 경지의 진선(眞仙)이시니 분명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으시겠지요? 약리는 이번에 진룡이 되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래도 예전에 제가 고심법(叩心法)으로 약리를 도왔기 때문에, 지금 약리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지금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예요. 휴우……. 물론 저도 최선을 다할 테지만요. 실은 계모도 약리가 진룡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간 쌓은 수행이 아깝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약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 일은 즉시 결론을 낼 수가 없었고 응약리의 방문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그들은 일단 손님인 계연을 위해 용궁 안에 연회 자리를 마련했다.
응굉의 전처는 직접 주방에 들어가 실력을 발휘했고, 계연은 중요한 대화를 나누려는 듯한 늙은 용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용궁 안 어느 곳으로 향하지 않고, 금제를 나와 통천강을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강 주위는 안개비에 몽롱하게 휩싸여 있었다. 계연과 응굉은 새로 만들어진 장원 나루터에서 멀지 않은 강기슭에 서서, 양쪽 나루터를 오가는 사람들과 선박 등 강가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계 선생, 이 늙은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약리가 방에서 혹시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오래도록 말없이 서 있던 응굉이 돌연 내뱉은 말에 놀란 계연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계연은 강가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다가, 느릿느릿 가볍게 물었다.
“이 비가 어째서 내리는지, 응 선생께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늙은 용은 고개를 들어 상공을 뒤덮은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넓게 펼쳐진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마음이 교감하여 내리는 비이니, 약리가 운 것이로군…….”
두 사람 모두 사리분별이 빠르고, 서로에 대해 잘 알다 보니, 계연도 이제 응굉이 얼마간 눈치를 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맞아요, 약리가 울어서 내리는 비입니다. 사실 용궁에서 계모가 한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어요. 예전에 고심법으로 약리가 심관(*心關: 마음에 생긴 고비)을 넘도록 돕고, 진룡이 되려는 의지를 굳건히 다져 용심을 얻도록 해주었죠. 그로 인해 약리가 진룡이 되는 과정은 다른 이들이 진룡이 되는 과정과 달라졌어요. 심경에 더욱 큰 영향을 받게 된 거죠. 그리고 약리는 마음에 내내 커다란 응어리를 품고 있었으니, 그걸 없애지 않으면 진룡이 되는 과정에서 정말로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늙은 용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계연을 바라보더니, 입을 달싹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계 선생, 내가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게다가 나는 진룡이라, 사해의 용족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소…….”
그 말에 계연이 응굉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더욱이 이번 기회를 잡아야지요! 약리가 진룡이 되는 것은 절대 쉬이 볼 일이 아니에요, 제가 방금 한 말도 우스갯소리가 아니고요. 이왕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그럼 잘됐네요. 체면 좀 내려놓으시고 낯가죽을 용 비늘보다 좀 더 두껍게 하시면 되겠어요.”
그 말에 늙은 용은 못마땅한 듯 입가를 씰룩였으나, 사실 적잖이 안심하기도 했다. 최소한 딸에게 정말로 큰 위험이 닥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