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82화 (882/892)

882화. 정양통보

다시 고향에 돌아오니, 양종은 다른 것은 몰라도 양호가 가장 그리웠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그 대견한 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날 오후, 양종은 홀로 어서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자인 양성은 이때 안에서 상주문을 읽었는데, 때마침 여름에서 가을이 되는 간절기인지라 바깥을 지키고 있던 소태감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양종은 어서방 외청(外廳)에 모습을 드러낸 뒤 여전히 졸고 있는 소태감을 힐끗 바라보았다. 곧이어 어서방 안으로 가벼운 바람이 한 줄기 휙 불어왔다. 그는 양성이 근면 성실히 일하고 있는 걸 보고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 한 시진 뒤, 양성은 피곤했는지 뒤에 마련된 낮잠용 탑(*榻: 길고 좁은 평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양종은 양성을 더 관찰하지 않고, 그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어서방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안에 놓인 책상과 의자, 서가(書架)는 그에게도 모두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러다 그는 어안(*御案: 황제가 업무를 처리할 때 쓰는 책상) 한쪽에 놓인 큰 서가의 상부에 시선을 고정했다.

양종이 그쪽을 향해 손짓하자 푸른 비단으로 둘러싸인 상자가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어서방을 청소하는 태감이 게으름을 부렸는지, 상자 윗면에는 회색 먼지가 한 겹 쌓여 있었다. 그 말인즉 이 상자를 만지거나 열어봤던 이가 몇 없거나 아니면 아예 없다는 뜻이었다.

양종이 가볍게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는데 소박하게 꾸며진 서책의 겉표지에는 <야호수>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이름만 봐도 점잖지 못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호(*浩: 양종의 아들이자 전 황제인 양호)의 물건인가 보군…….”

양종은 웃으며 다시 상자를 덮고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으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 책을 꺼내 들었다. 안에 적힌 내용이 정말로 저속한 내용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꺼내든 순간, 책 사이에 책갈피 같은 것이 꽂혀있는 게 느껴져 양종이 그 부분을 활짝 펼쳐보니, 황금빛이 나는 무언가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에 그가 본능적으로 어물법(*御物法: 사물을 옮기는 술법)을 펼쳐서 책갈피를 받치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법력이 듣지 않고 책갈피는 여전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재빨리 손을 뻗어 공중에서 잡아챌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옛날 자신이 황제였을 적에 떨어지는 월병을 잡지 못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다시 고개를 내려보니, 자신이 잡은 것은 책갈피가 아니라 동전 한 닢이었다.

양종이 동전을 들어 자세히 앞뒤를 살펴보니, 위에 ‘정양통보’라는 네 글자가 찍혀 있었다.

“정양통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양종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건 대정국의 화폐가 아닌데, 근처 어느 나라의 황제가 발행한 화폐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양종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활짝 펼쳐진 서책으로 향했다. 첫 번째 줄에는 마침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직이 불안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을 때, 황제께서 사직을 다시 굳건히 세우시고 정양(*正陽: 태양을 뜻함)의 기운으로 혼탁한 기운을 흩어버리시니, 세간의 사람들이 이를 두고 ‘우리 황제께서 바로 정양이시다’라고 평하였다.》

아무래도 이 동전은 양호가 가지고 놀기 위해 스스로 주조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조금 전에 자신의 법력이 듣지 않기도 했었다.

이를 떠올리던 양종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동전을 만지작거리던 양종은 이것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갈지, 아니면 자신이 가지고 갈지 계속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양종은 서책을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잘 닫은 뒤,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는 정양통보를 가지고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기 위해 들고 간 게 아니었다. 양종은 이번에 맡은 일이 끝나면 경기부 저승에 가서 아직 음수(*陰壽: 죽은 이가 저승에서 누리는 수명)를 누리고 있을 양호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 * *

성공적으로 물길을 탄 응약리는 이제 바다 깊은 곳에서 진룡으로 거듭나는 단계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짧은 시간 내에 끝나는 일도 아니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이 걱정하며 뒤따를 필요도 없었다.

그때, 멀리서 건원종 수사들이 이동시키는 육주를 발견한 계연은 황궁에 있던 정양통보에 누군가 손을 댄 것을 느꼈다. 이에 그는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점괘를 치지도, 굳이 옛일에 대한 감상에 젖지도 않고서 곧장 구름을 타고 다시 대정국으로 날아갔다.

수선자들에게 있어 몇 년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지만, 계연은 그래도 집이 그리웠고 대추도 어느새 다 먹은 후였다.

영안현으로 돌아온 계연은 오래 머물지 못할 게 분명했으므로, 누구에게도 자신의 귀환을 알릴 생각 없이 조용히 글이나 좀 쓰며 머물다 갈 생각이었다. 이에 그는 곧장 구름을 타고 천우방으로 날아간 뒤, 자신의 집 대문 앞에 내려섰다. 대문에는 아직도 구리 자물쇠가 걸려있었지만, 그는 안에 조낭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철컥-!

갑작스레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에 안에 앉아 있던 이는 깜짝 놀랐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계연은 곧장 푸른 비단 치마에 명백히 기쁜 기색을 띤 채 이쪽을 바라보는 조낭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낭은 길게 기른 머리 반을 응약리가 준 진주 비녀로 틀어 올리고 반은 늘어뜨린 채로 반쯤 읽은 서책을 들고 앉아 있다가, 계연을 보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돌아오셨군요! 제가 얼른 가서 차를 내올게요.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 남겨둔 잘 익은 대추도 있답니다.”

조낭이 대추나무를 향해 손짓하니, 대추가 후드득 떨어지며 공중에서 방향을 틀며 날아와, 돌 탁자 위에 산처럼 쌓였다.

“그래.”

계연은 웃으며 소매를 휘둘러 <검의첩>과 해치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밖으로 내보낸 뒤, 자연스럽게 탁자 앞에 앉았다.

그러자 곧이어 거안소각의 고요함이 산산이 깨부숴졌다. 작은 글자들은 재잘재잘 쉬지 않고 떠들며 힘들지도 않은지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주방에서는 조낭이 작은 글자들의 활발한 인사에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치가 그려진 두루마리는 자욱한 안개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계연에게 빌붙어 자주 먹을 것을 얻어낼 때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계연의 맞은편에 앉아 앞에 쌓인 대추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하하하……. 계연아, 내가 이러니 얼른 집에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느냐. 집이 그립지 않아도 대추는 가지러 와야지. 이번에는 때맞춰 잘 왔군. 마침 이렇게 많은 대추가 열렸으니 말이야!”

해치는 달고 상큼한 대추를 베어먹으며 나무에 달린 대추들을 살펴보다가, 무성한 이파리 사이 깊은 곳에 숨겨진 붉은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편, 주방에서는 작은 글자들이 조낭을 둘러싼 채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조낭, 조낭, 누가 지금 네 대추를 먹고 있어!”

“그래, 그래! 심지어 어르신께 묻지도 않고 자기가 그냥 집어 먹었어.”

“맞아! 게다가 먹으면서도 시선은 내내 나무만 쳐다보고 있다니까.”

“이제는 화조(*火棗: 붉은 대추, 전설 속의 선과(仙果)로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함)까지 먹고 싶은가 봐!”

주방에 있던 작은 글자들은 이들 사이를 이간질하며 조금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에 있던 해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연에게 말했다.

“계연, 저 쪼그만 놈들이 버릇없게 굴도록 놔둘 참이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계연은 웃으며 조낭이 조금 전까지 읽던 서책의 겉표지를 들춰보다가, <백록수(白鹿羞)>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놀라 눈꺼풀을 다 떨었다. 아무래도 이건 <야호수>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의 서책인 듯했다.

이에 아무렇게나 서책을 펼쳐 살펴보니, 놀랍게도 <백록연>을 재창조한 내용으로, 책은 백약과 주염생의 감정을 중점적으로 서술했으며 노골적인 성애적 표현으로 넘쳐났다. 마디로, 옛날의 양호가 가장 좋아할 만한 부류의 책이었다.

그때, 주방에서 조낭이 찻잔을 올려놓는 소리가 들리자 계연은 얼른 그 서책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놓았다.

조낭이 찻잔을 받쳐 든 채 나와 그것을 돌 탁자 위에 올리며 물었다.

“선생님, 차 드세요. 이분은 누구신지요?”

해치를 살피던 조낭은 이것이 그의 본래 몸이 아니며,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조차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계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해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조낭을 향해 양손을 맞잡더니,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이 몸은 사(謝)씨로, 조낭은 나를 사 선생이라 부르면 되오. 계 선생의 벗이라오.”

이 여인은 그저 그런 수행자가 아니라 진정한 천지영근(*天地靈根: 영과(靈果)를 맺는 초목을 이름)으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와 같은 존재는 요즘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전설로나 전해지는 것이었다.

“아, 사 선생이시군요!”

조낭이 단정한 자태로 만복례를 올리자, 이를 보던 작은 글자들이 기가 막혀 저마다 입을 열었다.

“사 선생은 무슨, 웃기고 앉아 있네.”

“그러니까 말이야. 이자는 그냥 그림일 뿐이야!”

“맞아, 맞아. 고작해야 그림에 그려진 해치지. 사 선생은 무슨 사 선생.”

“맞아! 맨날 어르신에게 빌붙어 먹기만 하면서!”

“염치도 없지!”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 모른다니까!”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러자 해치가 씩 웃더니 은은한 먹빛 속에 떠올라 있는 글자들에게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건 너희 어르신이 대접한 것인데, 네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냐?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계속 얻어먹을 것이다!”

해치가 일부러 한껏 늘어진 어조로 대꾸했다. 계연이 보기에 그의 이런 말투와 표정은 그야말로 ‘매를 버는’ 것이었다.

해치의 말에 거안소각이 작은 글자들의 분노로 단번에 들끓기 시작했다. 원래 근처에 있지 않던 글자들까지 모두 몰려오더니, 탁자 주위를 둘러싼 채 저마다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해치는 이미 글자들의 성질을 훤히 꿰뚫고 있었으므로, 조낭이 따라준 찻잔을 들고는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그가 완전히 자신들의 말을 무시하자 글자들은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한바탕 욕을 쏟아부은 글자들은 점차 안정을 되찾더니, 이내 각자 뜰 안으로 흩어져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이를 지켜보던 계연은 그 순간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바로 그간 자신의 소매 속에서 저들이 이렇게 말싸움을 벌인 적이 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위엄 넘치는 해치 어르신이 뭐하러 저 어린아이들과 힘겨루기를 하세요?”

해치가 차를 마시고는 대추 한 알을 집어먹으며 대꾸했다.

“어린아이들? 계연 네가 저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서 그런다. 그나마 내가 저 골치 아픈 것들을 능히 상대할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지. 가끔 저놈들과 입씨름을 벌이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데 아주 좋거든.”

해치는 저 작은 글자들이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검(劍)’이나 ‘예(銳)’ 같은 글자들은 내뱉는 말이 서슬 퍼렇고 날카로우며, ‘변(變)’은 생기가 넘치고 감정변화가 빨랐다. 그런 연유로 글자들은 모두 저마다 수행의 방향이 달랐다.

“알겠어요, 대추나 많이 드세요. 화조는 꿈도 꾸지 마시고요. 대신에 이 대추는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고는 문방사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간만에 시간이 생긴 김에 도일과 벌였던 논검(論劍)에 대해 기록할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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