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3화. 복사나무
계연이 탁자 위에 백지를 펼치자 뜰 안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해치조차 대추를 최대한 살살 베어먹으며 목을 쭉 늘여 종이를 바라보았다.
계연이 술에 취해 꿈에서 날린 일검은 옥호동천와 불인명왕을 놀라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계연이 꿈속에서 도사연을 죽였으리라고 추측한 해치조차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계연의 소매 속에 있던 해치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 절대로 계연의 원신(元神)이 빠져나가거나 법신이 멀리 떠난 것도 아니었다.
조낭이 서책을 들고 나무 아래 앉자, 여러 글자가 그녀를 둘러싸고 작은 소리로 이번에 어르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조낭은 계연이 남황에서 한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친 것, 위용 넘치는 뇌법(雷法)으로 요마들을 소탕한 것, 술을 마시며 논검을 벌이다 누구도 알지 못한 수로 도사연을 죽인 것 등을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동시에 탁자 앞에 앉은 계연을 바라보며 선생님께서 그런 일을 벌이셨을 때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곤 했다.
계연이 써 내리는 글자는 마치 잔잔한 수면에 닿은 것처럼 섞여들더니, 이내 지면 위로 검은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처음에 보면 글자로 보였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도일과 논검을 벌였던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고 그 속에서는 검의(劍意)가 흘러나오며 술향기가 퍼져나갔다.
우웅-!
넝쿨검이 계연의 등 뒤에서 가볍게 진동하더니 검의가 거안소각 전체를 뒤덮었다. 꿈속에서 도사연을 죽인 사실은, 계연을 제외하면 오직 넝쿨검만이 진정한 의미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뜨고 지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하던 영안현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새 대정국에 새로 도착한 백성들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계연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검서(劍書)에는 신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래봤자 논검에 관한 내용이므로 그리 긴 이야기가 되지 못했고, 관건도 계연이 펼친 최후의 검결(劍訣)에 있었다. 그래서 고작 한 달 반 만에 계연은 내용을 거의 완성할 수 있었다.
해치는 내내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도일과의 논검 중에 네가 날린 마지막 초식은 술에 취해 쓰러져 완성하지 못한 게 아니라, 도사연에게 날린 것이었군.”
* * *
그 시각, 왕유홍은 영안현 밖에 도착해있었다. 그는 이 작은 마을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다행히 계연의 머리카락이 있어 순조롭게 이곳까지 계연의 종적을 찾아올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빈손으로 온 게 아니라 계연의 분부에 따라 시든 혈도(*血桃: 옛날에 천상에 살던 복사나무로 죽은 뒤에는 죽음의 기운을 내뿜음) 나무를 가져온 상태였다.
왕유홍은 처음 영안현에 들어섰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맸지만, 천천히 느껴지는 감각에 따라 천우방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을 걷던 순간, 왕유홍의 눈에 맞은편 어딘가에서 붉은 여우가 이리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에 둘은 골목에 선 채 서로를 마주 보며 상대를 살폈다.
“너, 사람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네.”
호운이 왕유홍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소년에게서 알 수 없는 삿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두렵지는 않았다. 이런 자가 영안현에 와서, 그것도 하필 이 골목을 걷고 있는 걸 보니, 8할은 계 선생님을 찾아온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소란을 일으키진 않을 터였다.
“사람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왕유홍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자 호운이 즉시 뒷발로 땅을 디디고 일어나더니, 앞발 하나는 허리에 척 올리고, 다른 쪽 앞발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긴! 그건 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잖아. 계 선생님을 찾아온 거지? 근데 시기를 잘못 골랐어, 선생님께선 지금 안 계시거든.”
“뭐? 그럴 리가?”
왕유홍은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감응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호운도 거안소각에 가는 길이었으므로 굳이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 게다가 조낭은 분명 알지도 못하는 이를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둘이 거안소각에 이르러보니, 놀랍게도 대문이 살짝 열려있는 게 보였다. 뜰에는 계연이 누군지 모르는 자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계연은 무언가를 쓰고 낯선 이는 대추 알이 그득히 쌓인 옆에서 유유자적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호운의 표정이 조금 전 조낭과 무척 흡사하게 변하더니, 호운은 활짝 웃는 얼굴로 몇 걸음 만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계 선생님, 돌아오셨군요? 언제 오셨어요? 이번에는 얼마나 머무실 생각이세요? 제가 어떤 남자애를 하나 데려왔는데…….”
그러다 호운은 계연이 집중해서 글을 쓰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물음은 옆에 있던 작은 글자들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계연이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보니, 왕유홍이 멍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계연이 아니라 나무 아래 앉은 조낭에게 꽂혀있었다.
왕유홍은 원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계연을 찾아왔는데, 나무 아래 아름다운 자태로 단정히 앉은 조낭을 발견하고는 왠지 모를 강렬한 친밀감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조낭이 마침내 자신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계연은 붓을 정리한 뒤 아직 제자리에 서 있는 왕유홍과 의혹 어린 표정을 짓는 조낭을 바라보았다. 그때 해치가 그보다 한발 먼저 입을 뗐다.
“어이쿠, 왕 낭자 아닌가? 시들었다던 복사나무는 가져왔고?”
왕유홍은 해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듯, 계연과 또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얼른 그들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왕유홍이 계 선생님과 해치 어르신을 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메마른 복사나무를 가져왔는데, 선생님께서 보고자 하시면 지금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선 여우에게 말했다.
“이 뜰 안에 놓으세요. 호운, 문 닫으렴.”
“예!”
호운이 나무 아래 앉은 채 이렇게 대답하자, 유령 같은 형체가 그의 그림자 속에서 떠오르더니 거안소각의 대문 앞으로 둥둥 날아갔다가 다시 호운의 그림자로 돌아와 그 속에 합쳐졌다.
거안소각의 대문은 이미 쾅 하고 닫히며 빗장까지 걸린 후였다.
이는 누가 봐도 호운이 계연의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꼼수였다. 그리고 그의 목적대로, 뜰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 형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계연도 혀를 차며 신기해하더니 내심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유홍도 무의식적으로 붉은 여우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을 정도였다. 조금 전의 술법은 그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계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걸 보니, 아직 둔갑하지 못한 여우라 해도 결코 얕볼 존재가 아닌 듯했다.
곧이어 왕유홍이 소매를 펄럭이자 그 속에서 핏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물항아리만큼 몸통이 굵고 2층 누각만 한 높이의 혈도 나무가 거안소각 뜰 안에 나타났다.
이 혈도 나무는 보아하니 뿌리째 뽑힌 것으로, 이미 나무의 반 정도가 썩어 있었다. 당연히 푸른 잎이나 붉은 꽃도 달리지 않았고 희미한 썩은 내까지 났다.
호운은 코를 움켜쥔 채 조낭 가까이 몸을 숨겼고, 작은 글자들은 공중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윽, 냄새나! 썩은 내!”하고 소리쳤다. 그들이 맡은 것은 후각적인 측면의 냄새가 아니었으므로 반응이 더욱 격렬했다.
계연은 그 자신조차 참을 수 없는 악취를 맡으며 혈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해치를 향해 물었다.
“이런 것도 먹을 수 있으세요?”
그 말에 해치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이따위 걸 먹을 바에야 내 흙을 파먹겠다! 이건 썩어 문드러진 원령(元靈)이니 얼른 불살라버려라!”
계연도 냄새를 견딜 수 없어 하고, 해치조차 입에 대기 싫어하는 걸 보니, 이 혈도(血桃)는 아주 삿된 존재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계연이 법안으로 관찰해보니, 이 복사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라 완전히 부패해버린, 썩은 내 나는 진흙 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오래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인 이 복사나무에서는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는 분명 비범했겠지만, 지금은 쳐다보기조차 싫을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계연이 왕유홍을 향해 물었다.
“이 나무가 혹시 아직 쓸모가 있나요?”
왕유홍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선생님께서 처리하고 싶으신 대로 하셔도 됩니다.”
“음, 하긴, 이걸 다른 데 쓸 생각이 없는 게 좋을 거예요.”
이 복사나무가 정말로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더러운 것을 써야 하는 일이 좋은 목적일 리가 없었다. 설령 악으로 악을 처단하는 데 쓸 수 있다 해도, 계연은 이런 삿된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곧바로 입을 벌려 삼매진화를 내뱉었다.
후우……!
잿빛을 띤 붉은 화염은 썩은 복사나무에 닿자마자 불이 붙더니, 상공으로 3척(약 90cm)넘게 활활 타올랐다. 주위 온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왕유홍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이건 보통 불씨가 아니었으므로, 조금이라도 닿았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터였다.
보는 이마다 꺼리는 썩어버린 복사나무는 삼매진화에 타오르면서도 계연의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을 버텨냈다.
삼매진화는 쓰러뜨리지 못하는 적이 없었고, 대부분은 계연이 없애고자 하는 상대를 순식간에 잿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썩어 부패해버린 데다 원령(元靈)조차 남지 않은 복사나무는 놀랍게도 삼매진화의 불길을 반각(半刻) 넘게 버텨낸 후에야 재가 되었다.
완전히 타버린 복사나무는 미약한 바람에도 바스스 무너져버리는 다른 물질과는 달리, 재가 된 후에도 여전히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무가 삼매진화에 활활 타오르는 걸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계연과 해치는 이때 나무의 모습을 한 잿가루 옆을 거닐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계연과 달리 해치는 아주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하하하하, 정말 흥미롭군! 내 생각보다 이 나무는 훨씬 비범한 존재였어. 이미 죽은 것이 계연의 삼매진화를 이렇게 오래 버티다니.”
계연이 해치를 힐끗 바라보자, 해치가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아, 살아있는 걸 포함해도 이리 오래 버틴 적은 없었지. 아마 이 나무가 살아있었을 때는 영근(*靈根: 영과(靈果)를 맺는 초목을 이름)과 비슷했을 텐데. 휴, 아깝게 됐군…….”
“설마 해치 어르신께서는 이게 무슨 복숭아인지 모르시는 건가요?”
그러자 해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천지가 광활했다고. 알려지지 않은 존재도 부지기수였지. 그러니 내 어찌 다 알 수 있겠느냐? 설마 너는 이게 뭔지 아는 것이냐?”
그러자 계연이 일부러 해치의 말투를 흉내 내며 하하 웃었다.
“어쩌면 반도(*蟠桃: 삼천 년 만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 선경(仙境)에 있다는 복숭아)일 수도 있죠.”
그때, 조낭이 잿더미 옆으로 걸어와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유홍을 힐끗 보고는, 땅에 꿇어앉아 손으로 잿더미를 한 줌 집었다.
“선생님, 이 잿가루를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계연이 조낭 곁으로 다가와 땅에 수그리고 앉아 잿가루를 한 줌 쥐었다. 삼매진화에 타버린 후에는 이전의 썩은 내는 전혀 나지 않았고, 그저 은은한 탄내가 나는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