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84화 (884/892)

884화. 영근의 양분이 된 잿가루와 검진을 연마하는 글자들

“이걸 어디다 쓰려고?”

계연의 물음에 조낭이 환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불에 탄 잿가루 속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말도 있잖아요. 대추나무 아래에 뿌리고 싶어서요.”

그 말에 계연도 흥미가 생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계연이 말과 동시에 왕유홍을 향해 시선을 던지자, 조낭도 왕유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낭자께서는 왕 씨이신가요?”

조낭이 자신을 쳐다보자 왕유홍은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약간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조낭을 향해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낭자께서도 초목의 정령이시고, 도행도 저보다 훨씬 높으시네요. 혹 이 잿가루를…….”

그러자 왕유홍이 재빨리 대답했다.

“낭자께서 원하시면 전부 가져가세요. 이것 말고 다른 곳에 자라는 것들도 많으니, 제가 다 가져와서 계 선생님께 태워달라고 할게요…….”

“감사합니다.”

계연은 생각했다.

‘조낭에게 이리 대단한 능력이 있을 줄이야. 단번에 왕유홍의 정신을 쏙 빼놓고, 저리 고분고분하게 만들다니!’

그나저나 계연은 왕유홍의 말을 통해 자기가 ‘화공(*火工: 불을 때는 직공)’취급을 받은 것 같다고 느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계연과 왕유홍의 동의를 얻은 조낭은 손을 들어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킨 뒤, 아직도 나무 형태로 쌓여 있는 잿가루를 다른 쪽의 대추나무 곁으로 실어 보냈다. 그러자 대추나무 둘레의 지면에 잿가루가 균일한 높이로 쌓였다.

새카만 잿가루는 나무 아래에 쌓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원래의 토양과 비슷한 색깔로 변하더니 더는 바람이 불어도 흩날리지 않게 되었다.

그 장면에서 누구도 특별한 낌새를 감지하진 못했지만, 해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계연을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다시 탁자로 돌아가 계연이 막 집필을 끝낸 <검서>를 살펴보았다.

동시에 뜰 안에서는 호운과 작은 글자들이 의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뭐야? 왕씨 쟤 여인이었어?”

“그럴 리가! 쟤가 어떻게 여인이야, 분명 사내인데.”

“내 생각에도 그래.”

“맞아, 맞아. 그 성질 더러운 소가 다른 건 몰라도 남녀 구별은 귀신같다고.”

“일리 있는 말이네. 어이, 왕씨. 너 그래서 대체 여인이야 사내야?”

“빨리 대답 좀 해봐!”

작은 글자들은 왕유홍에게 날아가 그의 주위를 둘러쌌고, 왕유홍은 이들에게 감히 화를 낼 수 없어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조낭이 다가와 글자들을 쫓아내더니, 왕유홍을 돌 탁자로 데려와 대추 한 줌을 건넸다.

대추를 받아든 왕유홍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대추는 다른 이들에게도 영험한 효능이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일단 맛이 좋은 게 첫째였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는 조금 다른 의의와 효과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대추를 한입 깨물어 맛을 음미하던 왕유홍의 눈에 마침 나무 아래 반쯤 드러누워 입에 대추를 통째로 던져 넣는 붉은 여우가 보였다. 그는 아작아작 대추를 씹어먹더니 잠시 뒤 대추 씨만 깔끔히 뱉고는, 다시 사탕을 먹듯 대추를 통째로 입에 던져넣었다.

“급히 떠날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리 앉으세요. 조낭, 물을 끓여서 이 낭자와 호운에게 차를 내주렴.”

“네.”

조낭이 선뜻 대답한 뒤에 탁자 위에 있던 다기를 들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왕유홍이 도와주겠다며 그녀를 바삐 뒤따라갔다.

원래 왕유홍은 메말라버린 복사나무를 건네고, 계연이 허락만 해준다면 일각도 머물지 않고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낭을 본 후에는 오히려 계연이 자신을 쫓아낼까 내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더 머물 수 있게 되자, 그는 얼른 조낭과 친해지고 싶어서 조바심을 냈다.

뜰에 있던 계연은 자신이 막 끝낸 <검서>를 바라보다, 느긋하게 누워 글자들과 수다를 떨던 호운에게 시선을 던졌다.

“호운, 조낭이 보던 <백록수>, 대체 누가 준 건지 아느냐?”

“컥! 켁켁…….”

호운은 대추 씨에 남은 즙을 빨아 먹다가 계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씨가 목에 걸린 듯했다. 곧이어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계 선생님, 그건 저와는 정말로 관련이 없는 일이에요! 작년 연말에 손아아가 명절을 쇠기 위해 영안현에 돌아왔다가, 조낭을 데리고 함께 묘회(*廟會: 옛날, 잿날 또는 일정한 날에 절 안이나 절 부근에 임시로 설치하던 시장)에 갔었거든요. 근데 돌아왔을 때는 책이 가득 든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어요. 아마 그 상자 안에 있던 책인 것 같아요.”

호운은 이래 봬도 한때 윤청과 함께 책을 읽었던지라, 계 선생님이 말하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알았다. 그러니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해명했다.

“선생님, 안 그래도 제가 그런 책들이 풍속을 해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조낭이 그저 알았다고만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백록 어쩌고 하는 책은 저도 조낭이 언제 얻은 건지 정말 몰라요…….”

‘이게 처음이 아니라고?’

계연은 대체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그 자신도 뭐라고 혼낼 처지가 아닌 것 같았다. 지난 생에 그도 성인 소설 같은 걸 읽은 적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보면 조낭이 읽은 책은 고작해야 조금 노골적인 표현의 연정 소설인 셈이었다.

아마 자신도 여기에 와서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이에 계연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선악에 대한 개념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그가 가르칠 만한 자격이 없었다. 게다가 조낭은 그간 거안소각에 머물며 여러 성현의 책도 읽었던 바가 있었다.

“됐다. 고작해야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니.”

계연은 <검서>가 적힌 백지를 들어 올리더니, 대추나무로 손을 뻗어 가지 하나를 꺾어왔다. 그가 그것을 가볍게 쓰다듬자 윤기가 나는 나무 막대 두 개로 변했고, 계연은 백지 양 끝에 나무 막대를 놓고 종이로 살짝 말았다. 그렇게 해서 <검서>는 이로써 간단히 표구된 셈이었다.

그가 검서를 나무 위에 걸어놓자, 뜰 안에는 바람이 부는 데도 두루마리는 쇠로 만들어진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검의첩>의 작은 글자들이 주위에 몰려와 <검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계연의 등 뒤에 있던 넝쿨검도 <검서> 앞으로 날아와 조용히 떠 있었다.

“너희 모두 진법의 도(道)에 대한 깨달음은 이미 충분하니, 오늘부터는 놀 시간에 검진(劍陣)을 연구해 보도록 하렴. 이 검술을 그 안에 녹여낼 수 있는지도 한번 보고. 잘하는 이에겐 상을 주겠다!”

계연이 어린아이를 어르듯 이렇게 말하자, 글자들이 하나둘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반드시 자기가 상을 받을 거라며 서로 입씨름하기 시작했다.

이내 계연이 넝쿨검을 향해 손짓하자 선검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계연은 검신(劍身)과 그 위에 감긴 넝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저 아이들과 같이 연구해 보렴. 후에 네가 진안(*陣眼: 진법의 핵)이 되어 진법을 통제한다면, 그 검진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겠지!”

우웅……!

넝쿨검이 살짝 진동하자 검의가 치솟았고 그 모습이 드러날 듯 말 듯했다.

해치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넝쿨검의 날카로움과 계연의 검술, 글자들이 포진하며 만들어내는 변화를 떠올렸다. 이는 하나하나 전부 살아있는 것들이므로 결코 일반적 의미의 진법이 아니었고, 그 변화는 예측할 수 없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검진(劍陣)은 어느 진인이나 수사가 쓰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니 이 진법은 최소 진선 이상, 높은 확률로 그보다 더 대단한 인물에게 쓰일 목적인 게 분명했다.

“계연, 이 검진이 완성되면, 어느 진인이나 수사가 쓰더라도 여느 천지를 능히 봉쇄할 만한 힘을 지닐 것이다.”

해치의 말에 계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듣고 있던 호운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왜 진인이나 수사여야 해요? 예를 들어…… 저는 안 되나요?”

호운이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해치가 위아래로 그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넌 안 된다.”

“왜요? 제가 선인이 아니어서요? 하지만 저도 정도(正道)를 닦는 요족인데요!”

호운은 작은 글자들에게서 계연이 뇌법을 이용하여 천겁을 내린 일을 들었을 때 피가 온통 뜨겁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이때 대단한 검진에 대해 들은 데다, 사 선생이 이 검진을 다른 누군가에게 쓰도록 할 것처럼 보이자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고개를 든 것이다.

호운은 언젠가 자신이 만요연과 비슷한, 사악한 요마들이 운집한 장소에서 검진을 펼치는 장면을 떠올리며, 자신이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압도적인 모습일까를 상상해보았다.

해치는 호운에게 다가가 고개를 가까이 내리고는 희디흰 치아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돌멩이도 아니고, 그저 던지면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너는 일단 그럴 만한 법력이 없어. 설령 넝쿨검이 너를 싫어하지 않고, 네가 자신을 손에 쥐도록 허락하더라도, 과연 네가 그것을 뽑을 수 있을까?”

그러자 호운이 충분한 근거를 대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넝쿨검은 스스로 검집에서 나올 수 있으니 제가 뽑을 필요가 없어요. 글자들도 저랑 친하니 알아서 움직일 거고요. 제가 나설 필요가 없을걸요!”

그러자 해치는 자신이 쇠귀에 경을 읽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법을 펼치는 이의 법력도 필요하다. 정말로 말 한마디면 될 줄 아느냐? 검진과 서로 어우러지는 취영법(*聚靈法: 천지의 영기를 모으는 술법)을 할 줄 안다면 또 모를까. 그렇다면 검진의 힘을 3할 정도는 발휘할 수 있겠군.”

그러자 호운이 문득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더욱 수행에 정진해야겠어요. 겨우 3할의 힘만 발휘할 수 있다니, 이왕 쓰려면 모든 힘을 발휘해야지요!”

그 말에 해치가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아무리 수행에 정진한다 해도 너는 많아 봐야 진법이 지닌 힘의 반만 쓸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계연이 너를 가르쳐준대도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거다. 오직 계연의 손에서만 검진이 모든 힘, 혹은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

호운이 무의식적으로 계연을 힐끗 쳐다보니, 그는 탁자 위의 문방사우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해치의 말에 반박할 낌새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호운은 조금 기가 죽었다.

그때, 돌연 계연이 이렇게 말했다.

“호운, 사 선생더러 너를 가르쳐달라고 해라. 저자가 나보다 요족(妖族)의 수행에 대해 더 잘 안단다.”

호운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해치를 살폈다. 상대에게서는 아주 미약한 법력이 느껴졌다.

“저자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에도 해치는 조금도 성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못 믿는다 쳐도, 계연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우패천이나 육 산군처럼 일찍이 자신의 길을 깨달은 요괴에게는 내 가르침이 별다른 소용이 없겠지만, 너같이 조그만 놈은, 흥……. 그런데 내가 뭐 하러 너를 돕지?”

사실 호운은 아직 둔갑만 하지 못한 상태일 뿐, 수행이 얕은 건 아니었고 나름대로 배울 만한 점도 있었다. 게다가 호운이 지닌 요력(妖力)은 무척 순수했다. 하지만 해치로서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요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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