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85화 (885/892)

885화. 호운의 사부

호운은 사리에 밝고 머리도 잘 굴러갔으므로, 작은 글자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마음에 새기며 해치의 말을 반박하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풍성한 꼬리털 사이에서 금덩이 몇 개를 꺼내 들며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는 돈이 있어요. 이걸 받으시면 더는 계 선생님께 얻어먹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사서 드실 수 있으실 거예요.”

“너 이놈…….”

해치는 손가락으로 호운을 가리킨 채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그렇게 겨우 몇 글자 내뱉고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당당한 상고의 신수인 해치 님이다……!

그 상태로 있던 해치는 한참 뒤, 이내 호운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물었다.

“고작 이게 다냐?”

그러자 호운이 꼬리를 뒤적이다가 자그마한 금 부스러기 몇 개를 더 찾아냈다.

“아직 더 있어요!”

해치는 호운의 앞발에 들린 금덩이들을 휙 낚아챘다. 그저 입 몇 번 털면 되는 일인데 받지 못할 게 무어냐 싶었다.

“거래 성사다!”

그러자 필묵을 정리하던 계연이 살짝 놀랐다. 원래는 자신이 몇 마디 도와주어야 할 줄 알았는데, 호운 저 영리한 아이가 고작 금덩이 몇 개로 해치를 낚아버린 것이다.

해치는 웃으며 탁자 근처로 걸어가 계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더니, 그리 작지 않은 금덩이 두 개를 자못 호탕하게 내밀었다. 눈으로 봐도 족히 10냥은 되어 보였다.

“계연아, 네게 빌려 갔던 돈이다. 이자도 두둑이 쳤다.”

금액이 척 봐도 지나치게 많았지만, 해치가 자세히 계산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계연도 별말 없이 금덩이를 받았다.

* * *

대정국에 새로 편입된 천만 명의 백성들은 이미 각지로 나뉘어 보내졌는데, 대부분은 따로 작은 마을을 이루었으나 도시에 살게 된 이들도 있었다.

이는 대정국이 이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건물을 지어 도시를 만든 게 아니라, 육주에 있던 건물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육주 자체는 흙이 되어 흩어졌지만, 그 위의 건물은 그대로 남겨져 대정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천만 명의 백성들도 맨손으로 온 건 아니었다. 가정마다 따로 저축해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대정국 관원들이 원래 예상하던 것보다 식량이 훨씬 적게 들었고, 심지어 넉넉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들이 가져온 새로운 종자는 수요가 아주 높았다. 대정국 각지의 상단들은 모두 이에 흥미를 보였고, 화물을 운송할 때는 관아의 감독 아래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종자들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새로운 백성들이 처음으로 얻게 된 수익이 되었다.

“자자, 어서 와서 구경하십시오! 천외(*天外: 하늘 밖, 매우 높고 먼 곳)에서 생산된 고구마라는 것입니다, 무척 신선합니다!”

영안현 시정에서도 어느 행상인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길가는 동네 이웃분들, 어르신들, 모두 와서 보고 가십시오! 아주 맛있고 재배하기도 쉽습니다! 용도도 다양합니다!”

대정국이 새 백성들을 받아들인 소식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백성들은 그들을 천외비민(*天外飛民: 멀리서 날아온 사람들)이라 불렀다.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억하기 쉽게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장삿속을 지닌 상인들은 더욱이 그들에게서 받아온 물건을 천외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는 그저 과장된 말일 뿐 당연히 속임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 행상인은 영안현에 처음으로 이 천외의 물건들을 싣고 온 자였다. 이에 백성들은 저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상인에게 몰려들었다.

상인이 끌고 온 화물 마차에는 토란 같은 것이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토란처럼 겉껍질이 거칠지는 않았고 불그스름한 색을 띠었으며, 흙이 묻어있어도 토란보다 매끄러워 보였다.

“자자, 여러분, 이게 바로 고구마라는 것입니다. 천외비민들이 가져온 그들의 주식이지요.”

“오, 이게 정말 맛이 있소?”

누군가 이렇게 묻자, 상인이 하하 웃으며 고구마를 하나 집어 들더니, 손톱만 한 크기로 잘게 조각내 질문한 이에게 건넸다.

“여기, 어서 드셔 보십시오. 이건 생으로 먹어도 물기가 많고 달콤한데, 또 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쪄먹으면 맛이 더 좋지요. 어서 다들 한입씩 드셔 보십시오!”

사람들은 고구마를 한 조각씩 받아 얼른 맛보았다. 그러자 적잖은 이들이 맛이 정말 괜찮다며 감탄했고, 상인에게 조금만 더 달라고 한 이도 있었으나 아쉽게도 더 얻지는 못했다.

“제가 짜게 군다고 너무 타박하지 마십시오, 이 고구마라는 게 정말로 비싸서 말입니다. 제가 살 때도 적잖은 값을 주고 겨우 샀거든요. 모두 집에 조금씩 사 가신 다음 한번 쪄먹어 보십시오,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물론 사가신 걸 전부 쪄먹진 마시고 좀 남겨두시고요!”

“이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은 것이오?”

구경꾼 중 하나가 이렇게 묻자, 행상인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드시고 싶은 대로 드셔도 됩니다, 배가 너무 부르거나 목이 막히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제 말은, 조금 남겨놨다가 직접 심으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에 어느 농부가 눈을 반짝 빛내더니 채 뭐라 묻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가격을 물었다.

“한 근에 얼마인가?”

그러자 상인이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5문(文)?”

“5문이라니요, 한 근에 50문이란 뜻입니다!”

“뭐요?”

가격을 듣고 놀란 백성들은 아래턱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리 비싸다고? 토란은 이것보다 훨씬 싼데!”

“내 말이! 대체 무슨 작물이 한 근에 50문이나 한단 말인가? 너무 비싸네!”

“맞아요, 이리 비싼데 누가 사나요?”

그러자 행상인이 다급히 나서서 해명했다.

“제가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 게 아니라, 천외비민이 사는 곳에서부터 이미 비싸게 사 온 것이라 그렇습니다. 저도 힘들게 고생해서 가져온 것인데,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맛도 볼 겸 사 가셔서, 조금 남기신 다음 심으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 말에 나이 든 농부가 얼른 물었다.

“재배하기 쉬운가? 손이 많이 가진 않고?”

“그럼요, 아주 잘 자랍니다. 흙에 심고 때때로 물만 주면 금방 주렁주렁 달립니다. 넝쿨은 돼지에게 먹여도 되는데, 평소 먹이는 꼴풀보다 훨씬 낫습니다…….”

“설마 우릴 속이는 건 아니겠지?”

“어찌 감히요! 이건 관아에도 등록된 거래이고, 아무 행상에게나 파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거짓을 말한 거라면, 관아에 저를 신고하셔도 좋습니다! 게다가 여기는 문사(文士)들의 고향인 영안현이고, 적잖은 문인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니 여기 계신 분 중에 어느 분이 관리 나리와 친척일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관아에서 발행한 서류입니다.”

행상인이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대답하더니, 관아에서 발행한 서류를 보여주었다. 자신이 가격을 조금 높게 불렀을지는 모르나, 가져온 물건이 진짜배기라는 건 천외비민들을 담당하는 관원이 보증하는 바였다.

“좋네, 그럼 한…… 아니, 두 근 사겠네!”

“나는 세 근 사겠소. 대신 이걸 어떻게 재배하는지 한 번 더 알려주시오.”

“예, 예, 그럼요. 당연하지요!”

의혹이 풀리자 곧바로 거래가 하나둘 이어졌다.

“열 근만 주세요. 가져가서 한번 쪄 먹어 보려고요.”

한 소년이 이렇게 말하며 통쾌하게 당오통보 한 꿰미를 내밀었다. 그러자 행상인이 활짝 웃으며 돈을 받고는 마대값은 따로 받지 않고 고구마 열 근을 담아주었다.

잠시 후, 환술로 소년의 모습을 했던 호운이 거안소각에 돌아오더니 자신이 사 온 물건을 자랑스레 과시하며 말했다.

“계 선생님, 사부님, 조낭, 제가 희귀한 걸 사 왔어요. 고구마라는 거래요!”

호운은 마대를 든 채 대문을 닫고는 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계연이 살펴보니, 지난 생의 고구마와 같았다. 전에 요마들의 동천에서 고구마를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 잘 팔릴 줄은 자신도 몰랐다.

고구마가 영안현까지 들어오다니, 이는 새로 도착한 백성들이 대정국에 잘 스며들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단 며칠 사이에, 호운이 해치를 부르는 호칭은 사 선생에서 이미 사부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호운은 해치를 그저 사 선생님이라 부르려고 했었다. 내심 언젠가는 계 선생님이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계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해치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때 호운은 흥이 난 얼굴로 뛰어와 손에 든 마대에서 고구마를 몇 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생으로 먹어도 맛있는데, 쪄 먹으면 더 맛있대요!”

마대는 무척 컸기 때문에 고구마 열 근이 들었어도 아주 넉넉했다.

“구워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일부는 찌고, 일부는 밥을 한 다음에 아궁이에 남은 땔감에 구워 먹자꾸나.”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거안소각의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호운이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문틈이 살짝 열려있었는데, 그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걸 보니 누군가 밖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그 순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들어오세요.”

계연의 말에 바깥에 서 있던 이가 가볍게 문을 밀어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이는 양종과 노소유였는데,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계연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양종.”

“노소유.”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여러 도우께도 인사 올립니다!”

두 사람은 계연을 빼면 이 뜰 안에 있는 이들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계연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노 선생님에 비하면 두 분은 확실히 더 예의를 중시하시는군요. 어서 예를 거두시고 들어와 앉으세요. 안 그래도 마침 고구마를 쪄 먹으려고 했거든요.”

뜰 안에는 돌 탁자 둘레에 놓인 돌의자 네 개 말고도 대나무로 된 의자나 나무로 된 걸상도 있어, 모두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양종과 노소유는 계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사양하지 않고 다가와 스스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이 탁자 위의 고구마에 떨어졌다.

“계 선생님의 거처에도 고구마가 다 있군요. 보아하니 우리 대정국의 일 처리 효율이 전보다 훨씬 빨라진 모양입니다.”

양종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 호운이 조심스레 그를 탐색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성함이 양종이세요? 대정국 전전 황제의 이름과 같으시네요.”

그러자 양종이 마대를 들고 선 소년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도우께 웃음거리가 되겠군요. 제가 바로 그자입니다.”

이 소년은 환술을 쓴 모양이었는데, 양종으로서는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기운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영기로 인한 은은한 빛이 보일 듯 말 듯 한 걸 보니 절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황제세요?”

그러자 호운의 머리 위 몇 척(尺) 높이에서 <검서>를 둘러싸고 있던 작은 글자들 중 몇몇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이렇게 대신 대답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양종이야.”

“맞아, 저 사람이야.”

“그 원덕제 말이야.”

“맞아!”

“이제는 노 선생님의 제자이지.”

양종과 노소유가 고개를 들어보니, 작은 글자들과 그들이 둘러싼 빽빽한 글씨가 적힌 두루마리가 보였다. 그 내용은 먹빛에 의해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계 선생님의 술법을 엿보게 될까 두려워 이들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