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화. 조낭의 선물
해치는 곧이어 다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화제를 바꿔 물었다.
“내 호운이 하는 양을 보니 옥호동천의 구미호들과 그 양식이 비슷하던데, 내가 그놈을 도와서 방향을 좀 바꿔줄까?”
그러자 게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호운에게 마음 써주시는 거로 족해요. 다른 건 저도 관여치 않으려고요. 그저 해치 어르신의 위명에 먹칠하지 않는 정도면 됩니다.”
“하하하하, 화룡연(*진룡이 되는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 날 데리고 가는 것 잊으면 안 된다.”
그러자 계연이 입을 씰룩였다. 그는 해치의 저 걸신들린 듯한 언행을 마주할 때마다 조롱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이 정말 도철(*饕餮: 전설에 나오는 흉악하고 먹는 것을 탐하는 야수)이 아니라 해치라고요?”
계연은 이렇게 비꼰 뒤 조낭을 바라보았다.
“조낭.”
“네?”
“약리가 진룡이 되는 것에 성공했으니, 너도 약리의 친우로서 마땅히 함께 가서 축하하는 게 좋겠구나. 통천강에서 사해(四海)에 초대장을 보내면, 너도 나와 함께 가자. 이참에 호운도 데리고 나가서 견문을 좀 넓혀줘야지.”
“네, 선생님께서 가자고 하시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정국은 그리 넓지 않으니, 가끔 나가서 돌아다녀도 네게 좋은 점이 있을 거란다. 그러다 보면 볼만한 책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겠지.”
“네……. 그런데 선생님, 제가 약리에게 무슨 선물을 주어야 할까요? 약리는 제게 귀중한 걸 많이 주었는데…….”
“아, 약리가 네게 준 것들은 사실 약리에게는 별것 아닌 것들일 거야.”
“하지만 제게는 아주 귀중한 것들이에요. 예쁘기도 하고요.”
조낭은 자신의 머리 위에 꽂힌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위에 달린 수정은 무척이나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조밖에는 갖다 줄 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화조는 사실 아직 익지 않은 것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귀할지 몰라도 진룡이 되는 것에 성공해 진룡이 된 약리에게는 별다른 효능이 없을 것이었다.
조낭이 고심하는 모습을 본 계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대추나무를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게 아직 제련한 잠사(*蠶絲: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가 좀 남아있는데 그건 금령(金靈)의 기운을 지닌 보물이란다. 대추나무 가지로 부챗살을 만들고, 잠사로 화려한 무늬의 직물을 짜서 그 위에 붙여 접선(*摺扇: 쥘부채)을 만들면 약리도 아주 좋아할 거야.”
“정말요? 약리가 좋아할까요? 선생님, 그럼 부채를 아예 제련하면 어떨까요? 전에 선생님께서 쓰신 <묘화천서>를 저도 본 적이 있거든요.”
조낭이 그제야 기쁘고 안심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별달리 좋은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지닌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서책과 응약리가 준 장신구뿐이었다. 하지만 서책은 약리도 부족하지 않을 테고, 자신이 가진 장신구는 모두 그녀가 준 것이니, 그대로 돌려주는 것은 분명 적절치 않은 처사였다.
계연은 미처 그 점을 떠올리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대추나무는 그간 자신이 글을 쓰고 술법을 연구하는 모습을 전부 다 봐왔을 터였다.
“좋지. 나는 옆에서 보기만 할 테니 네가 직접 해보렴.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진심이 담긴 선물이라면, 굳이 특별한 게 아니라 해도 약리는 분명 좋아할 테니까. 더욱이 이 부채에는 네 정성이 들어갈 테니 말이야.”
해치는 듣기만 해도 자신도 그 부채를 갖고 놀고 싶어졌다. 게다가 제련까지 한다면 무슨 신묘한 쓰임새가 깃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물건을 선물해 준다면 누구든 기뻐하면서 받지 않겠느냐? 조낭이 이리 대단한 선물을 준비하는데, 계연 너는 무얼 줄 생각이냐?”
그러자 계연이 해치를 바라보더니 퍽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약리의 부모 사이를 제가 화해시켰는데 그 정도면 선물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러니 제 서화를 한 폭 선물하려고요.”
“하하…….”
그 말에 해치는 한껏 비웃으며 인색하게 군다며 계연을 면박하려다가, 돌연 마음을 바꿔먹었다. 계연의 친필 서화는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자신도 갖고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선생님, 언제 시작할까요?”
“호운이 고구마를 사서 돌아오면, 배불리 먹고 난 뒤 시작하자.”
“네!”
이날 저녁, 마음껏 고구마를 먹던 호운은 조낭이 응약리에게 선물로 부채를 만들어줄 생각이라는 것과 자신도 화룡연에 참석하게 되리라는 걸 듣게 되었다. 이에 잔뜩 흥분한 호운은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붉은 여우 가면을 예시로 들며 자신도 도울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렇게 그들은 대추나무 가지를 꺾어 부챗살을 만들고, 그 위에 붙일 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호운은 더욱이 밖으로 나가 여인네들이 부채와 서생들이 쓰는 접선을 사와서 약리가 어떤 것을 더 좋아할지 연구했다. 그러다 결국 계연이 맨 처음 제안한 접선이 더욱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채가 조금 단조로워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계연과 해치는 정말로 옆에 앉아 보기만 했고, 한마디 조언조차 하지 않았다. 해치는 계연이 느긋하기도 하다며 혀를 찼고, 계연은 웃으며 해치가 점점 더 말이 많아진다며 받아쳤다.
“조낭, 부챗살은 다 만들어졌어. 그런데 부채 면이 조금 심심한 것 같아.”
대추나무 아래에서 환술로 사람의 모습을 한 호운은 조낭이 직접 잠사를 이용해 손으로 짠 직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계연도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확실히 심심하고 텅 빈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만약 조낭이 자신에게 글이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미 생각해뒀어.”
조낭이 웃으며 등 뒤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았다. 정령인 그녀의 육체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체를 지니고 있어 더욱 영근목의 정령다웠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서 머리카락이 두둑, 끊어지더니 그녀의 손을 따라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런 뒤 조낭은 틀어 올린 머리 사이에서 바늘 하나를 꺼내어 구멍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통과시켰다.
“그 위에 자수를 놓을 거거든.”
호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왜 자신은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아쉬워했다. 그는 원래 계 선생님께 그 위에 묵보(*墨寶: 남의 글씨나 그림을 높여 이르는 말)를 남겨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실은 계연도 그 방법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때 조낭의 말을 듣고 아주 기발한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조낭이 진지하게 수를 놓는 모습을 살펴보니, 처음 바늘을 잡는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하루하루 흐르고, 마침내 조낭이 계연에게 이렇게 부탁해왔다.
“선생님, 삼매진화를 잠시만 빌릴 수 있을까요? 너무 많이는 필요 없고, 아주 약한 불씨와 연기 한 줄기 정도만요. 강약은 일정하게요.”
“그럼!”
이내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벌려 홍회색(紅灰色) 연기를 한 줄기 뿜어냈다.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불씨가 섞여 있어, 조낭 근처의 공중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낭은 그 곁에서 완성된 부챗살을 들고, 수놓은 직물을 그 위에 붙이면서 때때로 불꽃에 대고 부채를 부쳤다. 그러자 바람을 타고 불씨가 흩날렸고, 그 박자에 따라 부채 위에서는 각양각색의 빛이 났다.
“보아하니 나도 이제 슬슬 선물을 준비해야겠구나.”
계연은 머릿속의 생각만으로 삼매진화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두드리며 문방사우를 준비하고는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응풍이 거안소각을 찾아왔다. 대문 앞에는 여전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안에서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풍이구나? 들어오거라.”
“계 숙부님. 약리는 아직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화룡연 준비는 벌써 시작된 상태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사해의 용족을 접대하시느라 바쁘셔서, 이 조카가 약리를 대신해 직접 숙부님을 모셔가려고 찾아왔습니다.”
저절로 열린 대문 앞에서 응풍은 공손히 예를 올린 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호운이 즉시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등 뒤의 대추나무를 가리고 섰다.
사실 호운은 무언가를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이 크지 않았지만, 각기 6, 7척(약 180~210cm)은 되는 풍성한 세 개의 꼬리 덕에 그나마 등 뒤의 비밀을 가릴 수 있었다.
응풍은 그 뒤의 상황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으므로, 무언가를 적고 있던 계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가 말했다.
“계 숙부님. 약리가 무척 빨리 진룡이 된 편이라, 연회는 섣달 그믐밤으로 정해졌습니다.”
“알겠다. 내가 몇 명 더 데려가도 괜찮겠지?”
“계 숙부님께서 데려오고 싶은 손님이 있으시면 몇 명이든 전부 괜찮습니다.”
응풍이 이렇게 말하며 호운이 막고 선 곳을 바라보니, 조낭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게 보였고 그곳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지 마세요! 보면 안 돼요!”
호운이 큰 소리로 면박을 주자 응풍이 어색한 얼굴로 계연에게 가까이 붙으려고 했다. 하지만 계연도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이것도 보여줄 수 없겠구나. 바쁜 일 있으면 먼저 가보렴.”
“아, 예. 그럼 조카는 옥회산에 방문해 초청의 뜻을 전해야겠군요. 그럼, 숙부님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응풍은 다시 예를 올린 뒤 약간 낙담한 기색으로 거안소각을 떠났다. 그러자 뜰 안에 있던 계연은 다시 응풍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더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런 상태가 이어지면 될수록 응풍에게는 더욱 좋지 않을 것이다. 이에 계연은 자신이 웃어른으로서 좀 이끌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계연은 일찍이 자신의 서화를 완성한 상태였으나 조낭은 여전히 부채를 제련하고 있었다.
이날, 비검(飛劍) 한 자루가 먼 하늘에서 날아오더니 영안현 상공에서 멈춘 채 빙빙 돌았다. 계연이 조낭이 여전히 온 정신을 집중해 부채를 제련하는 걸 보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거안소각의 대추나무와 편액을 핵심으로 한 특수한 경계의 천지에 구멍이 하나 뚫렸다.
하늘에 있던 비검은 그것을 감지한 순간, 즉시 한 줄기 흐르는 빛줄기가 되어 계연의 손을 향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작은 글자들과 함께 <검서>를 둘러싸고 공중에 떠올라 있던 넝쿨검이 검신(劍身)을 휙 돌렸으나, 그저 비검 한 자루인 걸 보고는 다시 신경을 껐다.
“천기각에서 온 것이군?”
이 목소리는 이미 그림으로 돌아간 해치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계연이 그림에 남긴 법력은 해치에 의해 전부 고갈되었으므로, 그는 자연스레 더는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자 계연이 해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비검에 담긴 신의(神意)를 느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 같네요…….”
천기각에는 여러 장수옹이 있었고 천기륜도 지니고 있으니, 설령 진정한 배후 인물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몇 가지 단서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계연 자신도 의식 세계 속에서 상대가 바둑돌을 내려놓는 걸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 양측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상태였다.
‘아직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서 그런가?’
천우주의 난이 가라앉은 뒤 수사들이 흑황을 대대적으로 토벌한 것은 천하를 뒤흔들 만큼 어마어마한 소식이었다. 물론 상대가 더욱 큰 규모의 음모를 짜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계연은 언제든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게 모든 소식에 주의를 기울였고, 동시에 자신이 구상한 바를 한 단계씩 추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