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88화 (888/892)

888화. 연회에 참석하다

“계연아, 변화술로 내게 법력 좀 빌려주거라. 이 상태로는 뭘 해도 불편하단 말이다.”

계연은 비검에 자신의 신의를 남긴 다음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고는, 그것이 희미한 형체가 되어 사라진 후에야 시선을 뗐다.

“계연아! 계연! 휴우, 화룡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상태로 어찌 연회에 참석하란 말이냐?”

해치의 감정이 격해지자 두루마리 위로 심상찮은 기운이 담긴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 연기는 계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 안 가면 되잖아요? 제가 데려가려는 건 어차피 조낭과 호운이었어요.”

계연은 이렇게 대꾸하며 자신이 쓴 글씨를 돌돌 말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해치는 마음이 조급해져, 조낭이 하는 양을 진지하게 보고 있던 호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흠, 큼, 큼…….”

그러자 호운은 귀를 쫑긋대더니 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호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계 선생님, 저어, 사부님께서는 앞으로도 제게 가르침을 주셔야 하는데, 저 상태로는 조금 불편하실 텐데요…….”

그러자 계연이 호운과 해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해치가 그려진 그림을 향해 손을 뻗어 변화술을 펼쳤다.

곧이어 해치의 그림 위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두루마리가 탁자 옆으로 날아가 생생하기 그지없는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우아하고 온화한 서생이라기보다는 기세가 비범하고 헌걸찬 강호의 협객처럼 보였다.

“오오오! 하하하하, 이번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쯧쯧, 이번에는 정말 살아있는 사람 같군. 안 그래도 지난번에 내가 네게 술법을 대충 부렸다고 말했었잖느냐…….”

해치는 이렇게 말한 뒤 무언가를 씹듯이 턱을 움직여 이를 맞부딪혀보았다. 그 생생한 감각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해치는 호운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자, 이 사부가 네게 진짜 중요한 걸 알려주마. 요즘 요괴들은 전부 하나같이 풋내기들뿐이거든. 요기(妖氣)로 겁을 주고 요력(妖力)이 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그러자 호운이 눈을 빛내더니 얼른 탁자 곁으로 다가왔다.

“어서 말씀해주세요!”

“하하, 네 요기는 아주 바르고 요력도 순수한 데다 자신만의 길도 닦은 상태지만, 아직 수행의 정수를 깨닫지는 못한 상태지. 요괴에게 있어, 요기와 요력은 또 다른 자신과 같다. 그리고 강력한 염력(念力)이 있어야만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지. 예를 들면, 두려워하라(懾)!”

해치의 말이 떨어지자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폭발하더니, 귓가가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태곳적의 분노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크르릉……!

계연은 해치가 “예를 들면.”이라고 할 때부터 이미 재빠르게 소매를 휘둘러 조낭의 근처를 감싼 상태였다. 해치가 아직 부채를 제련하는 조낭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위함이었다.

한편, 해치의 기세를 눈앞에서 목도한 호운은 너무 놀라 환술이 풀린 바람에 다시 붉은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온몸이 돌처럼 뻣뻣이 굳은 채 언제나 영특하게 움직이던 두 눈마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하하, 이건 그저 간단한 생각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지. 너희 계 선생이 내게 빌려준 법력이 많지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네가 언제나 궁금해하는 그 육씨 성의 호랑이 말이다. 그놈도 일찍이 이 이치를 깨우쳤을 것이다.”

호운은 아직도 돌처럼 굳은 상태였고, 옆에서 지켜보던 계연은 해치가 그래도 진지하게 호운을 가르치는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 * *

12월 하순, 일찍이 예상했던 대로 조낭의 손에 들린 부채에서는 마침내 모든 빛이 잠잠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조낭은 활짝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부채를 펼쳤다.

촤악!

접선이 촤르륵 펼쳐지자, 끝단의 자수가 바람에 가볍게 날리며 그 위의 아름다운 도안이 드러났다. 자수로 그려진 도안은 대추나무 한 그루와 그 아래에 선 응약리의 모습이었는데, 그녀는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검처럼 쥐고서 비스듬히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주위에 핀 무수히 많은 노란 꽃이 장검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진룡이 되어 날아갔다.

조낭의 자수는 무척 세밀하여, 그 위의 가장 작은 꽃잎마저도 아주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계연의 지난 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상도’가 아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해치도 곁으로 다가와 완성된 부채를 구경했다.

“네게 이렇게 대단한 실력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계연의 그림 실력과 비교해도 막상막하군. 그나저나 이 모습은…….”

그러자 조낭이 고개를 떨구더니 눈만 살짝 들어 계연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사실 그 장면은 제 마음에 언젠가부터 깊게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진룡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연스레 그 모습을 수놓자고 결정한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약리에게 주는 것이니, 아, 아무래도 고치는 것이…….”

전에는 부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제 도안을 자세히 보게 된 호운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이건, 선생님이 예전에 추신 검무(劍舞)잖아…….”

해치가 옆에서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말했잖느냐!”

하지만 계연은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다.

“하하, 내가 보기엔 아주 좋구나. 너희 둘의 우정을 표현한 동시에, 약리가 진룡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축하연에도 무척 어울리는 그림이지. 약리는 네가 내 모습에 자신을 대입시켰다는 걸 모를 것이고, 설령 안다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계연은 이렇게 말하더니 하늘을 보며 점괘를 쳤다.

“자, 시간이 다 됐구나. 선물도 준비되었으니 우리도 어서 가자.”

* * *

응굉의 딸이 성공적으로 물길을 타고,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교룡의 몸에서 벗어나 진룡이 되었다는 소식은 물의 족속들을 통해 천하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이를 들은 이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곧이어 통천강에서 화룡연을 연다는 소식이 들리자, 물의 족속들은 모두 우르르 떼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천강 자체는 큰 강이지만, 통천강 용궁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통천강 용왕은 용궁 밖에도 백 리(약 40km)에 걸쳐 연회석을 마련한다는 소식을 퍼뜨렸다. 용궁에 들어올 수 있는 손님은 모두 귀빈뿐이었다.

대정국과 운주 내륙의 물의 족속들을 비롯하여 나름대로 연줄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해의 수많은 물의 족속들까지 운주 남쪽의 통천강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운주 내륙의 물의 족속 대부분은 원래부터 응굉의 밑에 있었으므로, 물가에 있는 누각에서 달을 먼저 보듯(近水樓臺先得月: 가까이 있어야 먼저 이득을 본다는 뜻)이 이름 없는 강이나 무슨 계곡의 신령만 아니라면, 하천의 신과 물의 신을 비롯한 정도의 수행자들은 용궁 가까이 자리가 배정되거나 아예 용궁 내부로 안내되었다. 그중에서도 얼마간 지위가 있는 이들은 응굉 일가와 같은 연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한편, 춘목강에서는 흰 교룡이 거북과 강청어를 데리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었다. 그는 굳이 강신(江神)의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그 속도는 일반적인 어수술을 부리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강신 어르신, 거북 할아버지, 계 선생님께서도 오실까요? 그리고 작은 여우도 함께 올까요?”

강청어는 흰 교룡 가까이에서 헤엄치고 있었는데, 부근의 물살이 전부 교룡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아주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자 교룡은 미소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거북이 웃으며 대답했다.

“계 선생님은 용왕님과 막역한 사이시고, 응 마마께서도 선생님을 숙부라 부르시니, 설령 계 선생님께서 지금 저 하늘 끝에 있으시더라도 반드시 연회에 참석하실 거다. 그리고 여우는,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원래라면 그 여우는 이런 자리에 오지 못할 테지만, 만약 계 선생님께서 함께 데리고 오신다면 감히 누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하하하, 응 마마께서는 무사히 물길을 타시고 1년도 되지 않아 진룡으로 거듭나셨으니, 뛰어난 재지(才智)를 타고나신 분이구나. 정말이지 부럽구나!”

백제의 부러움 섞인 말에서는 조금의 시기심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전의 그가 어느 교룡이 진룡이 되었다고 들었다면, 설령 그게 진룡의 딸일지라도 속이 무척 쓰렸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트인 후로 그의 마음에는 더는 이를 꺼리는 바가 없게 되었다.

“강신 어르신께서도 분명 진룡이 되실 거예요!”

강청어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 흰 교룡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거야 당연한 말이지!”

강물 속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흰 교룡의 몸은 예전처럼 민둥민둥하지 않았고, 표피 위로 희미한 흰색 무늬가 떠올라 있었다. 비록 여전히 비늘은 없는 상태였지만, 빛을 받아 드러나는 무늬 덕분에 몸이 비늘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 * *

한편, 통천강 가까이 있는 숙수강의 저택에서는 숙수의 정신(正神)인 두광통이 고천명과 그의 부인인 하추를 맞이하고 있었다. 숙수는 자신의 근거지임에도 두광통이 고천명을 대하는 태도는 무척 깍듯했다. 이들은 서로를 형제라 칭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두광통은 자신이 고천명보다 좀 더 낮은 위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형께서 숙수에 와서 제 저택을 찾아주시니, 이 두모(某)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고형은 용왕의 중용을 받고 계시는 데다 응풍 전하와도 왕래가 잦지 않소? 이번 화룡연도 응풍 전하께서 직접 찾아가 초대하셨다고 들었소만?”

“하하, 응풍 전하께서는 그저 지나던 길에 천수호에 들르신 것뿐이오. 그나저나, 두형의 저택은 제가 머무는 곳보다 훨씬 편안하구려. 시끄러운 일도 없고 말이오.”

허허 웃으며 이야기하는 고천명의 옆에는 하추가 미소 띤 얼굴로 서 있었고, 반면 두광통 곁에 있는 아름다운 두 여인은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채였다.

“하하하하, 당연한 말씀이오! 두모는 용왕 발아래의 숙수에 머무는데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있겠소이까? 이번에 응 마마께서 진룡이 되는 데 성공하셨으니, 우리 형제들도 모두 모이겠구려. 듣자 하니 사해의 용족들도 모두 온다고 하오!”

“하하하하……. 나도 들었소이다! 그나저나 응풍 전하께서 일찍이 우리를 위해 자리를 준비했다 하셨소. 바로 화룡연이 열리는 대전(大殿)의 연회석이라오!”

“오?”

그러자 두광통이 눈을 반짝이며 기쁜 얼굴로 물었다.

“대전에 있는 자리란 말이오? 정말이오?”

“하하하하, 설마 거짓이겠소? 원래는 대전 안에 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응풍 전하께서 그래도 우리 형제들을 살펴주신 모양이오!”

“하긴, 하하하하! 자자, 그렇다면 어서 갑시다. 일찍 가면 혹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두 사람은 웃으며 숙수의 저택을 빠져나갔고, 내심 이번 화룡연에 대한 기대를 더욱 키우기 시작했다.

교룡이 진룡으로 거듭나는 것은 사해의 물의 족속들이 모여 축하하는 일인 만큼, 참석하는 손님들이 셀 수 없이 많았고 사해의 용왕들도 대부분 직접 올 정도였다. 만약 직접 오지 못하면 자신의 용태자(龍太子) 등을 대신 보냈다. 그런 만큼 대전 안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을 수 있다면 엄청나게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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