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화. 사절단을 태운 배
계연은 야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뒤따라오는 야차를 바라보았다.
“혹시 응 선생께 보고하고 싶거든 가보세요. 맡은 직무에 책임을 다해야지요.”
그러자 야차가 즉시 허리 숙여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 선생님. 그럼 소인, 다른 이를 시켜 선생님을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통천강 용궁은 저도 잘 아니까요.”
계연의 말에 야차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눈을 빛냈다.
‘계 선생님께서는 방해받는 게 싫으신 것이구나.’
이에 그는 얼른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예, 그럼 소인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야차는 급하게 물살을 일으키며 떠났고 금방 정전(正殿)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귀빈들이 앉은 자리를 빙 돌아 응굉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찻잔을 든 채 용왕들과 한담을 나누던 응굉의 귀에 야차의 전음이 들려왔다.
“용왕님, 소인이 계 선생님께 한 가지 소식을 전해 듣고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그러자 응굉이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용왕께 아룁니다. 계 선생님께서 정확히 말씀하시진 않았으나, 용궁 밖에 마련된 연회 장소를 향해 가시면서 후에 좋은 구경거리가 벌어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소인 감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이렇게 보고하러 온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응굉이 웃으며 대답했다.
“음, 일 처리가 아주 영민하구나. 가 보거라.”
이에 야차가 의아한 눈길로 응굉을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 나갔다.
‘용왕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니, 나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 * *
이때 계연과 조낭은 이미 용궁을 나온 상태였는데, 용궁 밖 물의 족속의 밀도는 안쪽보다 몇 배는 높았다. 게다가 이곳에서 느껴지는 요기(妖氣)는 용궁 안쪽과 비교해도 그리 약하지 않았다. 진룡을 비롯한 특별한 물의 족속을 제외하면, 통천강에 찾아온 이들 중 실력이 만만치 않은 이들이 적잖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연과 조낭은 용궁의 대문에서 나왔으므로, 선물을 전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물의 족속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둘은 이내 물살에 섞이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계연이 물을 다루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말씀하신 좋은 구경거리가 무엇인가요?”
“오랜 지인을 만나게 될 거란다.”
계연이 조낭을 향해 웃으며 말한 뒤, 넓게 펼쳐진 용궁 주위를 둘러보니, 양쪽으로 나 있는 물길 외에 통천강 중심에는 이미 석대(石臺)가 하나둘 솟아올라 식탁으로 변하고 있었다.
후에 시작될 연회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수많은 물의 족속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제때 술과 요리를 내갈 수 있도록 거품을 연이어 연결해 금제를 만들었다.
이렇게나 많은 물의 족속들이 한데 몰린 걸 보고 계연은 저도 모르게 흑황에서 열렸던 만요연을 떠올렸다. 물론 이곳의 요기와 그 당시의 요기는 무척 다른 느낌이었다. 이곳은 내륙이나 사해에서 이름 좀 있다는 물의 족속과 여러 정신(正神)이 모인 장소였지만, 계연은 이들 모두가 아주 깨끗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악행을 저지르는 존재는 아주 극소수였다.
“지인이요? 누구요?”
“조낭아, 매사 궁금해하는 건 좋은 태도지만, 모든 일에는 즐거움을 조금 남겨둬야 하지 않겠느냐?”
계연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조낭도 그를 따라 웃었다.
“네, 알겠어요, 선생님께서 즐거움이라고 하시니 좋은 일이겠지요!”
곧이어 계연이 웃음기를 거두더니 전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한테는 말이지.”
* * *
다른 한쪽에서는 해치와 호운이 막 편전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편전을 지키고 서 있던 야차와 어낭이 그들을 향해 예를 올리며 이렇게 설명했다.
“사 선생님, 호 선생님. 현재 용궁 안팎이 너무 혼잡해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밖에 나가려고 하시는 것이라면 소인들이 따라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호운이 좌우를 둘러보니, 양쪽에 총 일곱 명이 서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은 야차였고 네 명은 몸에 커다란 생선 꼬리가 달린 물고기 처녀들이었다.
“전부 따라오시려고요?”
“호 선생께 아룁니다. 저희 중 한 사람만 따라가면 됩니다.”
호운이 해치를 쳐다보자, 해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중 물고기 한 명을 가리켰다.
“알겠다, 너로 하지.”
말을 마친 해치는 호운을 데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때 호운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호 선생’이라 불린 기분이 퍽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용한 궁전을 나서자마자 호운은 곧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바깥에 있는 물의 족속 요괴들의 수가 생각보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요괴들 저마다가 내뿜는 요기가 너무나 무섭게 느꼈다. 그러다 다시 옆에 있는 사부를 바라보니, 그에게서는 아무런 요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계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달랐다. 계 선생님에게서는 해치와 마찬가지로 어떤 선기(仙氣)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호운은 계 선생님이 아주, 아주 대단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부는 법력조차 계 선생님께 빌려 쓰고 있는 지경이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들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다 호운은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물고기 처녀를 보더니 곧 적잖이 안심했다.
‘그래도 여기는 용왕께서 계시는 곳이니 큰일이 생기진 않겠지.’
“아이, 사부님, 천천히 좀 가세요.”
호운이 다급히 해치를 뒤따라가며 소리쳤지만, 해치는 그를 한번 힐끗 보고는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동시에 거리낌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째 전부 미꾸라지 같은 놈들 뿐이냐.”
그러자 호운은 얼른 해치를 따라잡더니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사부님, 계 선생님께서도 안 계신데 말 좀 가려서 하세요.”
“대체 뭐가 겁나는 거냐? 여긴 용궁인데. 가자, 저 앞으로 한번 가 봐야지. 아무래도 응씨 일가를 만날 자격이 있는 놈들 중에서 찾아봐야겠군.”
그렇게 호운은 불안해하며 해치를 뒤따라갔고, 이내 용궁 입구에 직선으로 길게 뻗은 줄 가까이 이르렀다.
해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돌연 멀리서부터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우야! 여우야!”
“응? 누가 지금 날 부르나?”
호운이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하자 해치가 그를 향해 고개 숙여 말했다.
“이 통천강 전체에 너 말고 다른 여우가 있느냐?”
다시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살펴보던 해치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환술조차 쓰지 못하는 커다란 물고기가 호운의 환술을 꿰뚫어 보다니?’
호운의 도행이 아직 아주 얕다고는 하나, 계연의 곁에서 쌓아온 기초는 무섭도록 탄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해치의 흥미를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호운의 환술은 아무나 꿰뚫어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청청아! 너 청청이구나!”
호운은 강청어를 발견하자마자 해치를 뒤에 놔두고 달려갔다. 백제도 강청어가 호운에게 헤엄쳐 가도록 놔두었다.
“하하하하, 청청아 너 말할 수 있구나! 이제 나랑 말을 할 수가 있다니!”
호운에게 있어서는 강청어를 만난 지금이야말로 오늘 하루 중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그는 달리다 못해 흥분을 금치 못하고 거의 뛰어오르더니, 이내 강청어와 거세게 부딪쳤다. 그리고는 강청어의 머리를 끌어안고 주위를 빙빙 돌았다.
“나 말할 수 있게 된 지 꽤 됐어, 하하하하……. 그나저나 너는 여우인데 어떻게 이 연회에 온 거야?”
“그렇구나, 나는 계 선생님께서 데리고 와 주셨어. 너는 백 강신께서 데리고 와 주신 거구나?”
한편 백제는 흰 장삼을 차려입고서,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노인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노인은 바로 둔갑한 거북이었다.
“오호, 작은 백룡과 늙은 검은 거북이로군. 이 정도면 뭐, 그럭저럭 흥미롭다고 할 만하군.”
백제와 거북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던 터라, 해치의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백제가 눈초리를 가느스름하게 뜬 채 해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상대의 육체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 외 다른 기운은 느낄 수 없었으므로 사람인지 요괴인지 판별할 수가 없었다.
“상대를 앞에 두고 거침없이 이러쿵저러쿵 입을 놀리는 걸 보니, 도대체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가 없군요.”
해치는 아무런 말 없이 백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 거북을 한번 훑고는, 한쪽에서 떠들썩하게 대화 중인 강청어와 호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호운, 가자.”
“예? 하지만 아직 이야기를 다 못 나눴는데요!”
“연회가 열린 다음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지 않느냐.”
해치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자, 호운은 아쉬워하며 강청어와 인사를 나눈 뒤에 다시 백제와 오숭을 향해 예를 올리고는 다급히 뒤따라갔다.
그러자 거북 오숭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눈살을 찡그렸다.
“강신 어른, 저자는 호운의 사부입니까? 계 선생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실까요?”
“신경 쓸 필요 없다. 우리는 용왕님께 인사 올리러 가자. 계 선생님께서도 분명 오실 테니 곧 뵐 수 있을 테지.”
* * *
통천강 수면 위, 경기부 나루터를 향해 금군이 호송 중인 마차 몇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내 마차가 나루터 근처에 멈추자, 하인이 얼른 발 받침대를 갖다 놓고는 마차의 가리개를 걷었다. 그러자 줄줄이 늘어선 마차에서 여러 사람이 차례로 내려섰고, 앞뒤로 호위하던 금군들이 모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배는 다 준비가 되었느냐?”
“국사께 아룁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음.”
그러자 두장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선 사람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윤 재상 대인, 여러 전하와 대인분들, 배가 준비되었다 하니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럼 국사께 수고를 좀 끼치겠소. 준비되는 대로 법력을 써 주시오.”
“당치 않습니다, 이는 소관의 임무이옵니다.”
두장생은 윤재성과 윤청, 몇몇 조정 대신과 황자들과 함께 준비된 누선 위에 올라탔다.
“출발!”
어느 금군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을 내리자 누선이 천천히 나루터를 떠나 강 중심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두장생과 천사처의 천사 몇몇이 함께 법력을 펼치자, 뱃전에서부터 얇은 안개 같은 막이 솟아오르더니 수면 위의 다른 배들은 이들이 탄 커다란 누선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누선은 점점 속도를 내는 동시에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 그저 늘어뜨린 채였던 누선의 대정국 깃발은 수면 아래에 잠기자마자 물살에 의해 펄럭이며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배에는 선상에 올라탄 사람들이 물에서도 숨 쉴 수 있도록 피수술이 설치되어 있었다.
누선이 물에 잠기자 뱃전에 서 있던 금군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과 흥분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사절단의 체면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더욱 등허리를 바짝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