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2화 (12/284)

뒷마무리 (2)

성문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문 앞에서 검문하는 경비병들.

까다롭게 구는 병사들에게 은근슬쩍 금전을 쥐여 주며 통과하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을 기대했는데, 여긴 왜 이러냐?’

규모가 좀 작기는 해도, 성벽이 둘러쳐져 있고 건물들도 많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도시는 맞다.

‘근데 뭐가 이렇게 휑하지?’

심지어 성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은 흘끔 한번 쳐다보기만 할 뿐, 문을 통과하는 내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여념이 없었다.

‘일단 검문이 없는 건 다행인 일이지만.’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화전민 마을의 노인에게 둘러댔던 것처럼 대충 얼버무리는 게, 도시의 경비병에게까지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까다롭게 이것저것 따져 물으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슬쩍 찔러주려고 은화도 몇 개 준비했었는데.’

아직 밝은데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는 주민이 별로 없었고 외지인인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도시 전체에 생기가 없었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찝찝했지만 먼저 숙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일단은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정보는 수집해야 했으니까.

‘어디 보자···. 숙소가 어디에 있으려나. 저 사람한테 한번 물어볼까?’

인근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길을 물으려고 했을 때, 문득 길옆의 골목 안쪽이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에 문신을 한 근육질의 거한과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꾀죄죄한 소녀.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소녀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거한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애원하고 있었다.

“사정은 아는데, 나도 오래는 못 기다린다는 거 알지? 3일 준다. 3일 내로 가져오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소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했다? 너희 두 명. 3일 안에 은화 두 개다.”

그가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내뱉은 마지막 목소리에, 소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소녀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신의 볼을 찰싹 두드렸다.

그리고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 도시의 건달과 착취당하는 어린 소녀. 진부한 클리셰로군.’

중세 판타지 세계인만큼, 이 세계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내가 인권을 주장하며 날뛴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고,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었다.

툭—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자니, 땅만 보고 비틀거리던 소녀가 골목을 빠져나오다 나와 몸이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거칠어진 피부와 상처 나고 부르튼 손.

공허한 눈동자와 은연중에 감도는 암울한 분위기는, 나에겐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사과를 마친 소녀는 나를 지나쳐 다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축 처진 어깨와 활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

괜스레 그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흐음, 은화 두 개라.’

품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뇌물용으로 따로 준비했던 돈주머니로, 안에는 다수의 동전과 대여섯 개의 은화가 들어있었다.

‘이곳의 물가를 모르니 푸짐하게 넣었었는데. 생각보다 은화의 가치가 큰가 보군.’

검문도 없이 성문을 통과하면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타이밍 좋게 적당한 사용처가 생겼다.

‘마침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는데.’

정보를 제공해 줄 현지인이면서 이쪽이 요구하는 바를 성실히 이행해 줄 사람.

그러면서 다른 수작을 부릴 위험성이 적은 인물.

눈앞에 딱 좋은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나.

‘믿을 수 있을 진 아직 모르겠지만, 겨우 이 정도 돈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야.’

돈주머니에서 은화를 두 개 꺼내고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뭐, 이것도 인연이겠지. 어차피 뇌물로 쓰려고 했는데, 그것보단 이쪽이 더 효율적일 테고.’

나는 아직도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는 소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쪽이 기척을 내며 가까이 접근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흠흠··· 저기, 꼬마야?”

“······.”

“저기~? 오빠가 잠깐 할 말이 있는데···.”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어서, 좀 더 크게 말하며 어깨를 톡톡 두드렸는데···.

“히엑—! 자, 잘못했어요!”

놀라서 펄쩍 뛰어오른 소녀의 모습에 이쪽도 덩달아 놀라 눈을 껌벅거렸다.

“······.”

“어, 저기··· 누구세요?”

네 고용주가 될 사람이다.

소녀의 상황이 안쓰럽다고 무작정 베풀 생각은 없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야말로 튼튼하고 오래가는 법이니까.

내가 이 도시에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지킬 건 지켜야지.

그러니까 이제 근로 조건을 협의해 보자.

***

하인즈는 도시에서 소녀를 만난 후, 그녀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숙소를 잡고 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현지 가이드가 옆에 있으니 모든 게 순조로웠다.

“자··· 그럼 나는 내 일을 시작해 볼까?”

금괴! 금괴를 수확할 차례였다.

이세계 여행도 좋지만, 일단은 본체인 나 자신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먼저 아니겠는가.

‘근데 한스를 그냥 소환하기는 좀 무섭단 말이지.’

하인즈로 마주했을 때 그 위용을 직접 깨닫지 않았나.

‘그래도 「명경지수」도 있고. 잠깐이면 괜찮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눈을 감고 한스를 소환했다.

사아아···

소환과 동시에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눈앞에 불길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이거 장난 아니네? 평생 사람들 앞에 못 나서겠는걸?]

한스의 시야로 선 채 굳어있는 내 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력을 공명시켜 울리는 그 목소리가 마치 지저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것처럼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래도 「명경지수」 덕분인지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네.’

처음 한스를 소환했을 때는 사정없이 흔들리던 스킬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점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후우, 이제 괜찮···.”

고요해진 마음으로 눈을 뜨고 한스를 마주 본 순간,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예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우리 당분간은 거리를 좀 두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다. 오줌이 마렵네.”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스레 중얼거리며 한스와 거리를 벌렸다.

‘물건이야 한스가 알아서 꺼내 놓으면 되는 거고.’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 한스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한쪽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금괴를 비롯한 귀금속과 마도구.

마도구는 보호 능력이 있는 물건들로 몇 개 챙겼다. 본체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으니까.

혹시나 싶어 해골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가볍게 두들겨 보았으나.

[음, 역시 이 세계에서는 소환이 안 되는 건가.]

차원을 넘어 그쪽 세계의 언데드들을 소환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다.

완전히 한스 자신에게 귀속된 아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수납할 수 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 자신은 그런 마법을 알지 못했다.

‘뭐, 앞으로 성장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

당장은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괜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삐비비빅— 철컥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와 좀 떨어진 거리에서 한스에게 익숙해지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운동하러 나갔던 아바타가 돌아왔다.

멋진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심사숙고 중이라 아직 이름은 없었지만, 순간 속도가 증가하는 「가속」 스킬을 가진 쓸 만한 녀석이었다.

‘시대상을 반영해서 나무 가면을 준비했는데, 이게 꽤 잘 어울릴 것 같단 말이지.’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아바타의 손에는 한스에게 씌우기 위해 준비한 나무 가면이 하나 들려있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플라스틱 가면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 쓸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아바타를 움직여 한스의 얼굴에 가면을 가져다 대고, 뒤쪽의 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혹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질긴 가죽끈으로 여러 번 고정했다.

“오오··· 분위기 있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흉악해.”

나는 한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짝짝 박수를 쳤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달리기를 하던 아바타의 눈에 문득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지금 한스가 쓰고 있는 저 양반 하회탈이었다.

로브를 눌러쓰고 여유롭게 웃는 듯한 눈구멍에서 피어나는 푸른 귀화, 열린 입 부분에서 얼핏 보이는 이빨들과 그 사이에서 안개처럼 새어 나오는 한기.

그야말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어, 가만. 이거 가면으로써 의미는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한스는 귀여운 핑크색 토끼 가면을 써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로 보일 테니까.

일단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가면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했다.

‘음··· 해골이 직접 보이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우길 수 있겠지.’

애써 한스의 위압적인 몰골을 외면하며 손가방을 가져와 금괴를 챙겨 넣었다.

‘일단 가져온 금괴는 3kg인가. 일단은 이걸로도 충분하지.’

장기적으로는 서울 외곽에 주택을 사서 온갖 결계로 둘러버릴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었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 믿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일단 이 금괴는 그냥 정상적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물건들을 정리하다 발견했다고 하면 되겠지.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사는 편도 아니었고,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이 정도 금을 판매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나갈 채비를 한 아바타가 문밖을 나서려다 잠깐 멈춰 섰다.

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다 보니 괜스레 걱정되었다.

“이대로 그냥 나가기는 좀 불안한데.”

보호용 마도구를 챙겼는데도 뭔가 찝찝하다.

그렇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민하다 멀뚱멀뚱 서 있는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금 매입소의 직원이 구십도 인사를 하며 나를 배웅했다.

예상했던 대로 판매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걱정했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러 금을 비싸게 매입한다던 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어, 풍족해진 통장잔고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져서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바닥의 그림자를 슬쩍 쳐다봤다.

다른 곳보다도 유독 더 새카맣게 보이는 그림자.

‘직접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이렇게라도 쓸 수 있으니 다행이군.’

내 그림자에는 흑마법을 사용한 한스가 숨어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숨겨왔는데 역시 걱정이 과했던 것 같았다.

위이잉— 위이잉!

콰앙—!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있던 금 매입소에 보안문이 내려오더니, 잠시 후 벽이 터져 나갔다.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 거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뒤를 쳐다보았다.

2미터가 넘은 근육질의 늑대인간과 그에게 매달린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부서진 건물 구멍에서 빠져나와 골목길로 도망쳤다.

슬쩍 난장판이 된 건물 안쪽을 살펴보니 귀금속들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사건 직전에 나온 덕분에 직접 휘말리진 않았다.

하지만···.

‘빌런, 이란 말이지···.’

각성한 이능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

물론 그런 빌런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가디언들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모든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처럼.

나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신고하고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저들은 가디언들이 알아서 추적할 것이고, 잡히면 이능 범죄로서 가중처벌을 받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다면···.

‘잘 먹고 잘 살겠지.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한성현은 그렇게 사건 현장을 떠나 집으로 향했다.

***

“좋아 울프, 작전대로야. 이제 포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곳만 빠져나가면 끝이다!”

“크릉, 가디언이 오기까지 약 3분, 그 정도면 널널하지.”

작전은 간단했다.

무력 담당인 ‘울프’가 경비들을 제압하고 금고와 보안장치를 파괴해 퇴로를 확보하면, 운반 담당인 ‘포터’가 귀금속들과 현금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울프에게 업힌다.

이후 탈출 담당인 ‘포탈’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해 그의 이능을 통해 멀리 벗어나는 것으로 끝.

“카하핫— 가디언놈들 뒤늦게 와서 벙찐 얼굴을 봐야 하는 건데!”

“크흥! 됐다. 도착했으니 내려라.”

그들은 곧 공사장 내부로 들어섰다.

포탈의 이능인 게이트는 생성하기 위한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현장에서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미리 장소를 구해 탈출 준비를 해둬야 했다.

타닷— 타악!

서둘러 안에 들어서자 기절한 채 구석에 밀려나 있는 공사장 인부들이 보였다.

그리고 게이트를 생성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포탈 또한 같이 기절해 있었다.

“어···? 뭐야?”

쓰러진 포탈의 앞에 서 있는 어둠 속의 ‘무언가’.

“크르르르···.”

울프의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몸을 낮추고 꼬리를 세웠다.

하지만 그 두 눈은 명백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으··· 저, 저게 뭐···?”

포터의 상태는 더 심했다. 사고가 뚝뚝 끊긴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한 손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포터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덮쳐오는 그림자 사이에서 파랗게 빛나는 안광을 가진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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