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8화 (18/284)

뱀파이어 (2)

뱀파이어 클랜, 브로코슬락의 아잔투 지부.

탈리아 왕국 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인 아잔투 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력의 뱀파이어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할 일이 없단 말이지···.”

며칠간의 교육이 끝났지만 딱히 나에게 뭔가를 지시하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도시 전체에 체계가 갖춰져 있어 모든 일이 알아서 돌아가고, 뱀파이어들은 가끔 휘하의 조직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관리만 하면 되었다.

‘수명도 긴 장수종이라 매사 느긋하기도 하고.’

이번에 사망한 뱀파이어 대신 나를 받아들인 것일 텐데, 인수인계는커녕 그냥 하다 보면 알게 될 거라고만 할 뿐이었다.

특별한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도시의 인간들에게 너무 노출되지 않는 선에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덕분에 저녁에 외출하며 남매와 이야기도 더 나눌 수 있었지만, 그것도 너무 잦으면 꼬리가 잡힐 테니 적당히 해야 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한스로 시선을 끌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나.’

처음에는 뱀파이어들과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놈들은 도시의 인간들을 말 그대로 가축으로 여기고 있었다.

‘저택에서 피를 가져다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리고 자기들 딴에는 나름 개체 수를 조절한답시고 조심하고 있기도 했다.

피를 꺼리는 내게도 처음은 원래 다 그런 법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고 하는데···.

‘역시 이놈들과는 오래 같이 있지는 못하겠군.’

정신까지 뱀파이어에 물들지 않은 나로서는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저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있을 때였다.

아잔투의 순혈, 위라크가 뱀파이어들을 전원 소집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글쎄, 이렇게 전부 소집하시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몇 년 만이지?”

평소에 도시 곳곳에 퍼져서 살아가던 서른 남짓한 뱀파이어들이 저택의 로비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네가 이번에 새로 피를 계승한 잔혈인가? 운이 좋군.”

“쯧, 위라크님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천한 것을 받아들이신 것인지···.”

그에 처음 보는 이들이 내게 시비를 거는 일도 잦아졌다.

전형적으로 선민의식에 빠진 귀족의 모양새였다.

‘내가 생각했던 뱀파이어의 이미지 그대로잖아!’

그런 이들을 그저 신기하게만 보고 있을 때, 위라크가 로비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위라크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뱀파이어들이 위라크에게 몰려들어 알랑방귀를 뀌어댔다.

내 생각보다 순혈이 가지는 위상이 더 높은 것 같았다.

“전부 온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적당히 인사들을 받아준 위라크는 로비의 계단 위로 올라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역천의 서약 놈들이 가지고 있던 불사왕의 파편이 사라졌다.”

웅성웅성—

갑작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지만, 다행히 주변의 모든 이들이 소란스러워졌기에 이상하게 보는 이들은 없었다.

“아~ 너는 모르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흑마법사들이 파편을 숨겨서 숙성시키고 있었는데 말이야···.”

어느새 옆에 다가온 로실리카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을 빠르게 속삭여 주었다.

“조용.”

웅성거리던 주변이 위라크의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내 옆에 있던 로실리카도 어느새 떨어져 계단 위의 위라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도시 방향으로 향한 것은 확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도시 내부로 들어왔을 수도, 그냥 지나쳐 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을 멈춘 위라크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간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휴, 쫄리네.’

“우리는 도시 내에 들어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색에 들어간다.”

위라크는 각자의 구역에서 수상한 정황이 발견되면 즉각 보고하라는 말을 끝으로 해산을 명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로비를 나서자 로실리카는 투덜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다른 뱀파이어들과 인사하는 것을 보니 인싸 같아 보이던데, 아까부터 굳이 나를 챙겨주려는 건가.

“후흐흐~ 아직 혈액 취향이 잡히지 않은 신입에게 영업도 할 겸? 내가 점찍어 놓은 근육질 남자가 있는데 다음에 같이 한잔 어때?”

“사양하지. 아무래도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로실리카는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어깨를 한번 으쓱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곤란하게 됐네. 불사왕의 파편은 클랜로드께서 관심을 두고 직접 지시하신 사안일 텐데.”

“그래? 그런데 흑마법사들도 나름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을 텐데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지?”

“글쎄다~? 우리 같은 말단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아무래도 로실리카에게는 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곧바로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 때문에 우리 클랜에서 가지고 있던 다른 파편도 굳이 이곳까지 옮겨서 봉인하고 있었는데.”

“뭐···? 이곳에도 또 다른 불사왕의 파편이 있다고?”

나는 깜짝 놀라 로실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래, 놈들이 파편을 숙성시키면 그것을 탈취해서 융합시킨다던가 뭐라던가. 자세하게는 몰라~.”

하지만 로실리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대답할 뿐이었다.

‘혹시 이 녀석 생각 외로 높은 신분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로실리카는 피식 웃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나도 1년 전에 파편과 함께 아잔투로 파견된 입장이거든. 애초에 이 작은 도시에 뱀파이어가 이렇게 많이 필요할 리가 없잖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흑마법사 말콤과 엇비슷해 보이는 수준의 순혈의 뱀파이어 셋, 흑마법사 하수인들보다 확실히 강해 보이는 잔혈이 서른 이상.

‘그리고 내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서번트와 슬레이브들까지 합치면···.’

확실히 대륙 변방의 작은 도시 하나에 처박혀 있기에는 과한 전력이다.

“원래는 위라크님과 잔혈 열다섯 정도만 이 도시에 있었다고 하는데, 파편 때문에 이렇게 증원이 이루어졌지. 그런데 그동안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었으니.”

당분간은 바빠질 거라고, 로실리카는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

“아~ 낮에 밖에 나오면 피부 타는데.”

로실리카는 양산을 고쳐 쓰며 투덜거렸다.

소집이 있던 다음날부터 우리는 낮에도 교대로 도시 곳곳에 퍼져 이상 징후를 파악해야 했다.

“확실히··· 좀 꺼림칙하네.”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챙이 넓은 신사 모자를 고쳐 쓰며 답했다.

태양 빛을 맞는다고 딱히 대미지가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힘이 제한되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이렇게 한다고 이제 와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어쩔 수 없잖아~. 이것 때문에 순혈이신 피리타님도 잔혈 몇을 데리고 도시 밖에서 수색을 시작하셨을 정도인데.”

글쎄 이미 내가 삼켜서 지구에 보냈으니 이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데.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 속으로 되뇌다가,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혈 하나와 잔혈 일부가 도시를 떠났다.’

위라크는 도시 전체를 탐색하며 나머지 잔혈들을 통제한다.

그 말인 즉.

‘지금 파편을 지키고 있는 순혈은 하나뿐!’

그리고 하루 뒤면 한스를 소환할 수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혼란도 주고, 파편도 탈취해서 한스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놈들에게 큰 엿까지 먹일 수 있다니! 이건 무조건 해야지.’

이제 남은 건 파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뿐이었지만, 이건 로실리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몰라~? 도시에 온 이후로는 만약을 대비해서 순혈분들만 아는 곳에 따로 숨겨뒀거든.”

혹시 본거지를 공격당했을 경우를 대비한 거라고.

그리고 지금까지는 순혈 둘이 계속해서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아, 이건 방법이 없겠는데.’

잘 풀리는 것 같았는데.

역시 다른 파편은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였다.

“어···. 저, 거기 어딘지 알 것 같은데요?”

방법이 있었다.

“뭐? 디아나 네가 어떻게?!”

“꺅!”

깜짝 놀라서 디아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초저녁이 되고, 남매들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다가 별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였다.

뱀파이어들이 도시에 위험한 물건을 숨겨두고 있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었잖아요. 제가 흡혈귀들과 위험한 냄새가 나는 곳을 피해 다녔다고.”

“설마?”

“네에··· 1년 전쯤에 엄청 짙은 피 냄새를 풍기는 흡혈귀들이랑,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진장 위험해 보이는 냄새를 맡았었거든요.”

냄새를 감지한 즉시 그 자리에서 멀리 도망쳤다고, 디아나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워낙 강렬한 냄새였던지라 아직까지 기억에 남네요. 이후론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아! 나도 기억나, 누나! 누나가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었어!”

디아나는 장하다는 듯 아론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필요하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바라 마지않던 제안이었지만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위험해지면 아저씨가 지켜주실 거잖아요?”

“···그래, 그럼 근처까지만 좀 부탁할게.”

다부지게 말하는 디아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선행을 베풀면 어떻게든 돌아오는 법이었다.

다음 날 오후.

나는 오늘도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와 불사왕의 파편을 수색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찾는 파편은 뱀파이어들이 숨겨둔 쪽이지만.’

천천히 거리를 걸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디아나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디아나는 나와 눈을 한번 마주치고 아무 말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뒤를 쫓았다.

내가 미리 지시한 일이었다.

파편 주변에서 뱀파이어들이 어떻게 경계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무방비하게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디아나는 어디 한 곳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한참을 걸어 나갔다.

‘원래 있던 곳과 많이 떨어진 곳이네. 진짜 멀리 도망쳤구나.’

그만큼 위험한 냄새를 맡고 나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리라.

어느 거리에 들어서자 디아나가 코를 킁킁거리는 빈도가 늘어났다.

여기서부터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겠지.

그렇게 얼마쯤 더 갔을까.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디아나가 한쪽에 있는 건물에 시선을 주었다.

약 3초가량.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저기구나!’

뱀파이어들의 거처가 있는 화려한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평범한 주택가의 건물.

그곳에 또 다른 불사왕의 파편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 또한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그쪽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내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틀림없이 무언가가 있을 테니까.

‘이제 결행 날짜만 잡으면 된다. 위치도 찾았고, 한스도 소환 가능해.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최대한 빨리!’

해가 저물 무렵, 시간을 두고 우리는 다시 디아나의 거처에 모였다.

“후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그 냄새는 다시 맡아도 정말···.”

“내색하지도 않고 잘했어.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이제 실행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나는 디아나를 다독이며 잠깐의 고민 후 곧바로 선언했다.

“내일 정오. 태양이 중천에 떴을 때.”

이왕이면 지금 바로 시작했으면 좋겠지만, 이미 해가 진 후이니 다음 날을 노리기로 했다.

‘뱀파이어와 언데드 모두 어둠 속에서 강해지는 것은 똑같지만, 태양에 의해 약해지는 정도는 차원이 다르지.’

순혈이라면 모를까 잔혈의 전투력은 크게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순혈도 전력을 온전히 내지는 못할 터.

내일을 대비에 작전을 짜며 남매들도 준비시켰다.

“저흰 따로 챙길 짐 같은 거 없어요.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내일···.”

남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두고 헤어져 저택으로 향하며 도시를 둘러봤다.

하인즈가 사망하고 하인즈 2세가 뱀파이어가 된 곳.

내일 이 도시를 뜬다.

‘물론 챙길 건 다 챙기고! 그러고 보니 저택에 비싸 보이는 물건들 많던데.’

혀로 입술을 핥으며 눈을 반짝였다.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혼자 실없이 웃으며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태양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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