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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1화 (21/284)

아크리치 (2)

[오오···, 아주 좋구나. 훌륭해!]

한스는 언데드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모조리 아공간에 수납했다.

그야말로 돈 될 만한 물건들은 모조리 쓸어 담았다.

콰앙!

압도적인 흑마력으로 저택 전체를 스캔해, 뭔가 숨길만 한 장소가 나오면 거침없이 부수고 들어갔다.

[···대단하군.]

숨겨진 창고에 가득 찬 온갖 귀금속들.

도시 하나를 먹어 치우고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온 뱀파이어들의 재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전부 내 것이지.’

그날, 한스의 아공간과 더불어 내 마음도 풍족해질 수 있었다.

‘오늘은 소고기 파티다.’

***

“한스라···. 흔한 이름이군.”

대륙 서쪽의 탈리아 왕국 수도, 탈라리아.

두꺼운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 안에서 한 사내가 와인잔 안에 담긴 붉은 액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내 이름은 한스다.’

기이한 가면을 쓴 존재와의 짧은 대화.

“쯧, 마지막까지 도움이 안 되는군.”

아잔투 지부의 책임자인 위라크가 보내온 최후의 기억이었다.

정보를 보낼 때 방해 결계라도 있었는지, 그에게 전해진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자신이 신경 쓰고 있던 불사왕의 파편이 탈취당했다.

아마 아잔투의 지부도 멀쩡하지는 않을 터.

일단 정확한 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음료를 한 번에 마시고 와인잔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한스···.”

브로코슬락의 클랜로드, 뮬로 브로코슬락.

그가 아잔투 시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이쿠,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쉽게 잡아 오시는지···.”

“하하하, 잠깐 둘러보다가 보여서 얼른 잡았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내가 잡아 온 토끼들을 한쪽으로 가져가서 손질했다.

“아저씨! 오늘도 고기에요? 와아~!”

누나와 함께 야영지를 꾸리는 것을 돕던 아론이 신나서 펄쩍 뛰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아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아잔투 시를 벗어나 동쪽의 틸라크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도시를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제거했고, 뒷골목 조직들도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짐마차와 마부를 고용해서 이동한 지 3일.

마부인 발터는 한때 용병 일도 했던 사람으로, 덕분에 이런저런 자잘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디아나가 다가와 수통을 건네주었다.

“뭘, 별거 아냐. 물 고맙다.”

나는 수통을 기울여 물을 마시다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며칠간 잘 먹고 지낸 덕인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확연히 안색이 좋아졌다.

또 항상 긴장하고 지내던 아잔투에서 벗어났다는 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테고.

잠시 그러고 있자 시선을 눈치챈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저기, 아저씨. 아직 목마르세요? 피 드릴까요?”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는 그녀를 잠시 어이없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이마를 밀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번에 배 터지게 먹었거든.”

아잔투의 뱀파이어들로 잔뜩 포식했으니 당분간은 괜찮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 이 조그만 아이에게서 피를 빨겠는가.

차라리 도시에 도착하면 나쁜 놈들에게 헌혈 좀 받고 말지.

‘그러고 보니 로실리카는 못 본 것 같은데.’

불현듯 내 교육 담당이었던 잔혈의 뱀파이어가 생각났다.

파편이 있던 곳에서도, 이후 본거지에 쳐들어갔을 때도 로실리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인연이 있는 상대라 직접 해를 끼치는 건 꺼림칙했는데, 다행이기도 했지만···.

‘뭐, 이젠 다시 보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도시에서 죽었다고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

이쪽은 탈주한 몸이었으니까.

“고기 구울 준비 다 됐습니다.”

“와아~ 아저씨! 누나! 빨리빨리~!”

모닥불 쪽에서 발터와 아론이 우리를 불렀다.

요 며칠 고기를 구울 때마다 지구에서 가져온 향신료들을 뿌려줬더니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나는 디아나와 함께 모닥불로 향하며 미소 지었다.

목적지인 틸라크 시까지 앞으로 하루.

굉장히 평화로운 여행이었다.

***

야심한 새벽.

아잔투 시 인근의 숲속.

잔혈의 뱀파이어 로실리카는 부복한 채로 보고를 마쳤다.

그녀의 옆에는 도시 밖으로 파편을 수색하러 나갔던 순혈, 피리타가 함께 부복하고 있었다.

“흐음···. 결국 뭐 하나 확실한 게 없군.”

로실리카는 습격이 있었던 직후, 도시 밖에 있는 피리타를 불러오기 위해 급파되었다.

문제는 도시 밖으로 나갔던 이들이 서둘러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는 것이다.

파편이 숨겨져 있던 은신처와 클랜 지부가 위치한 본거지가 모두 괴멸되었다.

그리고 감지 능력에 특화된 피리타는 알 수 있었다.

온전히 감춰지지 못해 새어나온 듯한, 도시 내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흑마력을.

그녀는 도시 안에 아직도 흉수가 남아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현 상황이 그들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했다.

이후 즉각 퇴각하여 클랜에 이번 일을 보고했다.

그리고 도시 주변을 감시하며 그 존재의 이후 행보를 주시했다.

“그 난리를 치고도 아직도 도시 안에 남아있다? 우리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보군···. 도대체 누구지?”

그녀들의 보고를 모두 들은 소년은 앉아있던 나뭇가지에서 일어나, 도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럼 어디 직접 얼굴이나 한번 볼까? 감히 누가 우리 영역에서 이딴 짓을 했는지.”

사사사삭—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숲의 어둠에서 수십에 달하는 그림자가 도시로 쇄도했다.

부복하고 있던 로실리카와 피리타 또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나무 위에 서 있는 소년.

진혈(眞血)의 뱀파이어 ‘오보르 브로코슬락’이었다.

이내 한 무리의 박쥐가 도시로 향했다.

***

한스는 오늘도 도시를 둘러보고 있었다.

‘생각만큼 치안이 무너지진 않네?’

뱀파이어들이 괴멸하면서 조직들의 목줄이 풀릴 거로 예상했는데, 생각 외로 체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긴, 아직 3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확실하게 상황 파악이 되기 전까지는 몸을 사리는 게 당연하겠지.’

그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괜히 나대다가 나중에 돌아온 지배자들에게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당분간은 선을 좀 넘는다 싶은 놈들만 정리하면 되겠지.’

적당한 선만 넘지 않으면 지금의 조직은 건들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이들은 나름대로의 규율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양아치들이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자신이 언제까지나 이 도시에 있을 것도 아니니, 너무 개입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왕국 측에서 관리 인력을 다시 파견하는 건데···.

‘그럴 일은 없겠지. 이미 시장도 뱀파이어의 하수인이었으니.’

대외적인 활동을 위해서인지 흡혈귀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시장은 그들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다시 뱀파이어 클랜의 손에 넘어가겠지만.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겠···. 흐음, 도착했나···?’

빠른 속도로 도시로 접근하는 존재들이 느껴졌다.

이 기운은 확실히 뱀파이어들이다.

‘올 놈들도 왔으니 이제 슬슬 도시를 빠져나가야겠군.’

나는 놈들이 접근하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도시를 벗어나 인근의 숲 안으로 향했다.

‘곧바로 이쪽으로 오네. 위치를 들켰나? 마력 은폐장도 완벽하진 않군.’

아직 두 번째 파편을 흡수하며 폭증한 흑마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물론, 도시 전체를 감시하기 위해 펼친 마법도 문제가 되었으리라.

어차피 싸울 생각도 없었으니 저들이 얼마나 오든 상관없었지만.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빠져나갈···?!’

콰아아앙—!

순간적으로 펼친 방어 마법이 깨지며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크으으— 깜짝 놀랐군.]

찰나의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무언가에게 공격받았다.

다행히 타격 순간에 뿜어낸 마력 방벽으로 충격을 흡수하고 몸을 뒤로 날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나는 온갖 결계를 몸에 두르며 공격한 이를 살폈다.

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소년. 확실히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진혈, 인가?]

“오호··· 누군가 했는데. 이 정도 죽음의 기운이라니, 리치인가?”

백발에 붉은 눈을 한 진혈의 뱀파이어.

놈은 귀여운 소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감이 잘 안 왔는데, 직접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순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물이다.

“내 이름은 오보르. 브로코슬락 클랜의 진혈이다. 넌 ‘역천의 서약’ 소속인가? 그래서 우리가 가진 파편을 노린 거냐?”

[그래. 네놈들이 우리가 가진 ‘불사왕의 파편’을 노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선수를 쳤지.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나쁜 놈들 엿 먹이고 정보에 혼선을 줄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통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놈은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금 사방에서 포위하듯 접근하는 수하들을 기다리는 건지도 모르지.

‘진혈 하나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순혈 다섯에 잔혈 스물 이상이 추가되면 확실히 무리다.

아직 태양이 뜨려면 몇 시간 남기도 했고.

내 대꾸에 오보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가늠하듯 쳐다보았다.

“놈들이 숨어있던 마을이 누군가에게 공격받았다고 하던데. 네놈이 빼앗은 건 아니고?”

[하!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힘으로 우열을 가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고개를 들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나는 동공을 읽을 수도 없고, 땀도 흘리지 않는 몸.

목소리 또한 마력을 공명시켜 내는 소리일 뿐이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다. 네놈 때문에 이쪽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으니.”

어느새 주변 나무 위에는 수십의 뱀파이어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혈마법 결계를 그물처럼 둘러싸 도주로도 차단한 것으로 보였다.

‘왜 사방에서 조여들 듯 접근하나 했더니···.’

힘을 집중하면 뚫을 수는 있겠지만 저기 있는 진혈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내가 가진 언데드들까지 전부 동원한다면 가능성이 높지만, 상당한 전력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도망칠 곳은 없다. 네놈을 잡아 훔쳐간 파편을 뽑아내 주마.”

새로운 힘에 익숙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마주친 강자와 주변을 포위한 뱀파이어들.

명백히 위기 상황이었지만···.

내게는 그저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크크큭···. 너희는 나를 잡을 수 없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가 주지.]

그 때문이었다.

상황에 이입해 악당처럼 뭔가 있어 보이는 대사를 날려준 것은.

콰앙—!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보르가 공격해 왔다.

주변에 두른 결계가 출렁거리며 하나둘 찢겨져 나갔지만, 잠깐은 버틸 수 있었다.

곧이어 주변 뱀파이어들도 나를 향해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기억해 둬라. 나는 역천의 서약의 한스! 안온한 새벽에 소리 없이 다가가 심장을 꿰뚫는 말뚝이니! 그 무력함을 한탄하라. 내가 바로 너희들의 죽음이다!]

악당의 전매특허인 멘트를 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되는대로 주워섬겼다.

이성 한 편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지금 즐거우면 된 것 아니겠는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생각나는 대로 실컷 대사를 내뱉다가, 사방에서 덮쳐오는 놈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소환 해제.’

그렇게 아크리치 한스는 아우테리카 차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지구.

실컷 폭주한 대가로 한성현은 이후 몇십 분 동안 이불을 걷어차야 했지만···.

예정된 업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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