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펠라 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잔금입니다.”
“하하하. 뭘요. 저희는 당분간 이 도시에 있을 예정이니, 다른 볼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나는 라펠라 시까지 호위를 맡은 용병들에게 잔금을 치르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번에 고용한 용병들과는 큰 문제 없이 도시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라펠라 시군요···. 규모가 크네요.”
디아나는 아론의 손을 꼭 잡고 감탄하며 도시를 둘러봤다.
아잔투 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그동안 지나쳐 온 도시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도시였다.
“아무래도 수도와 가깝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며칠 거리에 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탈라리아가 있으니까.”
아무리 변방의 약소국인 탈리아 왕국이라지만, 수도 정도 되면 규모 면에서 차원이 다른 노릇.
주변 도시 또한 그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어떻게 작은아버지를 찾을지 걱정이네요···.”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름을 알고 무슨 일 하는지도 아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나도 이제 아우테리카 차원에서 짬밥을 어느 정도 먹었다.
그 정도 정보를 수집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도시에 머문 지 3일.
정보상을 찾아 디아나의 숙부 위치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정말 금방 찾으셨네요.”
“뭘, 돈만 충분하면 안 되는 게 없지. 급할 건 없으니 여유를 둬서 그렇지 더 빨리도 가능했을 거다.”
첫날은 마차를 처분한 뒤 숙소를 잡아 아이들과 쉬었고, 둘째 날에 정보상을 찾아 의뢰를 넣었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 정보를 받은 것이다.
“네 숙부는 남쪽 거리의 상업지구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군. 딱히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헛걸음하지 않게 돼서 다행이네요.”
식료품점으로 찾아가는 길.
디아나는 연신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왜 그러지?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직접 뵌 건 아주 어렸을 때니까요. 저를 기억이나 하고 계실까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별걱정도 다 하는구나. 어른들에게 몇 년은 금방이야. 오히려 언제 이렇게 컸느냐며 놀라서 반겨주실 거다.”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디아나.
멋쩍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아저씨는 아저씨네요. 얼마 전부터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성격이 바뀌었다고? 내가?”
“네. 말투도 변하셨잖아요. 뭔가 진중하고 차분하게? 뭐, 그것도 멋지긴 하지만요.”
가볍게 혀를 내밀며 미소 짓는 디아나.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랬다.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명확했다.
‘「페르소나」의 영향인가? 그동안 자연스럽게 변해서 의식하지 못했네.’
아크리치 한스에게는 외로움과 고통 등의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즉 관종끼가 주어졌었다.
그런데 뱀파이어 하인즈 2세에게는 냉정하고 차분한 성격이 주어진 것 같았다.
‘개체의 특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현된 건가···. 나쁜 일은 아니겠지.’
원한다면 얼마든 제어할 수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이 편해서 굳이 건드리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다른 특색이 없는 평범한 식료품 가게.
“어서 오십쇼~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다가가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안쪽에서 나오며 밝게 외쳤다.
“자, 작은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디아나예요. 여긴 제 동생 아론이구요···.”
“···안녕하세요오···.”
디아나가 아론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아론은 쭈뼛거리다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5년도 넘었다고 했으니, 어린 아론에게는 처음 보는 어른이나 다름없겠지.
“으잉? 디아나? 아론? 못 본 사이 정말 많이 컸구나! 그런데 너희들이 어떻게 여기에···.”
나는 당황한 가게 주인, 볼트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아잔투에서 남매의 부모가 사망하고 둘이서 힘들게 살아가다가 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까지.
“···크흡. 그, 그렇구나. 형님과 형수님이···. 그동안 고생 많았겠구나. 고생했다. 고생했어···.”
그는 사정을 듣자 울먹거리다가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남매를 끌어안아 주었다.
“아···아뇨. 저흰 괜, 괜찮··· 흑!”
“누, 누나아··· 울지 마···.”
따뜻한 포옹에 잠시 경직됐던 아이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이내 그를 마주 안고 대성통곡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다행이군.’
정보상을 통해 그에 대해 알아본 정보 중에는 그의 평판도 포함되어있었다.
악인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디아나에게 그를 찾지 못했다고 둘러대고 다른 수단을 취할 예정이었는데···.
‘이제 기름칠만 조금 하면 되겠군.’
밖의 소란에 놀라서 나온 그의 부인에게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내부로 들어갔다.
가게 뒤편에 딸린 생활공간에 들어선 직후, 바닥에 앉아 인형을 가지고 노는 서너 살 정도의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쿨쩍.”
코를 들이키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여자아이.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랐는지, 꿈지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총총거리며 다가와 부인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이쪽을 관찰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아 보이는 남매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작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
“아이고···. 이 어린 것들이 그동안 을매나 고생이 많았으면···.”
능숙하게 딸을 안아 들고 토닥거리던 부인은 안쓰럽다는 듯이 남매를 바라보고는, 우느라 엉망이 된 얼굴을 씻겨주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만 남게 되자 볼트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함께 여행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도 생업에 신경 써야 했으니까.
“주인장 계시오~?”
“예, 예! 어서 오십쇼~!”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볼트는 후다닥 뛰쳐나가 손님을 응대했다.
어차피 며칠은 더 도시에 머물며 지켜볼 생각이었으니, 나는 나중에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
“이, 이렇게 큰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아이들이 신세를 많이 졌는데···.”
다음날, 나는 볼트와 따로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 필요한 금전을 지원해 주기 위해서.
“아닙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그 아이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거든요. 이 정도는 딱히 부담이랄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아이들을 돌보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야 많은 돈이지만, 도시의 부를 독점하던 놈들을 홀랑 집어삼킨 나한테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디아나의 조력으로 얻은 거기도 하니 이 정도야 뭐. 여기서 더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할 정도지만, 지킬 수 없는 재물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마지못해 돈주머니를 받아들였다.
일단 거절하기는 했으나,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둘이나 늘어난 것은 확실히 부담이었으리라.
“제가 그동안 아이들과 정이 많이 들어서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후원하겠노라고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대신 아이들이 원하는 배움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연하지요! 제 아이와 차별 없이 친자식처럼 아끼겠습니다.”
정말 차별이 없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애초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지원금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후원하겠다고 한 이상 눈치가 보여서라도 박대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라펠라 시에 머문 지 일주일.
나는 남매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 아저씨. 그,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흡! 저, 저는 정말···.”
“으허어엉~ 아저씨!”
애써 울음을 참는 디아나와 대성통곡을 하며 안겨 오는 아론.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하며 정이 많이 들었다 보니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
“뭐,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자주 들리도록 하마. 그동안 볼트 씨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있어야 한다?”
가게의 일을 배우기 시작한 디아나와 4살짜리 사촌 동생을 돌보게 된 아론.
나는 두 아이를 끌어안아 토닥여주었다.
“자주면, 얼마나 자주요?”
“응?”
“자주 들리신다면서요. 어느 정도 주기로 오실 건데요?”
어, 생각 안 해봤는데.
똑 부러지게 물어오는 디아나의 말에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흠··· 못해도 1년에 한 번은 오도록 할게.”
“···1년이요. 어쩔 수 없죠. 그··· 못 오실 거 같을 땐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여유가 되실 때 한 번씩 들러주세요.”
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애써 미소 짓는 디아나.
전송진을 이용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그 마음이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연신 뒤돌아 남매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뭔가 찡하네. 쟤네들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는데. 자주 신경 써야겠다.’
여러모로 애착이 가는 아이들이었다.
아우테리카에서 맺은 첫 인연이기도 했으니까.
‘그럼 일단 수도로 가 볼까?’
지원금을 볼트에게 건네고 디아나에게도 두둑하게 비상금을 쥐여 주느라 수중에 돈이 별로 없었지만···.
하인즈 혼자 이동하는 데에는 딱히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도시를 나서고 해가 질 때까지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주변에 어둠이 드리우고.
푸드득!
한 무리의 박쥐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동이 틀 무렵, 밤새 이동한 끝에 나는 말을 타고도 며칠이 걸리는 탈라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탈리아 왕국의 수도···. 들어갈 수는 있으려나?”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정체를 숨길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수도를 통과하기엔 힘들지 않을까.
‘이쯤에서 하인리히를 부를까?’
굳이 수도까지 온 건 하인리히를 위해서였다.
얼마 전 한스로 마주한 성기사들에게 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성한 검을 휘두르는 무력, 양지에서 모두에게 존중받는 명예.
도시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교단에 대해서도 추가로 조사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를 따져본 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인리히를 입교시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수도 탈라리아에는 주신교단의 신전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언덕 위에서 수도를 바라보던—.
그 순간.
“흐음···. 당신, 뭐 하는 분이신지?”
갑자기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대경하여 뒤를 돌아보며 거리를 벌렸으나, 상대는 가만히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핏방울이 맺혀있는 손끝을.
핏—
그 순간 목덜미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급히 피를 제어해 지혈하며 경계심을 높였다.
‘젠장···. 일이 잘 풀리나 싶었는데.’
그녀는 손끝에 묻은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 날름 핥았다.
“역시··· 우리 클랜의 피를 계승한 아이인 건 틀림없는데.”
화사한 금발을 틀어 올려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화려한 붉은 드레스와 양산을 받쳐 든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
그 정체는, 아마 브로코슬락 클랜의 진혈(眞血)의 뱀파이어.
“피 냄새를 맡고 혹시나 하였는데. 당신, 동족 포식을 했군요? 그것도 같은 클랜의 일원을?”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죠? 당신의 직계혈족이 누구였는지 밝히세요. 계승시킬 피에 제대로 제약을 걸지 않았나 보네요.”
그녀의 붉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나며 사지를 옥죄어 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열리려 한다.
“어쨌든 클랜의 율법을 어겼으니 당신과 그 직계혈족까지 함께 처벌하겠습니다. ···그가 살아있다면요.”
‘···그렇군. 이게 마안(魔眼)인가.’
혈마력으로 붉게 발광하는 눈동자가 자신의 행동을 강제한다.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저항할 수도 없을 터.
“당신의 수준으로 저항은 무용합니다. 순순히 입을 여세요.”
물론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하아··· 이거 매번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 같은데. 몇 번째야? 빨리 힘을 기르든 해야지.’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이상의 강자들이 자꾸만 튀어나온다.
그건 이 세계의 정점에 서지 않는 한 계속해서 반복되겠지.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법 오래 버티는군요. 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앞에서 뭐라 떠들어대는 뱀파이어를 무시하고 만능 도주 수단인 소환 해제를 감행했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상관없기는 했으나, 살짝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쯧, 다음에 두고 보자.’
아마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