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32화 (32/284)

서울의 그림자 (2)

“자, 여기.”

가면을 쓴 남자가 편지 봉투 하나와 태블릿을 내밀었다.

나는 먼저 봉투를 뒤집어 내용물을 꺼냈다.

딸려 나오는 로또 용지 세 장.

“회차와 당첨 번호. 지금 확인해 둬.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흐음···.”

태블릿에는 로또 정보 사이트가 켜져 있었다.

대조해 보고 직접 확인하란 뜻이겠지.

나는 무심하게 태블릿을 옆으로 치우고, 준비해 온 지난 회차 로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대포폰으로 QR코드를 찍어 세 장의 1등 용지와 비교했다.

“···쓸데없는 수작은 부리지 않아. 이것도 신뢰도 장사니까.”

QR코드에 별다른 이상은 없고··· 다음은 금액이다.

28억, 22억, 15억.

사이트에서 숫자를 대조한 결과, 약간의 금액 차는 있지만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엔 당첨 용지를 하나씩 들어 자세히 살폈다.

“혹시 다른 장난질을 친 건 아니겠지?”

“그런 것도 상대를 봐 가며 하는 법이지. 딱히 목숨 걸 생각은 없다고.”

‘아예 하지 않는다고는 안 하는군.’

나는 그것들을 세심히 살피다 봉투는 내버려 두고 당첨 용지만 아공간 팔찌에 챙겨 넣었다.

일단 하인즈의 「혈마법」으로는 딱히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뱀파이어의 예민한 후각으로도 특별한 약품이 느껴지진 않았고.

‘나중에 집에서 먼 곳에서 한스의 「흑마법」으로 한 번 더 검사해야겠다.’

아무래도 하인즈보단 마법 전문인 한스가 직접 검사하는 것이 더 확실하겠지.

만사 불여튼튼 아니겠는가.

“아, 그리고 새로운 신분을 좀 구하고 싶은데. 소개 좀 부탁해도 될까.”

나는 빈 봉투와 태블릿을 그에게 다시 밀어주며 말을 이었다.

셋이나 되는 1등 당첨금을 한성현이 전부 수령할 수는 없었으니까.

가장 큰 액수인 28억은 한성현이 수령하더라도, 다른 두 개를 대신 수령해 줄 신분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가지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고.

“···그건 그쪽에서 하던 일 아닌가?”

“그랬었지. 이번에 풍비박산이 나기 전까지는.”

인신매매와 장기밀매.

자연스레 ‘실종자’에 가장 밀접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주인 없는 신분을 세탁하는 것 또한 그 조직의 주 업무였다.

“자료야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기술자들이 완전히 갈려 나가서 말이야. 남은 놈들도 겁을 먹었는지 도통 연락이 되질 않는군.”

기억을 읽는 것도 만능이 아니다.

강제로 머릿속을 헤집을수록 뇌에 무리가 가게 되고, 정보에 결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보에 우선순위를 설정해서 읽어내야 하는데, 당시엔 위조 신분을 만드는 잡범들에겐 관심이 없었던지라···.

“그렇다면야. 이 정도는 서비스로 알려주지.”

그리고는 몇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다음에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쪽도.”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디서 칼 맞고 죽지 말고 다시 만나자는 이 바닥의 덕담이었다.

달칵—

들어왔던 문을 열자 바깥에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가는 길을 안내했다.

제법 만족스러운 나들이였다.

‘그나저나 조직 하나 있으면 편하겠는데. 어디가 좋을까? 이 놈들도 제법 쓸 만해 보이긴 한데···.’

나는 안내하는 청년의 뒤를 따라 나가는 동안, 주변을 살피며 느긋하게 입맛을 다셨다.

***

“후우—.”

남자는 가면을 벗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저, 지부장님. 아까 그 양반 말입니다만···.”

거래 중 옆에서 보조하던 부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알아. 아무리 봐도 상회 소속은 아닌 것 같지?”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조사해 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상회’는 지금은 패망한 그 인신매매 조직의 멸칭이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굳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그 조직을 자칭했을까?

“아니, 됐어. 그냥 손 떼.”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너도 같이 있었으니까 알잖아. 괜히 목숨 걸지 말자고.”

애초에 그들이 상대를 가려가며 거래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함정 수사나 어중이떠중이를 거르고,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인 거래를 위해서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양지에 있을 양반은 아니란 말이지.”

“확실히, 아까 위협할 때 숨이 막히긴 했습니다. 제 쪽에선 보이지도 않았는데도요.”

“그치? 마인(魔人)이라서 그래. 아마도 흡혈귀.”

“엑···, 역시 그랬습니까?”

지부장은 그때를 떠올렸다.

창백한 피부에 날카로운 핏빛 눈동자, 숨이 막힐 듯 풍기던 피 냄새.

‘아마 일부러 정체를 드러낸 거겠지. 경고를 위해서. 흡혈귀면 혈맹(血盟)인가? 어쩌면 번천회(翻天會) 쪽일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된 이상 진짜 신분이 뭐든 어때. 우리가 새로운 고객을 받았고, 정상적으로 거래를 마쳤으면 그걸로 된 거지. 이번에 수익 좀 올렸잖아? 단골이 됐으면 좋겠네.”

괜히 위험한 인간을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뒷골목에서 지금까지 생존해 온 자의 삶의 지혜였다.

***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인적 없는 서울 외곽.

쿠웅—!

[크힉힉···]

달그락— 달칵!

일단의 언데드 무리가 폐공장을 둘러싸고 내부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지원 요청은? 어떻게 됐어?!”

“연락이 안 됩니다! 전화고 인터넷이고 전부 먹통이에요! 완전히 고립됐습니다!”

“이런 썅—! 모두 전투 준비해!”

이곳 공장의 책임자, 통칭 공장장은 이를 갈며 외쳤다.

지금은 숨어 다니는 신세지만 그들도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남은 이들.

열등한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닌 우월한 존재였다.

“크르릉—”

공장장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덩치가 커진다.

비대해진 상체를 구속하는 답답한 상의를 찢어발기고 바지 밑단을 뜯어냈다.

그는 터져버린 신발을 내팽개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의 육체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 얼굴.

이세계에서 늑대인간이 되어 돌아온 귀환자, ‘마인’이었다.

“흐으으···.”

“킥킥킥. 주, 죽여 버릴 거야···. 크히힛.”

그의 부하들도 정상적인 모습들은 아니었다.

공장장과 마찬가지로 늑대인간의 형상을 한 자, 핏빛의 눈동자와 긴 송곳니를 가진 흡혈귀, 피부에 뱀의 비늘이 돋아난 자 등···.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한 자들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두 눈에 가득 찬 광기는 인외의 존재들과 다르지 않았다.

콰앙!

마침내 외곽을 지키던 이들을 몰살시킨 언데드들이 심처로 몰려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빨과 손톱.

그 사이에는 공장장에게 익숙한 이들의 모습도 있었다.

“크흐으···. 쓰벌, 진짜 제대로 걸렸군.”

[키히히힛—]

그곳에는 창백한 피부의 공장 외곽 경비대장이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

자신과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강자였는데···.

‘이 짧은 순간에 전부 언데드로 만든 건가?’

습격을 파악하고 바깥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지원 요청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공장장이 이를 갈며 결전을 각오한 그때, 언데드 무리가 갈라지며 내부로 한 인영이 들어섰다.

어둠을 두른 듯 새카만 로브와 눌러쓴 후드 안에 비치는 기이한 웃음을 한 가면.

눈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귀화(鬼火)와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 한기.

마치 불길함을 인간의 형상으로 빚은 듯한 존재였다.

‘아니,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공장장이 밀려오는 공포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늑대인간이 되며 강해진 본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절대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과연, 더 볼 것도 없구나. 너희는 모조리 살처분이다.]

공장을 습격한 존재, 한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인 다수의 마인들, 그들이 있는 공간은···.

[사방에서 망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구나. 이렇게 죽음이 가득한 공간은 오랜만인데···.]

평범한 육가공 공장이었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이 가축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만 빼면.

피를 뽑기 위한 장치부터 시작해서 뼈를 분쇄하기 위한 장치까지.

나름의 구색까지 갖춰져 있었다.

“키힛! 네놈도 마인이면서 뭘 깨끗한 척이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인간들은 가축을 도살해 먹는데, 왜 우리는 하면 안 되지? 약육강식이야말로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기세에서 밀린 마인들 중 일부가 어떻게든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이 외쳤지만···.

한스는 그들의 발악과도 같은 항변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미친놈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생존자들이 있기는 했군. 자기들 딴엔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겠지.’

창고 쪽으로 파견된 언데드가 갇혀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보고해왔다.

건강 상태도 나빠 보이지 않아, 일단 그대로 둔 채 그곳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한스는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듯 열심히 떠드는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약육강식 좋지.]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

그에 열심히 떠들던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장내에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너희들의 몸뚱이가 아주 실해 보이는구나. 훌륭한 언데드가 되겠어.]

겸사겸사 머릿속도 좀 뒤져 보고.

약육강식인데다 꼭 필요한 일이니, 저들도 불만은 없을 터.

한스의 지시에 언데드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달칵! 달그락!

“크아악! 고작 시체 주제에!”

[키히힉! 키야하핫!]

“크르릉, 찢어발겨 주마!”

타앙— 탕! 탕—!

마인들은 온갖 전장을 헤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인 만큼, 언데드들을 상대로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총까지 꺼내 쏘는 놈들도 있을 지경.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던 한스가 곧바로 개입했다.

[키햐아아—]

“크윽, 이놈들 갑자기 힘이···!”

한스의 머리에 검은 왕관이 씌워지고 칠흑 같은 아우라가 퍼져나가 언데드들에게 깃들었다.

사아악—

“아아악! 아파! 몸이! 내 몸이!”

“앞, 앞이 안 보여!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내, 내가 말하고는 있는 건가? 모두 내 말 안 들려?!”

그의 가벼운 손짓에 뻗어나간 온갖 저주의 기운이 마인들을 덮쳐 하나씩 무력화해 나갔다.

하나둘 쓰러지는 마인들.

마지막으로 사로잡힌 공장장을 끝으로 더 이상 저항하는 이들은 남지 않았다.

“끄흐윽···. 하회탈이 이 정도였다니···.”

공장장은 언데드들에게 제압당한 채 한스의 앞으로 끌려가며 중얼거렸다.

하회탈에 대한 소문이 퍼진 만큼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공장이 하회탈이 활동하던 지역과 제법 거리가 있기도 했고, 철저히 숨겨져 있었던지라 습격을 예상치 못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한스가 마인을 사냥하고 기억을 읽어 관련자를 추적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자아,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나는 죽음의 지배자이니, 너희는 안식을 얻고 영원히 나의 힘이 될 것이다.]

한스는 자상하게 말하며 공장장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효과가 났는지 그의 떨림이 더 심해졌을 뿐이지만.

[물론 그 전에 셈은 치러야겠지? 살짝 따끔할 거다. 그렇게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검은 가죽 장갑이 그대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곧바로 흑마력이 그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난 안 해봐서 모르지만. 큭큭큭···.]

“끄—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경련하는 몸뚱이.

그의 몸을 깔고 내리누르던 언데드들이 들썩거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늑대인간의 질긴 생명력만큼 제법 길게 이어지던 비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를 제압하던 언데드들이 물러서자, 그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비칠비칠 일어섰다.

[역시 튼튼하니까 좋구나. 그럼 다음은 누구로 할까?]

제압된 마인들이 한스의 시선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주 잠깐의 유예일 뿐인데도.

그 후로 제법 긴 시간 동안.

결계로 감싸여 바깥에 울려 퍼질 일 없는 비명만이 공장 내부를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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