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34화 (34/284)

지구의 흡혈귀 (1)

사실 흡혈귀 자체는 한스로 몇 번 접해본 적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공장을 습격했을 때도 한 명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는 하인즈가 거래 중이었고, 그놈도 서번트 급에 불과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는 기억을 읽으면 되니까 번거롭게 살려서 마주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갑자기 마주한 다른 차원의 흡혈귀에 당황했다.

그것도 아마 하인즈보다 강한 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뭐,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나는 ‘녹터니아’ 출신이다. 지구로 돌아온 지는 5년 정도 됐군. 이름은··· 일단 ‘감마’라고 불러.”

준수한 외모와 친근한 미소, 사교적인 말투.

그는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인즈. 그쪽 예상대로 이제 막 지구로 돌아왔고, 출신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더는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편하게 대답하던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급성장한 정신력이 순간적으로 폭증해 사고가 가속한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시간이 늘어지며 공간이 서서히 정지했다.

‘나는 왜 순순히 대답하고 있지? 만난 지 5분도 되지 않은 처음 보는 자에게? 먼저 소개를 했으니까? 저자가 말한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이 있나?’

의심이 인 순간, 「마인드 허브」에 이질감이 감지되었다.

정신을 파고드는 이능의 힘.

자연스러운 감정에 스며들어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호감이 가는 외모와 언동, 자연스럽게 대답할 상황을 유도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명경지수」마저 온전히 방어하지 못하고 위화감을 감지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니, 그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대놓고 사용하지 않은 건, 그것이 능력의 한계인지 은밀한 발동을 위해 신중을 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조작계 이능. 저자의 고유스킬인가? 아니면 흡혈귀로서의 능력?’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경계도를 높였다.

중요한 것은 내가 대답하던 도중이었다는 것.

이름이야 어차피 개체명일 뿐이니 상관없고, 갓 돌아왔다는 것은 설정에 불과하다.

그에 대한 경계심을 내비치지 않고, 일단 출신 차원은 숨긴다.

“···‘도트미어’ 차원에서 왔다. 내가 처음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선 정보를 찾을 수 없더군.”

“흐음, 역시 그랬나.”

정상적으로 돌아온 시간 속에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감마는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그동안 제법 많은 흡혈귀를 만나 봤지만, 너 같은 피 냄새는 처음이거든. 신기하지 않아? 수많은 차원이 있고 그중엔 흡혈귀가 있는 차원도 많은데, 그들의 피의 특성이 모두 달라.”

뭐, 그건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을 이은 그는 나를 관찰하듯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도트미어의 흡혈귀라, 그러고 보니 너는 거기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지? 이게 차원마다 수준이 다르거든. 너 정도면 제법 괜찮은 대접을 받았을 것 같은데.”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다시 정신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 저항하지 않으며 적당히 어울려 주었다.

“뭐, 중간 간부 정도는 됐지.”

“호오, 제법 수준이 높은 차원이었나 보네. 그런데 그 정도까지 힘을 키우려면 제법 흡혈도 많이 했을 텐데, 고생이 심했겠어.”

“필요한 경우에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그는 원래 말이 많았는지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호기심이 많아서 말이야. 그쪽 흡혈귀한텐 뭔가 특징적인 능력이 있나? 듣기로 어디 흡혈귀는 불사에 가까운 재생능력을 가졌다고 하더군. 정말 부럽기 그지없어.”

저쪽도 많은 이야기를 하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자는 식으로 나오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는 의심받지 않을 핑계를 대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피했다.

“그건 잘 모르겠군. 내가 다른 흡혈귀들을 본 적이 없으니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거든.”

“아··· 그건 그렇군.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었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감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감마. 아까 많은 흡혈귀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설마 방금처럼 일일이 찾아다닌 건가? 우리 흡혈귀들은 마인 취급이라 항상 숨어 다녀야 할 텐데?”

“흐음···.”

내 질문에 그는 묘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우리가 죄인도 아니고 언제까지 숨어서 지낼 수만은 없잖아?”

그는 처음부터 원해서 흡혈귀가 된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은 너무하지 않냐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뭉쳐야지. 나는 흡혈귀들이 모인 조직, 혈맹 소속이다. 6레벨이지.”

“혈맹? 6레벨?”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자리가 좋지 못하군. 따라와.”

그는 어느 정도 이쪽에 대한 파악이 끝났는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어쩌면 나 정도는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걸지도.

그렇게 이동한 곳은 도로 한편에 정차된 스포츠카였다.

그는 운전석에 오르며 조수석 쪽을 턱짓했다.

부르릉—

차에 오르자 부드럽게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감마.

“어디로 가는 거지?”

“말로만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지 않겠나?”

“···혈맹 본부로 가는 건가? 날 어떻게 믿고?”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본부는 아니야. 일종의 지부라고 해야 할까···. 사실 딱히 본부랄 게 없거든. 점조직에 가까운 형태라.”

그렇다고 또 완벽한 점조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덧붙인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각 지역에서 서로 협력한다고 보면 돼. 점조직보다는 중계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모인 무리를 ‘크루(Crew)’라고 부르지.”

하긴, 집단을 이뤘다고 해도 평소엔 숨어 다녀야 하는 마인들이다 보니 대놓고 뭉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믿냐니,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힘들 때 서로 도와야지.”

훈훈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감마.

퍽 감동을 주는 말이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하인즈의 정신을 파고드는 이능의 힘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같은 말을 했던 녀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든든한 동료가 된 말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 역시 좋은 말이었다.

“그리고 또 알아둘 게 하나 있군. 내가 6레벨이라고 했었지? 지구에서는 ‘레벨’이 흡혈귀의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이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기준으로 부르다 보니, 정작 모두가 모인 지구에서는 서로 뜻이 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귀족의 오등작으로 나눈 곳도 있고, 진조니 사도니 하는 데도 있었지. 참고로 녹터니아는 체스의 말로 구분했어. 난 비숍이었지.”

그래서 당시 각지를 대표하는 흡혈귀 강자들이 모여 합의한 것이 ‘레벨’ 체계였다.

“정확히는 유럽 쪽이었지만. 그때는 유독 거기에 강한 흡혈귀들이 많았거든. 그쪽에서 정립된 체계가 자연스럽게 수입되어 우리도 적용하게 된 거지.”

각자의 차원에서 그 땅의 특성에 맞게 뿌리가 갈라졌지만, 모든 흡혈귀가 공유하는 특성이 하나 있었다.

모든 차원을 통틀어 흡혈귀의 힘의 근간이 되는, 핏속에 담긴 ‘흡혈인자’가 그것이었다.

그 흡혈인자의 농도를 측정하여 세부적으로 나누는 것이 레벨 체계.

“다 왔다. 각자 집에서 따로 생활하고 가끔 모일 때 쓰는 데라 좀 작아.”

스포츠카가 멋진 3층 주택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이놈의 금전 감각은 나와 다른 모양이었다.

“들어가자. 안에 흡혈인자를 측정할 수 있는 기기가 있어.”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보고 실실 웃는 감마.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머릿속에 파고든 이능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이 놈이 정신조작을 강화하는 조건이었던 것 같다.

‘어쩐지 말이 많더라니. 덕분에 좋은 정보들을 많이 얻긴 했지만.’

“뭐해? 빨리 움직여.”

여기까지 왔으면 상황이 다 끝났다는 것일까?

나는 행동을 강제하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내려 그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혈마법」이 있는데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결계가 느껴지다니. 은폐의 수준이 장난 아닌데?’

태연하게 감상하며 감마를 따르던 도중, 앞서가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인상을 찌푸린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안쪽에 여섯 명과 세 명이 서로 대치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흡혈귀 특유의 피 냄새.

하지만 그 중 한 명에게선 감마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의 등장에 여섯 명 측이 반색했다.

동시에 맞은편에 있던 셋 중에 가운데 서 있던 이, 피 냄새가 나지 않는 여성이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이제야 오셨네, 도한수 씨. 오래 기다렸다고?”

“후우, ‘감마 도’라고 불러라.”

“그래, 그래. 감마도 씨, 내가 왜 왔는지는 알지?”

그녀는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감마의 앞으로 걸어왔다.

덕분에 정면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흡혈귀인 걸 감안해도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보는데. 아니, 아닌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굉장한 미인이다.

저 정도 매력을 지닌 여성을 쉽게 잊을 리가 없는데.

묘한 기시감에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그래, 진소란 씨.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하! 갑자기? 예의? 그쪽이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않았으면, 그 역겨운 얼굴 보러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언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떠오를 듯 말 듯 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얼굴에 저 목소리. 어디 밖에서 본 건 아니고, 그렇다면 인터넷인데···?

‘맞아! 오키드. 인터넷 방송인이었지. 예쁘다고 커뮤니티에 캡처 사진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때 몇 번 봤었어.’

그때는 화장으로 인상을 바꾼 건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어코 기억해 내자 답답함이 사라지고 정신적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내심 흐뭇해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쪽은 처음 뵙는 분이신데, 누구시죠?”

이쪽의 정체를 묻는 질문.

하지만 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감마의 이능에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긴 상태였으니까.

‘거부하려면 할 수 있지만···,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볼까.’

“내 손님이다. 그쪽하곤 상관없으니 신경 끄시지?”

슬그머니 내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에게 쏘아붙이는 감마.

하지만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을 텐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설명 좀 해 주겠나?”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진소란이 감마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쪽이 흡혈귀들을 납치해서 뭔가 하고 있잖아! 이번엔 우리 쪽 보호를 받던 크루원을 데려갔다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과연, 처음부터 작정하고 흡혈귀들을 잡아들이던 놈이었군.’

진소란과 두 명의 일행은 기세를 돋워가며 그를 압박했다.

그에 감마의 동료로 보이는 이들도 이쪽으로 합류해 다시 대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참고로 우리가 여기 온다고 크루에 알리고 왔으니까, 우리가 돌아가지 못하면 곧바로 상부에 알려질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녀와 일행은 수는 적지만 기세는 감마 패거리에 밀리지 않았다.

아무렴 셋 다 감마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으니까.

오히려 진소란은 감마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작정하고 정예들만 데리고 불시에 들이닥친 거겠지.

“그쪽에 있는 사람도 이번에 납치해 온 거겠지? 대체 무슨 속셈이야?!”

“후우···.”

감마가 눈가를 찌그러뜨리며 그녀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명령을 내려서 부정하게 해 봤자,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모습만 연출되겠지.

그에게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리는 능력은 없었다.

“쯧, 시건방진 애송이가 주제도 모르고···.”

“아하~?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겠다?”

진소란이 싸울 태세를 갖추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동료들도 각기 전투를 준비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저년 잡아. 재료로 쓴다.”

“하! 쉽게 당할 줄 알···, 크흡!”

콰지직— 콰앙!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녀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등을 지키던 동료가··· 아니, 동료였던 근육질의 사내가 서서히 주먹을 내렸다.

────────────────────────────────────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