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35화 (35/284)

지구의 흡혈귀 (2)

‘어, 이거 흥미진진한데?’

설마 했던 배신이라니.

혹시 저놈도 감마의 정신지배를 받는 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크흑, 민영! 네가 왜···? 어째서!”

척추가 박살 난 채 바닥을 나뒹구는 진소란.

시간만 충분하다면 흡혈귀의 재생력으로 회복이 가능하겠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그사이 감마의 부하들이 기다란 꼬챙이를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저리 꺼져!]”

콰아앙—!

그녀의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온 충격파.

달려들던 흡혈귀들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반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크으으— 네, 네놈들···.”

전신이 꼬챙이에 꿰뚫리고 상처가 얼어붙었으며, 칠흑 같은 검은 쇠사슬이 그녀의 이능을 봉인했다.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지만 기습까지 받은 상태에서 이 자리의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후우,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고 하는 거다.”

감마가 이죽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처음 기습한 민영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고, 또 다른 동료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동료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마를 노려보았다.

“평화? 좋지. 하지만 그것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거다.”

그는 제압당해 쓰려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설교하듯 말했다.

“우린 강하다. 널리고 널린 가축 같은 인간들보다 훨씬 강하지. 하지만 우리는 열등한 놈들의 눈치를 보며 숨어 살아야 한다. 그 역겨운 위선자들 때문에.”

“단단히 미쳤군. 스스로 인간이었던 시절을 부정하는 건가? 이제 흡혈귀가 됐다고?”

“뭐··· 그랬던 시절도 있었지.”

감마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뭐라 항변하든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받았다. 목숨을 건 전장과 수많은 수라장을 이겨내 지금 이 자리에 섰지.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그는 연설하듯 외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동료들은 물론 진소란과 같이 온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 우리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언제까지? 어디 당당하게 나설 수도 없고, 이름을 떨칠 수도 없다. 그저 숨어서 연명만 하는 삶, 그런 삶에 의미가 있나?”

“개소리! 애초에 강경파에서 매번 사고를 쳐 대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거잖아! 처음부터 서로 양보하며 대화를 나눴으면, 충분히 공존할 수 있었어!”

“글쎄, 그건 네 생각일 뿐이겠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예상외로 그녀의 항변에도 감마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온건파에서 함께해 왔던 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의 시선을 따라 진소란이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외면하는 이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는 민영.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던 민영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온건파의 방침에 따라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그러니 회의감이 들더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평생? 기껏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지난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지금까지 눈을 감고 있던 일행도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들의 반응에 진소란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즐기던 감마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애초에 우리는 포식자다. 그런데 왜 우리가 숙여야 하지? 그래, 일단 수가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겠지. 머릿수야말로 영향력의 척도니까.”

고개를 숙인 진소란과 스스로에게 도취해 떠드는 감마.

나는 이 촌극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정보를 정리했다.

범죄 동기도 훌륭한 정보였으니까.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압도적인 힘이!”

하지만 여기는 이세계가 아니다.

이세계에서는 성장에 보정을 받아 빠르게 강해졌지만, 지구로 돌아오면서 그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제 우리는 카르마를 쌓을 수도 없고, 이전처럼 빠르게 강해질 수도 없다! 원 세계의 흡혈귀들처럼 꾸준히 흡혈해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것마저 제한한다고? 하! 혈액팩?”

직접 피를 흡혈하는 행위 자체에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혈액을 마셔서 힘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데에서 업을 쌓고 힘을 획득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아무런 염(念)이 담기지 않은 혈액팩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 있을지언정 힘은 증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이어트 식단 같은 건가?’

혈액팩 만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겨우 연명하듯 생을 이어가는 것에 가깝고, 그마저도 장복하면 가진 힘마저 서서히 감소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빠르게 강해질 방법을 찾아 헤맸고, 기어코 그 방법을 찾아냈다.”

눈치가 있는 자라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그것은 진소란도 마찬가지였다.

“너··· 이 자식 설마? 금기에 손을 댄 거냐?”

지금까지 납치되었다던 흡혈귀들이 전부 어디로 갔겠는가?

동족 포식.

흡혈귀가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

하지만 그 효과 이상으로 부작용이 극심하다.

그것은 아우테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구에서의 악명은 차원이 달랐다.

“금기가 괜히 금기가 아니야! 너희는 또다시 그때의 비극을 되풀이할 셈이냐?!”

귀환자 사태 초창기.

전 세계적으로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중에는 흡혈귀들이 일으킨 사건도 많았다.

어느 차원이나 동족 포식은 불문율이었지만, 개중에는 그것을 이겨내고 강해진 후에 지구로 귀환한 흡혈귀들도 있었다.

이미 살짝 맛이 간 상태였던 그들은 지구로 돌아와서도 강해지기 위해 같은 흡혈귀들을 습격했고, 그 결과···.

“다시 광혈귀(狂血鬼)를 만들어 낼 셈이야?!”

타 차원 흡혈귀의 피를 받아들이면, 서로 다른 흡혈인자가 결합해 진화한다.

열성인자는 도태되고 우성인자만 발현되면서 압도적으로 강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으로 극심한 정신 오염이 일어난다는 거군.’

유전자 단위의 진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니, 그 대가로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그 결과 피에 미친 광혈귀들이 날뛰면서, 세계적으로 흡혈귀에 대한 위험성이 제기된 것이다.

사실 흡혈귀들이 이렇게까지 박해받는 데에는 그때의 사건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상부에서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떤 끈을 쥐고 있건 간에, 통째로 날아가 버릴 거라고!”

이후 지구에서 동족 포식은 금기가 되고, 광혈귀는 같은 흡혈귀에게도 척살대상이 되었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겠다니···.

“말은 끝까지 들어. 물론 동족 포식을 이용한 것은 맞지.”

이어서 감마는 피식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수한 연구와 협력 끝에, 핏속에 담긴 사념을 최대한 제거하고 안전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만큼 효과도 줄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지.”

혈마법과 흑마법은 물론 주술, 저주, 연금술 등 각 차원의 지식을 모아 이뤄낸 업적.

그 과정에서 외부의 도움을 상당히 받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 자식, 왜 저렇게 설명충마냥 떠들고 있나 했더니. 또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잖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니 그의 언동에 영향을 받는 무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약한 이들은 그에게 좀 더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강한 이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 진소란을 배신한 자들에게 남아있던 미약한 죄책감도 사라졌다.

“이 정도면 궁금증은 다 풀렸지? 그리고 남은 이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같은 혈맹끼리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이제 끝을 내려는지 감마는 그녀에게 다가가 앉으며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저 두 사람이 협력해 주기로 했으니까, 알리바이는 걱정하지 마. 너는 적당히 돌아가는 길에 가디언에게 죽은 걸로 해 두지.”

“약속은 지켜라. 그녀가 여기로 온다고 했을 때, 우리도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온 거니까.”

“물론이지.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재료도 생겼으니, 당신들을 우선으로 약을 지급하도록 하지.”

시원하게 대답한 그는 비참한 모습의 진소란을 내려다보았다.

녹터니아에 있을 때부터 가치관이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쳤던 여자다.

이걸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뭐, 마지막 가는 길이니 편하게 보내주지. 잠시 자고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

“너···!”

뭐라고 외치려던 그녀는 감마가 쏟아부은 혈마력에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안쪽 방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예기치 못한 일로 오래 기다리게 했군. 뭐,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겠지? 이거 미안하게 됐어?”

실실 웃으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감마.

드디어 이쪽을 봐 주는군.

“아니, 제법 재밌었으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며 느긋하게 대답하자,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부하에게 눈짓했다.

“···5레벨입니다. 재생력이 좀 강한 편이긴 한데, 특이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감마는 다시 태연한 얼굴이 되어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 있던 부하한테 수준을 측정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아우테리카의 순혈이 대충 5~6레벨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허세인가? 어떻게 내 제압을 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5레벨 혼자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확실히 그렇다.

정확한 레벨은 잘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순혈 급만 넷이고 나머지도 잔혈 이상이다.

빠져나갈 거였으면 진소란이 한창 반항할 때 움직이는 게 나았으리라.

‘이제는 딱히 그럴 필요 없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번에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한번 직접 써먹어 봐야지 않겠는가.

“어디 보자··· 아홉인가?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다니, 아홉 명분이나 먹으면 얼마나 강해질지 기대되는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여전히 태연한 내 모습에 감마는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설명해 주지 않았나? 광혈귀 사태가 그런 이유로 벌어진 것이었다니. 이런 비사도 알게 되고, 오늘은 여러모로 유익한 날인 것 같아.”

“그냥 미친놈이었군···.”

그는 더는 말 섞기도 싫다는 듯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감마의 신호에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놈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아아아—

갑작스레 퍼지는 한기.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리에 모인 이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고, 일순간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했지만···.

어느새 건물 내벽 전체를 어둠이 뒤덮고 있었다.

[은폐 능력은 제법이었다만, 보안은 영 부실하구나.]

어둠 속에서 한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를 파악할 때 내부에 있는 하인즈의 도움을 살짝 받기는 했지만, 이제와선 딱히 상관없는 문제겠지.

“···하회탈? 어떻게 여기에?!”

감마는 대경해 소리쳤다.

은폐 능력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결계가 발각당한 것이다.

당황해 상황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 아까부터 유독 태연하던 하인즈가 들어왔다.

“너, 너···! 네놈이 끌어들였구나···!”

어떤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이 뭔가를 한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저 태도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렇게 확신해 이를 갈던 감마 못지않게 당황한 이가 있었으니···.

“저, 가··· 감마님···!”

하인즈의 레벨을 말해 주었던 간파 능력자였다.

하회탈이 당장 움직일 낌새를 보이지 않자, 감마는 눈만 힐끔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

“저, 이 정도 기운은 저도 처음 보는지라 확실하지 않은데···!”

“답답하게 뭐 하는 거야!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횡설수설하던 그는 감마의 호통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8레벨···! 최소 8레벨입니다!”

다시 한번 장내가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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