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 (1) -(무료 마지막)
“크르륵, 크륵···.”
회색 털을 지닌 마물 한 마리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치 고릴라를 연상케 하듯 비대하게 발달한 두 팔로 간신히 몸을 지탱한 마물.
놈은 이미 몸 곳곳에 난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로 전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크어어어—!”
마물이 분노에 찬 괴성을 터트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갑작스레 자신을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오랜 세월 이 근방에 터를 잡은 터줏대감이었다.
이 몸이 걸레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어둠 속의 추적자들은 그런 놈의 결의를 고려해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최대한··· 상하지 않게. 조심해라. 또 혼난다.]
숲의 그림자에서 스며 나오듯 등장한 언데드들이 마물의 주변을 포위했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한스 휘하의 데스 위저드, 말콤이었다.
[지저의 속박.]
바닥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암석 덩어리들이 뭉쳐 마물의 사지를 구속하는 동시에, 주변을 포위한 언데드들이 한꺼번에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크워어억!”
하지만 놈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비대해진 양팔에, 그것을 구속한 암석 덩어리에 균열이 일었다.
콰드득—
그렇게 팔에 달라붙은 암석을 깨부순 후.
녀석은 바닥을 내리쳐 다리를 붙든 구속마저 벗겨냈다.
그 와중에 달려든 언데드들에게 몸 이곳저곳이 찔렸지만, 마물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조심. 조심! 죽이지 않도록. 오염되지 않도록. ···역시 어렵군. 반항이 만만치 않아···. 지저의 속박.]
그것은 온전히 마스터의 주문 때문이었다.
산 채로, 오염되지 않게, 되도록 멀쩡한 상태로 포획해 올 것.
죽여서 시체만 가지고 갈 거였으면 말콤 혼자서도 진즉에 끝났다.
산 채로 포획만 하면 됐다면 흑마법과 언데드들의 연계로 쉽게 해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데드.
근본부터 죽음에서 태어난 자였고, 그 에너지의 근간은 흑마력이다.
병약한 이들에게는 그저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기운을 흩뿌리는 존재인 것이다.
숨 쉬듯 죽음과 저주를 흩뿌리는 그들에게 상대를 온전히 사로잡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말콤에게는 흑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제약이 생겼으며, 다른 언데드들도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으니까.
그 목표가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기절시키기도 어려운 마물이라 더더욱 문제였다.
“크르륵···.”
그렇게 갖은 노력을 다해 최대한 흑마력의 영향이 덜한 마법을 사용하고, 언데드들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끝에···.
말콤 일당은 간신히 놈이 저항하지 못하게 제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사지를 구속당한 채 언데드 아래에 깔려 버둥거리는 고릴라 형 마물.
[성공···. 이제 귀환한다.]
하지만 사건은 늘 그렇게 방심한 사이에 벌어지는 법이었다.
“크엉—!”
콰드득!
[아.]
잠시 마음을 놓았던 찰나의 그 순간, 최후의 발악을 시작한 마물이 자신을 찍어 누르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까드득! 까득! 꿀꺽—
그뿐 아니라 뜯어낸 발목을 입 안에 넣고 야무지게 씹어대다가 그대로 삼켜 버렸다.
곧바로 달려든 언데드들이 마물을 다시 한번 제압했으나, 이미 삼켜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온전하게 포획해야 하는 마당에 배를 가를 수도 없었으니까.
[음···.]
언데드가 입은 손상이야 흑마법으로 간단히 수복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언데드의 신체 일부는 딱히 몸에 좋은 식재료가 아니었으니.
[마물은 튼튼하니까 저 정도는 괜찮을지도···.]
평소 아무거나 주워 먹는 것이 마물의 식성이었으니, 언데드 정도는 별것도 아닐 것이다.
말콤은 그렇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곱게 포장된 마물을 한스의 실험실로 옮겼으나···.
퍽!
물론 괜찮지 않았으므로, 거듭된 실험으로 예민해진 한스에게 대판 깨진 말콤은 다시 사냥을 위해 밖으로 나서야 했다.
너무 맞아서 살짝 닳아버린 뒤통수를 흑마력으로 수복하면서.
***
한스는 두 눈을 감고 명상하고 있었다.
물론 눈꺼풀이 없으므로 진짜로 감을 순 없었지만, 내면의 세계에 깊게 침잠하며 바깥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 동일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다! 키메라 공학 100일 완성>
<톡센 정리로 알아보는 생체 연금>
<독과 약은 한 끗 차이>
「금단의 지식」에 담긴 무궁무진한 지식을 살피고, 그것을 응용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담긴 키메라 등 생체 연구 자료들과 번천회의 실험 정보를 합치고, 직접 확인한 결과들을 대입해 결과를 도출한다.
이윽고 정신을 되돌린 한스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할리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흠, 용혈은 제대로 몸에 정착한 것 같은데.]
실험이 이어진 지 3개월이 가까워진 지금, 동굴의 풍경은 전과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이 담긴 플라스크, 보존 마법으로 싱싱하게 보관된 생체 조직, 온갖 기괴한 모양의 실험 도구까지.
그뿐 아니라 곳곳에 위치한 기괴한 마법진과 마도구들이 서늘한 빛을 명멸하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광기에 빠져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자의 실험실 그 자체.
오컬트까지 섞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질이 나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약간 뻐근한데? 아직 적응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야.”
[일단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보지. 생각보다 반응이 빨라. 이제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하군. 역시 이 몸이야. 크흐흐···.]
실험은 순조로웠다.
그로부터 하루.
“큭,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이···.”
[흐음, 부작용인가? 「적응」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강도를 줄이는 게 좋겠군.]
다시 사흘 뒤.
“크헉— 쿨럭! 컥!”
[음··· 「초회복」의 한계를 넘어섰나. 아쉽도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곧바로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조절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
[···의식이 연결되지 않는군. 이제 와서 할리를 잃을 수는 없는데···. 으음, 도박을 한 번 해봐야 하나? 남은 용혈을 전부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한스와 할리의 공동 연구가 시작된 지 세 달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음?”
[드디어 정신이 연결되었군! 도박이 성공해서 다행이야. 용혈을 전부 사용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할리의 몸속에 남아있는 상태니 연구는 계속할 수 있겠지. 큭큭큭···.]
“···그런데 몸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
그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적응」이 특수스킬「돌연변이」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육체변이」를 획득합니다.》
《개체의 회복력이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스킬「초회복」이 스킬「재생」으로 진화합니다.》
“오?”
[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에 둘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실험 성공이군.]
아우테리카의 시간으로 약 백 일, 지구의 시간으로는 열흘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물론 놈들이 원하던 결과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기인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이쪽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돌연변이」는 외부의 유전자를 통해 자신을 진화시켜 나가는 특성이니,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다르지 않기도 했고.
‘그 와중에 「재생」을 얻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소득이군.’
아마 실험을 위해 재생력이 뛰어난 마물들의 피를 수혈한 게 원인이 되었겠지.
「돌연변이」를 획득하자마자 얻은 첫 번째 성과였다.
그런데 기뻐할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보유할 수 있는 아바타의 개체수가 증가합니다.》
아바타를 하나 더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음···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지금까지 아바타의 개체 수 증가는 카르마 상점의 강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니까.
자연 성장을 통해 아바타가 늘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소소한 성장은 몇 번 있었지만. 이번에 성장하게 되면서 어떤 임계점을 넘은 건가.’
하긴, 슬슬 성장치가 쌓여 뭔가 성과가 나타날 시기이긴 했다.
카르마 상점을 통해서 급격한 강화가 가능하다는 말은, 자연적인 성장을 통해서도 언젠가는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다섯 번째 아바타인가···. 이제 막 할리를 쓸 만하게 만든 참인데.’
새로운 아바타의 활용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이전과는 달리 즐거운 고민이었다.
***
하인리히가 성기사가 된 지 4개월째가 되던 날.
그의 이번 근무지는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를 지키는 광휘수호 성기사단이었다.
이곳은 성기사 중에서도 신성력이 높아 신앙이 증명된 이들만이 입단할 수 있었는데,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상부 덕분인지 연수 차원에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간 꾸준히 성장한 하인리히의 신성력은 이제 대사제급에서도 상위권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안내를 담당한 것은 광휘수호의 일원인 푸른 머리의 여성 성기사, 라이린 경이었다.
“내부 경비라고 해도 별다를 건 없습니다. 이미 다른 데서 해 봐서 아시겠지만, 바깥에서부터 몇 겹이나 방비가 이어지니까요. 거기다 여긴 기사단장님들이나 대주교님들도 머무시는 곳이라···.”
거기에 더 안쪽에는 성녀와 추기경, 교황까지 있다.
물론 어지간하면 그들이 직접 나설 일은 없겠지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성녀는 둘째 치고.’
“그래도 경비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중요 거점으로 향하는 길목은 실수로라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있죠.”
“중요 거점이라면··· 어떤 곳이 있나요?”
높으신 분들의 거처나 비밀 금고 같은 곳이겠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인솔을 맡은 라이린에게 물었다.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
하지만 그녀는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흠··· 이 정도 신성력이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대신전의 구석진 곳으로 안내하는 그녀를 따라, 하인리히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경비를 하면서도 와본 적이 없는 인적이 드문 곳.
정확히는 경비를 할 필요가 없던 곳이었다.
똑똑—
“광휘수호에서 왔습니다. 신입이 왔는데 서약이 필요합니다.”
가볍게 두드린 노크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쪽에서 한 사내가 나와 조용히 그들을 내부로 인도했다.
‘이단심문관.’
검은 사제복과 눌러쓴 후드, 입가를 가린 마스크까지.
이곳은 주신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말이 없는 사내의 뒤를 따라, 왠지 모르게 어두운 듯한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 창문이 없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저분 앞에 앉아서 앞에 놓인 문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안내받은 곳에는 테이블 위에 문서 한 장이 있었고, 맞은편 의자에는 한 이단심문관이 앉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상단에 ‘광휘수호’라고 적힌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니, 딱히 특별한 것 없는 보안 서약이었다.
업무를 하며 알게 된 내용에 대해 침묵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각서.
그것을 읽으려고 한 순간.
스윽—
앞에 앉아 있던 이가 한 손을 올려 하인리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움찔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문서의 내용을 읊었다.
“······그에 따라,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묵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문서의 낭독이 끝나고.
이마 위에 올려진 손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
“······?”
그리고 눈앞의 이단심문관은 조용히 손을 거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끝났습니다. 나가죠.”
이후 라이린의 인도를 받고 다시 밖으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들 외의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저기는 원래 저렇게 한마디도 없이 조용합니까?”
“음, 앞으로도 들을 일이 없는 게 좋습니다. 목소리를 냈다는 건 그만큼 안 좋은 상황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굳이 그 안 좋은 상황이 뭔지는 물을 필요 없겠지.
“그래서 뭐 한 겁니까?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금제?”
“하하··· 금제라니요. 축복입니다. 침묵의 축복. 효과는 자의든 타의든 특정한 정보를 누설할 수 없게 하는 것. 대단하죠?”
금제잖아!
신성력이 기반이 된다는 것만 빼면 다른 금제랑 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축복인 만큼, 당사자의 머리를 터트린다든가 하는 일은 없겠지?’
“하아···, 그래서 그 중요 거점이 뭐기에 이렇게 ‘침묵의 축복’까지 받을 필요가 있는 겁니까?”
“흠,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저도 침묵이 걸려 있어서 절차를 따라야 발설할 수 있으니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게 기다린 시간은 절대 잠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거쳐 알게 된 정보는, 그들이 왜 그렇게 보안을 중시 여겼는지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다.
“······행해지는 중요한 의식이 방해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성녀님의 숙소는······.”
중요 인사들의 거처나 비밀 금고 따위는 별것도 아닌 정보였다.
“···마지막으로,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단의 심처 한 곳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곳.”
‘그것’이.
“불사왕의 마지막 파편이···.”
이곳 로셀리아 대신전에 봉인되어 있다는 것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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