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54화 (54/284)

#54

엘프 (2)

며칠 전.

“후웁— 하! 산이 가까워서인지 상쾌하군.”

할리는 북부 산맥과 맞닿은 툴크 왕국의 경계, 강철의 성채에 도착했다.

타라크에서 용병으로서의 첫 시작을 알린 그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은 법.

할리의 아름답고 우람한 근육을 보고도 미개하니 뭐니 하며 시비를 거는 얼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저게 그 랄프 패거리를 박살 냈다는···.”

“쉿! 눈 마주치지 마.”

제법 명성을 떨친 놈들이었는지,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덤빈 것 같았다.

전사가 다루는 기운인 오러(Aura)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

“맨손으로 사지의 뼈를 몽땅 분질러 버렸다지?”

“칼도 잘 안 들어간다는데?”

처음 시비가 붙었을 때, 할리는 인간과 싸워본 적이 없는 만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영웅이 될 그가 힘 조절 하나 못해 도시 내에서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하나하나 붙잡아서 곱게 뼈를 비틀어 주었지!’

그렇게 하면 실수로 죽일 염려는 없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몸이 어느 정도의 힘에 부서지는지 체득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거기다 오러를 쓰는 법도 배울 수 있었고.’

발악하는 놈들의 몸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급격하게 단단해진 몸뚱이.

그래봤자 힘을 더 주니 뚝 하고 부러져 버리긴 했지만, 신체 능력의 증가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쓸 만하다 여겨서 놈들을 쥐어박아 그 방법을 알아낸 건 좋은데···.’

이 몸뚱이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몸은 평범한 인간보다는 마수에 더 가까웠으니까.

인간의 육체를 상정해 만들어진 기술을 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몸의 성분을 인간의 것으로 되돌려 오러를 쓰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강했으니, 어찌할 수도 없는 계륵 그 자체였다.

‘일단 뭐든 알아두면 나중에 쓸 일이 있겠지.’

할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당장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사냥감을 찾아 북부 산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크워어엉!”

“후하하핫—! 뒤져라!”

눈이 돌아간 할리는 광소를 터트리며 커다란 곰의 형상을 한 마수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오른손의 도끼가 두 발로 선 놈의 무릎을 찍고 지나가자마자, 왼손의 도끼가 오금에 틀어박혔다.

“크워억!”

곧바로 내려쳐지는 곰의 앞발.

그는 옆으로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공격을 흘리고, 다시 오른손의 도끼를 놈의 팔오금에 박아 넣었다.

야생적인 할리의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도끼술.

양손에 들린 쌍도끼가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마수의 전신을 유린했다.

콰직!

“끄어어···.”

그렇게 거듭된 도끼질에 놈이 자리에서 비틀거린 순간.

“후읍!”

숨을 들이쉰 할리가 마수에게 달려들며 허리를 한껏 비틀었다.

팽창하는 근육, 그리고 회전의 반동을 통해 한껏 강화된 힘으로 곰의 다리에···.

쩍—!

로우킥을 날렸다.

한순간에 마수의 다리뼈가 박살 나며 놈의 몸이 공중에서 구십도 회전해 바닥에 처박혔다.

“으랏차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냥꾼, 할리는 곧바로 점프해 곰의 목에 도끼를 내려찍었다.

“꾸어억!”

질긴 가죽과 강철 같은 근육에 도끼날이 깊이 박히지 않는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부풀어 오른 근육의 양손을 번갈아 내려찍으며 신명 나는 도끼질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크하하핫! 제법 힘든 상대였군!”

마침내 숨이 끊어진 마수의 위에 올라선 할리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도끼를 집어 던지며 날카롭게 변형시킨 손을 사냥감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단단한 마수의 신체를 깊숙이 파고드는 손톱.

이윽고 주먹만 한 마석이 할리의 손아귀에 딸려 나왔다.

그는 그것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 후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무기를 쓰는 것보다 맨몸이 더 강하다니···.’

애써 외면했던 잔혹한 진실.

기껏 도끼까지 구하고 도끼술도 연마했는데, 정작 몬스터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신체에 깃든 마나를 변질시켜 이용하는 놈들의 육체 강도는 상상 이상이라, 아무런 기운이 담기지 않은 무기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지금은 압도적인 괴력을 이용해 우격다짐으로 해치울 수 있었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아무리 단단한 흑철강 도끼라도 망가져 버릴 터.

그렇다고 힘을 적당히 주면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차라리 전력을 다할 수 있는 맨몸이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이래서야 진정한 힘을 감추고 약한 척하는 숨은 고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잠깐 유혹이 밀려왔지만, 자신의 목표에 맞지 않으니 안 될 말이었다.

“후아— 이제 의뢰품을 챙겨 볼까?”

할리는 마석을 통해 육체의 성분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손톱을 날카롭게 뽑았다.

그리고 의뢰품인 웅담을 적출하기 위해 곰의 배를 갈랐다.

‘「육체변이」로 마수의 힘을 사용하면 이렇게 쉬운데, 어째서 무기를 쓰면··· 응?’

한순간 그의 동작이 정지했다.

신체에 깃든 마나를 변질시킨 마물들의 힘, 생체력.

흡수한 마나를 체내에서 정제한 전사들의 힘, 오러.

‘어쨌든 몸 안의 기운을 자신에게 맞게 가공한 힘이라는 건 같다. 다루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마물들은 타고난 신체로 본능적으로 마나를 이용해서 복잡한 정제 과정이 필요 없었다.

인간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마나를 이용하기 위해, 오러를 정제하는 법과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같다.

그럼 그 두 가지 장점을 합쳐서···.

‘정제 과정은 건너뛰고, 오러를 다루는 법을 이용해서 생체력을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

실상 오러 단련법에서 중요하고 복잡한 부분은 마나를 정제하는 과정이었다.

수준 높은 기술은 각 세력의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하지만 다루는 법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까다로운 기술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전에 얻은 오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돌연변이」와 「육체변이」를 이용해, 인간의 육체와 현재 육체의 차이점을 분석하며 괴리감을 조율해 나갔다.

흑마력, 혈마력, 신성력.

그간 많은 기운을 다뤘던 경험 덕에 작업은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열량이 부족해지면 곰 고기를 뜯어 먹어가며 생체력을 다루기 위해 집중하던 순간.

머릿속에서 섬광이 스쳤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생체 오러」를 획득합니다.》

한 손에 들려있던 도끼에서 흐릿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흐··· 후하하하핫—!”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오는 할리의 광소.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인간의 힘을 손에 넣는 순간이었다.

***

촤악—!

목이 베인 커다란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쿠웅!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가 쓰러지며 주변의 대지에 진동이 일었다.

“크흐흐··· 그놈 참 오지게도 강하구만.”

그 자리에 주저앉은 할리가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그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고 입에서는 지금도 계속 역류한 혈액이 쏟아져 나왔다.

「재생」이 쉴 새 없이 발동하고 있었지만, 조각난 왼팔은 아직도 수복 중이었다.

꼬르륵—

그 와중에 밀려오는 미칠 듯한 허기.

전투를 벌이며 「육체변이」와 「생체 오러」, 「재생」으로 에너지를 펑펑 써댄 덕에 그간 쌓아둔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것이다.

“끄응···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겠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할리가 쓰러진 오우거에게 다가가며 오른손의 도끼에 오러를 덧씌웠다.

5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

그 전신은 압도적인 밀도의 근육으로 채워져 있어, 근력은 물론 순발력까지 초월적인 수준이다.

감각도 얼마나 예리한지 태평하게 드러누워 자고 있던 놈에게 몰래 다가가 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반응해 반격해 올 정도.

“역시 근육밖에 없어서인지 너무 퍽퍽한데.”

전투 도중 전신의 뼈가 몇 번이고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됐지만, 끝까지 「재생」으로 버티면서 「생체 오러」를 이용해 차근차근 놈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하하핫—! 그래도 결국 승자는 이 몸이지!”

이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괴식」 덕분인지 드디어 웃을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강한 놈인 만큼 효과도 좋구만. 애써 사냥한 보람이 있어!”

잔뜩 배를 채워 에너지를 비축하고, 마석까지 씹어 먹자마자 곧바로 터져 나오는 육체의 반응.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압축되고를 반복한다.

뼈대가 단단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으며 피부가 한층 더 질겨졌다.

“후우··· 좋군.”

한층 강해진 육체에 만족감을 느끼며 오우거의 사체를 마저 해체했다.

그렇게 희귀한 소재로 아공간 마도구가 가득 찰 정도로 전리품을 챙기고, 놓쳤던 왼손의 도끼도 회수한 후 이동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지?”

울창한 숲속.

오우거와의 격한 전투로 주변이 뒤집어져 방향이 가늠되지 않았다.

할리는 곧바로 근처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드넓게 펼쳐진 광활한 나무의 바다에 속이 시원해졌다.

“아핫핫! 이거 신나서 너무 깊게 들어온 모양인데?”

그는 요 며칠간 마수의 발달된 후각을 이용해 여러 종류의 사냥감을 추적했는데, 무작정 새로운 냄새만 따라가다 보니 깊은 곳까지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북부 산맥의 광활함을 생각지 못하고 다양한 유전자에만 눈이 멀어 무작정 이동한 끝에 벌어진 사고.

“뭐, 밤이 되면 별을 보고 이동하면 되겠지!”

물론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젠 그도 아우테리카 생활이 일 년이 넘은 만큼, 별을 통해 방위를 확인하는 것 정도는 간단했으니 굳이 전송진까지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쿨타임 중이라 쓸 수도 없었지만.

나무에서 내려온 그는 밤이 오기 전까지 사냥이나 더 할 생각으로 다시 숲속으로 향했다.

그렇게 날이 슬슬 어두워질 무렵···.

킁킁—

“음?”

예민한 마수의 감각에 뭔가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오랫동안 맡아온 고향의 향취와도 같은 추억 어린 감각.

“흑마력 냄새?”

그것도 은폐장을 통해 억눌러진 듯한 희미한 마력의 잔향이었다.

한스의 비밀 실험실에 제법 오래 머물렀던 경험으로 봤을 때, 이건 백 프로였다.

“흑마법사가 숨어있나?”

잠시 고민하다가 냄새가 느껴지는 곳으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마수의 감각에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으니까.

그 끝에 발견할 수 있었다.

흑마법으로 펼쳐진 결계를.

‘이것도 익숙한데.’

할리의 눈을 통해 본 그 결계를 곧바로 한스가 해석해 결과를 내놓았다.

초창기, 한스가 첫 번째 불사왕의 파편을 취해 데미리치가 된 직후 접했던 결계.

역천의 서약이 사용하던 은폐 결계였다.

‘놈들이 여기도 숨어있었나? 하긴 탈리아 왕국에만 있다고 보기엔 사이즈가 큰 놈들 같긴 했어. 그때도 놈들에게 무슨 금제가 걸려있었고.’

영혼이 모두 어딘가로 빠져나갔었지.

지금의 한스라면 그 금제를 무시할 수도 있을 텐데, 성녀의 추적을 피해 숨어만 있느라 놈들을 찾을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해 버렸네.’

왠지 모를 반가움이 밀려온 찰나···.

‘응?’

할리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미세한 흑마력의 유동을 감지한 한스가 새로운 진단을 내놓았다.

‘제물 의식이 진행 중? 그리고 이건···.’

「금단의 지식」의 흑마법 지식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이 정도 제물 의식은 어떻게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곧바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제물을 바친 직후의 흑마력으로 음차원 게이트를 생성해 이동하기에 추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즉, 여기서 놓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

“후흐··· 겨우 이렇게 만났는데, 얼굴이라도 봐야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웃은 그가 양손에 도끼를 꺼내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오우거를 사냥해서인지 한층 짙어진 아지랑이가 도끼를 감싸고 피어올랐다.

그렇게 전신에서 생성된 생체 에너지가 두 개의 도끼날에 담기고.

“후하하하—! 부서져라!”

어깨 뒤로 넘어갔던 두 개의 도끼가,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결계를 강타했다.

콰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결계에 구멍이 뚫리고, 숨겨져 있던 동굴이 드러났다.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할리는 개의치 않고 내부로 당당히 들어섰다.

“내가 또 너희 잘되는 꼴은 못 보지.”

한스의 뒤통수를 치고,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던 놈들과 한 패거리였다.

이쪽이 이용할 여지가 있다면 모를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전력으로 방해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 와중에 뭐라도 건질 수 있으면 좋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튀면 되니까!

‘절대 뒤끝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그렇게 흑마법의 기운이 짙게 풍기는 곳으로 달리던 도중, 안쪽에서 한 무리의 인간들이 튀어나왔다.

“뭣?! 네놈은 누구냐!”

“막아!”

흑마법사의 하수인들이었다.

기사급 한 명과 용병 수준의 다섯.

‘기다려줄 필요 없지! 곧바로 전력으로 간다!’

할리의 다리 근육이 팽창하고, 그의 몸이 습격 직전의 맹수처럼 웅크려졌다.

그 직후.

콰앙!

그는 이미 기사급인 놈의 코앞에 있었다.

“크윽! 이놈이 감히!”

뽑은 검에 짙게 피어오르는 흑마력.

갑작스러운 습격에도 그는 능숙하게 무기를 휘둘러 할리의 도끼를 쳐냈다.

카앙—

“무슨?!”

하지만 그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괴력에 그의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

스걱!

할리의 반대편 손에 들린 도끼가 그의 목을 치고 지나갔으니까.

‘방심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인 법.’

무기를 휘두르는 것과 흑마력의 수준으로 봤을 때 결코 이렇게 쉽게 죽을 수준이 아니었지만, 할리를 일반적인 전사라고 생각했던 것이 죽음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다.

“카하핫! 한꺼번에 덤벼라!”

그는 광소를 터트리며 남은 하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할리는 전신에 피가 튄 모습으로 다시 통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잡졸들은 딱히 신경 쓸 정도도 아니군. 흑마법사들은 전부 안쪽에 있나?’

그렇게 놈들과의 결전을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그의 감각에 땅속에서 뭔가가 급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적의 본거지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호의적일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곧바로 도끼를 휘두르려는 찰나.

“꺅!”

땅속에서 작은 소녀가 쑥 튀어나왔다.

허름한 옷차림과 목에 걸린 검은 족쇄로도 감출 수 없는 귀여운 외모.

뾰족한 귀와 연두색 머리, 주황색 눈을 하고 품 안에 웬 나뭇가지를 안고 있는 엘프 소녀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할리는 이 소녀가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하하하핫! 이거 곤란하게 됐구만!”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꼬마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 본인에게 다시 확인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흑마법사 소굴에서 처음 만난 근육질의 사내가 대뜸 이름을 물었지만, 엘프 소녀는 조금 움츠러들었을 뿐 순순히 질문에 답했다.

“세···세실리···. 세실리예요.”

역천의 서약 아지트 한가운데에서.

하이 엘프 후보 세실리와 야만 전사 할리가 조우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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