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엘프 (3)
작전 변경이다.
원래는 되는 대로 적당히 깽판을 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소환 해제로 도망가려고 했는데···.
“저, 저기···.”
엘븐 킹덤과 주신교단이 찾고 있는 엘프 소녀.
‘이 상황, 써먹을 수 있겠는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할리의 이름값을 높이고, 하인리히는 교단에 공을 세울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음! 내 이름은 할리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여기서 나가고 싶은 거겠지?”
“···네!”
흑마력의 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동굴 안쪽에서 엄청난 수의 적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럼 잠깐 실례하지!”
“네? 우햣—!”
한손에 든 도끼를 등에 걸고, 세실리를 옆구리에 낀 채 그대로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다리 근육이 팽창하고, 그의 몸이 폭발적인 속도로 가속했다.
“흐우우—!”
할리의 옆구리에 매달린 상태로 두 눈을 꾹 감은 세실리.
여전히 그 품에는 나뭇가지를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그 나뭇가지는 뭐야? 소중한 거?”
빠른 속도로 입구로 이동하며 잠깐 여유가 생긴 김에 그녀에게 물었다.
얼핏 봐서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기에.
“흐에? 아, 이건··· 세계수님의 가지예요. 덕분에 안쪽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성실히 대답하는 그녀.
제물 의식이 한창 진행 중일 심처에서 어떻게 할리가 있는 곳까지 빠져나왔나 했더니, 세계수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가지가 제물이었던 그녀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상황이 급박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굉장히 순종적으로 따르는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세실리는 줄곧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경계할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는데도.
흑마법사의 소굴에서 마주친 근육질의 벌거벗은 남정네.
몸의 곳곳에 핏방울이 튄 것은 물론, 양손에는 아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쌍도끼까지 든 상태였다.
‘어후, 나라도 기겁하겠네.’
물론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미관상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그저 약간 위축된 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추게 되면 세계수의 인도를 받게 된다고 했던가.’
무사히 세계수가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준다고 했다.
아무래도 세계수는 할리가 이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협조해주면 나야 편하고 좋지. 그런데 세실리의 목에 걸린 저거···.’
다시 빠르게 분석 결과를 내놓는 흑마법의 대가, 한스 선생.
‘흑마법을 이용한 봉인 마도구. 제법 수준이 높아. 힘으로 강제로 풀면 위험하겠군. 한스였다면 해제할 수 있었겠지만···.’
마도구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조절하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는데, 할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했는데 정작 직접 할 수가 없다니.’
아마 저것 때문에 하이 엘프인 라포리가 세실리의 위치를 찾지 못한 것이리라.
‘할리가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호응한 걸 보니, 세계수는 세실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긴, 주신 만큼은 아니지만 세계수도 엘프들의 신앙을 받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아마 직접 알려줄 수 없는 다른 제약이 있었겠지.
“핫핫핫! 이제와선 아무 상관 없지!”
등 뒤에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흑마력이 느껴졌지만, 이미 동굴 입구가 코앞이었다.
밖으로만 나간다면 괴물 같은 체력으로 도망 다니는 그를 쉽게 잡진 못할 터.
그때.
다시 땅속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명백한 살의.
문제는 그것이 다가오는 방향이 그들이 향하는 바깥 숲 쪽이라는 것이었으며···.
콰아앙—!
정확히 입구의 땅에서 솟구친 그것의 덩치가 동굴을 통째로 막을 정도로 컸다는 점이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하지만 할리는 개의치 않고 입구를 막은 거대 지렁이, 어스웜에게 속도를 더 높여 달려들었다.
“히이익—?!”
옆구리에 낀 상태였던 세실리를 휘릭 돌려 제대로 끌어안고, 최대한 그녀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고정한 뒤···.
퍼어엉!
그대로 몸을 띄워 놈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꾸어어엉—!]
충격에 꿈틀거리는 어스웜.
하지만 그 육중한 무게와 바닥에 고정된 나머지 신체 부위 때문에 여전히 입구에는 조금의 틈도 생기지 않았다.
반동으로 뒤로 튕겨 나갔던 할리가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하며 실소를 흘렸다.
“후흐흐··· 어째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아무리 봐도 입구를 뚫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저 뒤에서 몰려오는 놈들과의 싸움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가씨, 정신 차려. 아무래도 이제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흐어어~ 네에?”
격한 움직임으로 어지러움에 시달리던 그녀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할리는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세실리를 내려놓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검은 표범 투구에 망토처럼 연결된 가죽을 길게 찢었다.
가운데를 잘라 두 갈래로, 다시 양쪽 자락의 윗부분을 잘라 좀 더 길게 이어지도록.
“자, 이쪽으로 와!”
“네, 넵!”
그리고 세실리를 품에 안은 채, 두 갈래의 가죽으로 그녀를 번데기처럼 둘둘 말아 자신의 몸과 단단히 고정했다.
그의 등판을 덮던 가죽이 워낙 커서 아예 밖을 볼 수 없도록 숨구멍만 남기고 둘러쌀 수 있었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처럼, 커다란 근육 덩치에게 매달린 자그마한 가죽 뭉치··· 아니, 엘프 소녀.
‘등에 업는 것보다는 이 편이 보호하기 좋겠지. 마수 가죽이니 어지간하면 쉽게 끊어지지 않을 테고.’
그렇게 할리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양손에 도끼를 틀어쥐는 와중에도, 어스웜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입구를 지키고만 있었다.
본능적인 마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움직임.
확실히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놈이었다.
“핫하! 그럼 본격적으로 간다! 일단 네놈부터 족쳐주마!”
할리는 에너지를 아낌없이 퍼부으며 전신에 「생체 오러」를 끌어올렸다.
다른 놈들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입구부터 뚫기 위해서.
***
“네? 뭐라고 하셨어요, 하인리히 경?”
성녀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의 반응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라티우스 대주교와 팔라딘들은 물론, 라포리를 비롯한 엘프들까지.
“그 세실리란 분.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제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그런 시선에도 꿋꿋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음··· 혹시 경에게 특정 대상을 추적하는 축복이라도 있는가?”
조심스럽게 묻는 라티우스 대주교.
확실히 믿기 힘들 터였다.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가 말을 꺼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들의 목표를 찾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아까웠다.
“축복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느껴집니다. 연두색 머리에 주황색 눈을 한 엘프, 세실리라는 분의 존재가요. 하지만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이들의 기색이 일변했다.
엘프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성녀를 비롯한 교단의 고위층을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수행인으로 보이는 이의 갑작스러운 말을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성녀는 하인리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엘프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인리히 경은 믿을 수 있어요. 그는 주신께서도 관심을 보이는 분이니까요.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저희는 교단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엘프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하인리히를 바라봤다.
“그럼 바로 움직이죠. 그곳의 위치가 어디죠?”
그와 똑바로 마주치는 그녀의 두 눈에는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대륙 서쪽에 있는 툴크 왕국의 접경지인 북부 산맥입니다. 게이트를 이용해 아오니아 백작령에 있는 타라크 신전으로 이동하면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죠.”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성녀는 그 와중에도 성표를 쥐고 작게 중얼거리다가, 하인리히를 돌아보았다.
“바로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해뒀어요. 가면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거예요.”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 혹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가?”
“가까이 가면 제 ‘축복’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강철의 성채 북쪽 어딘가라는 것밖에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의 모두가 하인리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성녀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영향을 끼쳤을 터.
이제 그 믿음에 보답하기만 하면 교단에서 그의 신뢰도는 크게 상승할 것이다.
그렇게 서둘러 이동한 그들은 금세 게이트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와중 아주 잠깐 사소한 실랑이가 발생하긴 했지만.
“성녀님은 안 됩니다.”
“팔라딘 둘에 대주교 하나, 거기에 하이 엘프까지 가는데 굳이 성녀님까지 가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하하핫! 이단 놈들은 저희에게 양보해 주시지요!”
자연스럽게 게이트로 이동하려던 성녀가 교단의 인물들에게 제지당한 것이다.
그녀의 볼이 미세하게 부풀었지만, 외부인인 엘프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뭐라 항변도 하지 못했다.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 추가 인원을 소집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과한 전력이었으니까.
“위치만 안다면 저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이 엘프 라포리도 자신 있게 덧붙이니, 그녀는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녀가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우웅—
서쪽 끝에 있는 탈리아 왕국만큼은 아니었지만, 대륙의 중심인 이곳과 서부에 있는 툴크 왕국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동 거리에 따라 막대한 신성력이 필요했으니, 지금 바로 한 번에 이동하기 위해서는 성녀의 도움이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럼, 모두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걱정 마십시오.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걱정스레 인사를 건네는 성녀에게 하인리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이들의 전력이라면 별다른 피해도 없이 일을 마칠 수 있을 테니.
‘사실 문제는 시간을 맞출 수 있느냐는 것뿐이지.’
당장은 할리 혼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놈들이 전력을 쏟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슬슬 조짐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
“후하하핫!”
할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난쟁이 몬스터, 그램린의 머리를 도끼로 찍으며 사납게 웃었다.
그의 주변은 이미 온갖 종류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숲을 지나며 이미 사냥했던 몬스터부터 처음 보는 생소한 놈까지, 거기에 흑마법사의 하수인 놈들은 덤이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놈들을 해치우고 또 해치웠지만, 사방의 숲에서는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동굴 밖으로 빠져나온 건 좋은데.’
입구를 막은 어스웜을 뚫고 나오긴 했으나, 그 와중에 흑마법사들에게 따라잡혀 버렸다.
더욱 큰 문제는 흑마법사들이 몬스터를 부리는 데 특화된 놈들이라는 점이었다.
몬스터가 넘쳐나는 북부 산맥이니만큼, 놈들과의 시너지가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부터 그걸 감안하고 여기에 똬리를 튼 거겠지!’
숲에서 불러들이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흑마법사들이 따로 소환한 놈들도 문제였다.
이놈들은 완전히 각양각색의 생소한 특징을 가진 놈들이었으니까.
한 가지 다행이라면 놈들도 제물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는지, 일부러 세실리를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를 방패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공격을 해오는 몬스터들이 로봇처럼 그들의 명령을 철저하게 수행하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저 서로 조심하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을 뿐.
‘그래도 이대로 가면 곤란하다. 할리의 장점은 몸을 돌보지 않고 들이받는 저돌성인데, 지금 상태로는 움직임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세실리를 내려놓고 싸우면 놈들이 그녀만 홀랑 집어 가 버릴 테고, 그렇다고 이 상태가 계속되면 에너지가 떨어지는 순간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게이트를 통해 타라크에 도착한 하인리히 일행.
하이 엘프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려 빠른 속도로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여기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마침 한쪽에서 몬스터들을 조종하느라 여념이 없는 흑마법사 하나가 보였다.
주변에 몬스터들을 호위를 두르고 방어막까지 펼친 모습이긴 했지만···.
“후읍!”
오른손의 도끼날로 짙은 오러가 밀집되고, 그의 허리가 휘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원심력으로 크고 아름다운 원을 그린 오러의 궤적은.
쐐액— 콰직!
“꾸헠—!”
미사일처럼 날아가 방어막을 박살 내고 흑마법사의 몸에 틀어박혀, 그와 함께 허공을 비행해 할리의 시선 밖으로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제어가 풀리자 멈칫하는 몬스터들.
할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광소를 터트리며 놈들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푸확—
왼손의 도끼는 계속해서 유려한 선을 그리며 적을 유린하고, 괴물같이 변한 오른손은 몬스터들의 마석과 함께 심장을 뜯어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쉴 새 없이 보충되는 에너지와 넘치는 체력.
이렇게 가면 하루 종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적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지만.
카앙—!
갑자기 날아든 창을 오러가 깃든 손톱을 휘둘러 쳐냈다.
기습이 실패하자 다시 몬스터들의 틈으로 숨어드는 창을 든 사내.
“라이칸스로프인가? 뭔가 다른데··· 변종?”
한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챙!
반대편에서 날아든 화살이 도끼 면에 맞고 튕겨 나갔다.
“우리의 제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걸로 보니 마물의 피가 섞인 것은 아닌데.”
말과 동시에 또 다른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어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 이놈들 더럽게 싸우네.’
상대에게 극찬을 날리며 할리는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전투가 거세지다 보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 「육체변이」까지 아낌없이 사용해야 했다.
“크흐흐흣.”
흉포하게 부풀어 오른 전신의 근육, 상어처럼 돋아난 이빨과 발달한 턱.
눈, 코, 귀도 이미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거 괜찮나? 안 그래도 마음이 조금 아픈 아이인데.’
싸움이 계속될수록 할리의 육체가 광기에 물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계속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언제든 제어할 수 있으니 사고를 칠 염려는 없겠지만, 한스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되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잠깐 고민하던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야성」를 획득합니다.》
한순간 감각이 뒤집혔다.
그렇게 갑작스레 느껴진 괴리감에 잠시 멈칫한 찰나, 육체는 본능만으로 움직였다.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가고.
까드드득—!
잠깐의 틈을 노리고 날아든 검이 할리의 톱날 같은 이빨 사이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딜레이 없이 휘둘러진 왼손의 도끼가 습격자의 몸을 동강 내고 나서야 「야성」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로지 본능만으로 움직여 공격성을 극대화한 스킬.
하지만 그러면서도 몸에 각인된 기술은 잊지 않는다.
좀 더 자유롭고 거칠기는 했으나, 그건 틀림없이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도끼술과 체술이 베이스가 된 것이었으니.
한순간에 몸을 낮춘 할리의 코와 귀가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파앗— 뚜득!
“끅!”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사이에 파고들어 오른손으로 창을 든 사내의 목을 비틀었다.
이성은 별거 아니라고 흘려버렸던 정보를, 본능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거 괜찮을지도?’
「야성」을 이용한 방법은 지금까지 그가 사용해왔던 전투 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의 최대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마음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계산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으니까.
게임을 하듯 제삼자의 입장에서, 압도적인 정신력으로 모든 변수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
하지만 그 방식은 할리와 맞지 않았다.
무수한 몬스터들을 잡아먹고 진화한 그 육체를 온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것이 아닌 새로운 전투 방식이 필요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발동을 조절하는 게 가능하잖아!’
할리의 광증을 온전히 「야성」에 쏟도록 조절할 수도 있었으니까.
필요한 전투에서만 미쳐 날뛰는 광전사처럼!
‘이 정도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건 충분하겠는데?’
놈들은 알지 못하는 제한 시간이,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