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뜻밖의 행운 (3)
“이게, 그···.”
라포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가 입을 닫았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제단 위의 그것을 바라보았다.
봉인이 몇 겹이나 겹쳐있는데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불길한 아우라.
그 지독한 죽음의 기운에 그것을 보는 이들의 인상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이건 생각 이상인데?’
그간 두 개의 파편을 흡수하며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기운이었지만, 저것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첫 번째 파편은 역천의 서약에서 가지고 있던, 결손이 심해 주변의 정보를 빨아들이던 것.
두 번째 파편은 브로코슬락 클랜에서 가지고 있던, 단단하게 응집돼 굳어있던 것이었는데···.
‘저건 별다른 하자가 없어 보이는군.’
거기다 그 크기도 앞선 두 파편을 합친 것만큼 컸다.
물론 정확히 삼등분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라포리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의 몸에서 자연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제단 쪽으로 향해, 봉인 밖으로 삐져나온 죽음의 기운과 접촉했다.
파직—
순식간에 오염되기 시작한 기운.
그는 황급히 연결을 해제하고 식은땀을 훔쳤다.
“크흠, 확실히 생각했던 것과 다르군요. 단순히 흑마력이 밀집된 것으로만 여기고 탐색을 시작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잊지 않고 기억 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그 자리에 선 채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 그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남은 일행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던 와중···.
“하인리히 경.”
성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것을 직접 본 소감이 어떠세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파편을 노려보는 그 눈빛은, 그동안 보였던 허술한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뭐랄까···. 그냥 대단하군요. 저런 것을 한 존재가 품게 되니, 대륙의 재앙이 되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품는 게 아니에요. 잡아먹히는 거지.”
성녀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정정했다.
“천 년 전, 차원의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저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작스레 대륙에 등장했어요.”
‘불사왕의 심장’에 대한 더욱 내밀한 이야기였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쓰레기통, 온갖 부정적인 찌꺼기들이 한 곳에 고인 심연 속에 존재해야 했던 것.
“아마 더 강한 힘을 추구했던 흑마법사의 소행이었겠죠. 심연을 열고 저걸 불러올 정도면 당시에도 대륙 최고 수준은 되었을 텐데···.”
“힘에 대한 욕망은 한 번 빠지면 끝이 없으니까요.”
성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륙에 존재하게 된 물건이니 이렇게 봉인하는 게 최선이었죠. 돌려보내겠다고 다시 심연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어떤 존재도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저건 차원의 밑바닥에서 오랜 세월 고이고 응축된 ‘죽음’이라는 개념의 일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마인드 허브」가 대단해 보이네.’
물론 스킬의 위력이 강하다기보다는, 그 발동 구조 덕분이었다.
방사능을 제대로 밀폐하는 시설을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곳의 출입구를 관리하는 것에는 수고가 덜 드는 것과 같은 문제.
‘외부로 새어 나오는 방사능을 막는 것만으로 「마인드 허브」가 상시 발동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언데드는 정신 공격에 면역이니까, 저번처럼 정신세계에서 직접 공격당하지만 않는다면 딱히 위험할 일은 없었다.
“솔직히 저도 왜 하인리히 경을 이곳에 데려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또한 주신의 뜻이겠지요.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성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라포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미묘해진 기분으로 슬쩍 천장을 쳐다봤다.
‘주신님, 도와주시는 건 좋은데···.’
왠지 짬처리 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윈윈이니 좋기는 하지만, 뭔가 기분이···.
“···후우,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그때 라포리가 심호흡하며 돌아섰다.
기운을 각인시키는 작업이 무사히 끝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나가도록 하죠.”
성녀의 말에 다시 앞장서는 이단심문관장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절차를 역순으로 밟아 나갔다.
그렇게 라포리가 조금 지친 것 외에는 큰 문제 없이 모두가 바깥으로 나온 순간···.
“그럼.”
봉인지의 구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들리는 목소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단심문관장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로 따져도 팔라딘급일 것이다.
추후 일을 벌일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일 터.
“오늘은 라포리 님이 무리하신 것 같으니, 이만 쉬고 내일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시종일관 조용히 참관하던 라티우스 대주교의 말에 곧바로 자리가 파해졌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라포리를 귀빈 숙소로 안내하고 나서, 곧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됐다.’
봉인지의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뜻하지 않은 행운.
이제 남은 것은 결행일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
[큭큭큭··· 드디어.]
기다려왔던 순간이 찾아왔다.
거기다 지금까지 공들여 하던 연구에 도움이 될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성녀의 추적을 피할 수단을 찾는 것.
‘성녀가 추적하는 건 결국 ‘불사왕의 파편’이란 말이지. 그럼 그것만 감출 수 있다면 해결되는 문제.’
기본 골자는 아공간에 파편을 넣고, 흑마력의 연결만 유지한 채 힘을 공급받는 것이었다.
그동안 시간이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종속 아공간 연구와, 제대로 써먹을 수 없었던 「불사」 스킬을 합쳐 세워진 제법 그럴싸한 계획.
하지만 실험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식으로든 파편을 아공간에 넣을 수 없었으니까.
처음엔 워낙 막대한 에너지가 담겨 있어서 그런가 싶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었는데···.
이번에 성녀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파편의 기원에 대해서. 어쩐지 그동안 도무지 아공간에 들어가지 않더라니.’
차원의 심연에서 끌어올려져 세상에 현현한 물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세계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존재를 이용한다면 모를까.’
그래.
이세계에서 온 각성자처럼.
‘지금까지 한스가 파편을 가지고 자유롭게 차원을 넘었던 것처럼 말이지.’
한스는 굉장히 특이한 존재였다.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아바타」의 특성 때문에 본체와 연결되어 각성자로 인정받는 상태.
[크하핫! 결국 이 몸뚱이를 이용하면 해결되는 문제렷다!]
차원의 이면을 이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개체에게 종속된 아공간을 생성하는 것에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며 한스의 빈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아까는 없었던 해골 지팡이가 그 손에 들린 채로.
‘아직 공간이 만족할 만한 크기는 아니지만,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지.’
그럼 이 종속 아공간을 한스 본인과 동일시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조율이 좀 필요하겠군. 종속 아공간의 좌표를 이 몸과 겹치게 설정하고, 경계를 흩트리는 방법으로···.]
이미 가닥은 잡힌 상태였으니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 후에 남은 것은 「불사」로 근원을 추출해 종속 아공간에 담고 연결을 유지하는 것뿐.
흑마력 통로가 연결된 만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겠지만, 부족한 부분은 지금처럼 몸에 은폐장을 구축하는 정도로 차단할 수 있을 터.
그 정도만 되어도 대륙을 활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리라.
‘그래, 이 연구가 끝나면 마지막 파편을 얻고 난 뒤에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겠지.’
하인리히가 파편이 봉인된 곳의 코앞까지 진입한 이상, 이제 그것은 한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지금 바로 갈 순 없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직접 확인해 본 바로, 마지막 파편의 크기는 한스가 지금까지 흡수한 두 개를 합친 것과 비슷했다.
그만큼 강한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
그런 것을 흡수한 직후 바로 기운을 숨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수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고···.
‘그런데 교단 측에서 그걸 기다려줄 리 없지.’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고, 파편을 흡수하는 것도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다.
아마 파편을 손에 넣자마자 곧바로 소환 해제로 도망쳐야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만한 흑마력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로 뿜어낸다면, 가디언들에게 곧바로 위치를 들키고 추적이 시작될 거야.’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잘 숨겨왔지만, 당장 가진 것과 같은 크기의 파편을 흡수한 직후에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계속 불러내지 않을 수도 없고. 설령 본체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소환 직후 헤어진다고 해도, 어떤 수단의 추적이 이어질지 몰라.’
안 그래도 번천회와의 갈등이 시작된 직후이지 않은가.
설령 한스와의 접점을 들킨다고 해도 당장 의심받지는 않겠지만, 인제 와서 그런 위험부담을 지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크흐흣— 됐다! 이건 가능하겠어! 카하핫!]
게다가 이제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 실험이 끝난 뒤엔 파편의 기운을 제대로 숨길 수 있게 될 테니까.
***
“라포리 님.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예,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잠깐 지친 것뿐이니까요.”
불사왕의 파편을 확인하고 나온 다음 날.
그들은 다시 자리를 가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나눴다.
불사왕을 어떻게 추적할 지에 대해서.
“일단 엘븐 킹덤에서 같이 온 제 일행들이 근처에 의식을 하기 적합한 숲을 찾아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사전 준비를 해두는 중이지요.”
“예,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희 측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지원하기도 했지요. 그럼 수색은 언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흠···.”
라티우스 대주교의 질문에 라포리는 잠깐 뭔가를 계산하다가 그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
“사전 준비는 이틀 안에 마무리가 될 테니, 본격적인 의식은 사흘 내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교단 측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들도 지속해서 수색 작업을 진행 중이었지만, 딱히 성과가 없었던지라 이번 일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 어느 지역부터 수색할지 미리 순서를 정해둬야겠군요.”
대륙의 숲을 전부 확인하는 데는 최대 한 달 정도 걸린다지만, 운이 좋다면 훨씬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
촤르륵—
커다란 테이블 위에 대륙 전도가 펼쳐졌다.
나무가 많은 지역에 따로 숫자까지 표시된, 이번 작전을 위해 준비된 지도.
“그럼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짚어 보죠. 숫자가 큰 부분이 확률이 높다 판단된 곳인가요?”
성녀가 자리에 동석해 있던 검은 사제복의 사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작전을 위해 참석한 정보를 담당하는 이단심문관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간 이어졌던 수색 작업의 진척도와 이전까지 이어졌던 놈의 행적을 토대로 확률을 계산했습니다.”
눌러쓴 후드와 검은 마스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울한 목소리.
‘이단심문관이 제대로 말하는 걸 들은 건 처음이네.’
봉인지를 안내했던 이단심문관장도 단답형으로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하긴 성녀가 직접 질문하기도 했고, 그만큼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일 터.
성녀의 뒤에 서 있던 하인리히가 지도를 슬쩍 훑었다.
그도 이번 수색 작업에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마물의 숲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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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게 표시된 확률이 50% 전후였으나, 그걸 감안해도 다른 지역보다 숫자가 낮은 편이었다.
불사왕의 후예가 가장 먼저 발견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낮은데. 역시 전에 대대적으로 수색한 게 원인이겠지?’
처음으로 한스의 종적이 시작된 곳이었던 만큼, 탈리아의 불사왕 토벌대는 그 부근을 샅샅이 조사한 전적이 있었다.
아마 그 결과가 수치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으음, 그럼 이 지역을 우선으로···.”
“일단 여기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그 숫자를 토대로 의논을 나누고 순서를 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물의 숲은 제법 뒷순위로 밀릴 것 같네. 이 정도면 탐색이 시작되기 전에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겠어.’
수색이 시작될 시간에 따라 행동 방침을 변경할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굉장히 좋았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