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65화 (65/284)

#65

커스터마이징 (1)

웅성웅성—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에서 부상자들이 줄줄이 실려 나와 치료실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

리에스타 성녀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자신의 몸을 던져 가며 노력했건만, 자신이 부족한 까닭에 그 뜻을 이뤄주지 못한 것 같아서.

그때 성녀의 눈이 치료실 한쪽에서 사제들에게 둘러싸인 성기사 한 명에게 향했다.

이미 몇 차례나 되는 정화 치료를 받았음에도, 아직도 몸 곳곳이 검게 변색된 하인리히였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오늘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이 재차 터져 나왔다.

“성녀님,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계셨군요.”

“아, 코델리아 추기경님···.”

그때 성녀와 마찬가지로 지친 표정의 추기경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녀님도 오늘 무리하셨는데, 이만 쉬셔야지요.”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네요.”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과도하게 신성력을 사용한 데다, 전투가 끝난 직후 남은 여력을 쥐어짜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그녀도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지만···.

이 광경을 보니 도저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서요.”

“그때라면··· 그렇군요.”

코델리아 추기경의 시선이 성녀를 따라 한곳으로 이동했다.

“하인리히 경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치료 기간은 좀 길어질 것 같지만요.”

“그거 다행이군요.”

“하지만···.”

성녀도 직접 하인리히를 살펴봤던 만큼, 그가 뒤집어쓴 저주의 기운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극한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종류의 흑마법.

무방비 상태로 직격하면 팔라딘이라도 전투 불능이 되어버릴 수준이었다.

‘보통은 신성력을 몸에 둘러 그 정도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하인리히는 그것을 맨몸으로 맞고 견뎠다.

코앞에서 발동된 그 저주의 위험성을 당사자가 몰랐을 리 없건만, 그는 오직 의지만으로 버텨낸 것이다.

방어에 돌릴 한 방울의 신성력까지 전부 검 끝에 담아 의지로 날을 벼렸다.

자신의 안위보단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그 확률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집념으로.

임무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그 모습이 미련하면서도, 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불사왕을 물리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을까요? 좀 더··· 제가 노력했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공간 이동 능력, 그것도 원하는 순간에 즉각 발동할 수 있는 축복은 굉장히 희귀한 힘이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도 가진 사람이 하인리히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떠미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희생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불사왕을 처리할 수···.

“성녀님!”

끝없는 자책에 빠진 성녀의 상념을 끊듯이, 코델리아 추기경이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는 저희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성녀님께서 자신을 탓할 여지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성녀의 모습에, 코델리아 추기경은 손녀를 보는 할머니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덕분에 저희는 새로운 영웅을 얻지 않았습니까. 불사왕이 부활한 지금, 그에 대적할 수 있는 영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성기사단장들과 같은 주교급의 신성력을 가진 젊은 성기사.

그 전투 능력도 결코 모자라지 않으니, 그는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실력자였다.

“이번 시련은 그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결코 이런 일로 쉽게 무너질 사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주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웅이니까요.”

그 영웅이 더욱 빠르고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 추기경은 그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을 끝맺었다.

‘영웅···!’

성녀는 기절한 하인리히를 다시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지금까지 읽어온 이야기책에서도 항상 그랬듯이, 성녀는 영웅의 옆에서 그를 돕는 조력자가 아니었던가.

여태껏 수많은 영웅담을 독파해 온 경험을 돌이켜 봐도, 성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마왕을 때려잡는 내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왕, 용사, 성녀!’

꿈 많은 18세 소녀의 상상이 부풀어 올랐다.

어느새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굳은 결의가 담긴 눈을 반짝거리는 성녀를, 코델리아 추기경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

짝짝짝—

“훌륭해, 아주 훌륭하다.”

나는 감동을 금치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주연과 감독을 모두 맡아, 훌륭한 장면을 연출해 낸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첫 단추는 괜찮게 끼었군. 이로써 한스와 하인리히 사이에 대적자로서의 서사가 완성되었다.”

이미 완성된 최종 보스 한스와, 급격히 성장 중인 용사 후보 하인리히.

지금의 그는 용사 후보라고 하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 도달한 주교급의 신성력은, 성기사단장들이나 가지고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실질적인 무기술이나 경험 등은 그들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부분은 추후의 노력과 하인리히가 가진 스킬들로 어떻게든 벌충할 수 있었다.

‘「축복 : 광검」을 얻은 것도 굉장히 좋고. 어둠 속성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릴 수 있는 극상성의 공격이라니.’

그것이 정말 순수하게 하인리히 혼자만의 힘으로 타이밍 좋게 깨달은 건지, 아니면 지켜보던 후원자께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서포트해 준 건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 힘이 영웅담의 주인공에 더없이 어울린다는 게 중요하지!’

이번에 교단 고위층들의 눈에 강한 인상을 주는 데에도 성공했으니, 이만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극한까지 뽑아먹었다고 봐도 되리라.

‘물론 가장 큰 이득은 따로 있지만.’

시선이 방구석의 바닥으로 향했다.

스스스—

방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며, 아래에서 검은 인영이 서서히 올라왔다.

격전 끝에 누더기가 된 로브를 걸친 해골.

이제는 불사왕이 된 한스였다.

철저하게 감춘 덕에 그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오싹함이 느껴졌다.

‘분위기 하나는 정말 장난 아니군.’

사실 가진 능력은 더 장난이 아니었다.

<개체 정보>

-개체명 : 한스

-종족 : 언데드 (불사왕)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불사의 심장」, 「사악한 지혜」, 「금단의 지식」, 「마도의 길」, 「심연의 눈」, 「마력 지배」

-특이 사항 : ‘불사왕의 심장’을 온전히 계승해 아우테리카 차원의 재앙, 3대 불사왕이 되었다. 심장을 통해 흑마력이 무한히 공급된다. 심장이 파괴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재생한다. 죽음을 초월하여 모든 사자(死者)의 왕이자, 모든 생자(生者)의 적이 되었다.

이미 사용해 본 적 있는 「심연의 눈」은 무한정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지만, 그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불사의 심장」은 기존의 능력을 강화하는 정도를 벗어나, 「사악한 지혜」나 「금단의 지식」 등 그가 가진 모든 스킬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거기에 「마력 지배」로 기본 마력 컨트롤이 강해진 건 물론, 상대방의 제어권도 일부 빼앗아 올 수 있게 되었으니···.

‘주문 사용 직업의 최종 진화형이군.’

그야말로 마왕 그 자체였다.

거기다 아공간의 심장을 직접 타격하지 않으면 피해를 받아도 의미가 없으니, 불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것 때문에 이번 연극도 성공할 수 있었지.’

심장부가 꿰뚫리고 신성력에 지져진 것치곤 너무 멀쩡한 한스의 모습.

「축복 : 광검」에 공간을 가르는 힘은 없었던 만큼, 당연히 진즉에 수복된 것이다.

하인리히는 좀 더 극적인 연출을 위한 저주의 여파로 상당한 회복 기간이 필요했지만, 그 또한 영웅의 시련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작전명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의 서막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설정상 타격을 입은 한스는 당분간 지구에서 활동해야겠지만, 이참에 그동안 밀린 청소를 해치우면 될 터.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수금이지! 관람비를 정산할 차례다.’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한 연극이었다.

물론 이번 사건의 후폭풍이 다른 곳으로 퍼지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그 직접적인 영향력은 교단 내부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였지만, 업적 보상도 있으니 당장 주어진 카르마가 그렇게 적진 않으리라.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8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1,641,132』

‘호오, 대충 백만 정도 오른 건가?’

이계로 전송된 각성자가 단번에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포인트.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얻게 된 카르마였다.

‘그 한 번의 사건 스케일이 좀 크긴 했지.’

어쨌든,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유스킬 강화를 선택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느꼈던 두통이 느껴지고, 나는 또 하나의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커스터마이징」를 획득합니다.》

아바타마다 1회에 한해 여러 가지 설정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게임에서 캐릭터를 생성하기 전에 몇 시간이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맞춤 제작 서비스 아닌가!

곧바로 사용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리고 때마침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아바타들은 각자의 일로 바쁜 만큼 당장 시험할 수 있는 아바타가 한스밖에 없었다.

또 만약 「커스터마이징」으로 외형을 변경할 수 있다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품으며 곧바로 한스를 통해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했고···.

나는 곧바로 할 말을 잃었다.

-매끈한 두개골, 짱구형 두개골, 금이 간 두개골···

-둥그런 안와, 치켜 올라간 안와, 축 처진 안와···

-가지런한 이빨, 뾰족한 이빨, 흡혈귀 이빨···

눈앞에 떠오른 세부 목록.

그것뿐만 아니라, 추가로 세밀한 조절을 통해 자신만의 해골을 원하는 대로 조형할 수도 있었다!

‘···종족의 한계는 넘을 수 없는 거였나.’

사실 평소 가면을 쓰고 다니고, 인간관계도 만들 수 없는 한스다 보니 외형 변경은 딱히 도움 되는 능력은 아니었다.

‘정 필요하면 환상 마법이라도 덧씌우면 되니까. 이제 마법 수준도 더 올라갔으니, 어지간하면 들킬 일은 없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다른 기능들을 더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한스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형 변경이 전부였다.

「커스터마이징」에 포함된 ‘초기 스테이터스 설정’은 이제 막 만들어지는 아바타에만 한정되는 능력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이제 장래 직업에 따라 미리 능력치를 조절해 둘 수 있는 건가?’

지금 그의 능력치는 포인트 분배를 통해 전체적으로 고르게 높은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라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제 그 평이한 능력치를 한 가지에 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법사는 지능과 마력, 전사는 힘과 체력처럼.

‘마침 이번에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바로 시험해 보자. 이번엔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까···.’

그렇게 아바타 생성을 위해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하려는 순간.

“어?”

불현듯 한 가지 정보가 뇌리에 스쳤다.

스킬은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거나 어떤 조건을 달성했을 때에 특정 기능에 대한 정보를 해금 식으로, 새로운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였다.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만큼 지금 새로 깨달은 기능은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매개체를 통해 그 관련 종족으로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다니!’

‘매개체’라는 단어가 굉장히 애매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거실의 구석에 자리한 화분 앞으로 향했다.

세실리가 주었던 친환경 공기청정기··· 아니, ‘메마른 세계수의 가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을 잡고 화분에서 쑥 뽑았다.

이것이 바로 ‘엘프’로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해줄 매개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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