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각인 (2)
“거기, 털복숭이. 이거 진짜 인간 맞는가?”
눈을 연신 끔벅거리던 노파가 할리를 삿대질하며 털보에게 물었다.
“거, 할매 노망났소? 사람한테 이거라니! 그리고 할리가 그동안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어서 그렇지, 어엿한 인간이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털보는 거품을 물듯이 흥분해서 항변했다.
파란만장한 ‘할리의 대모험’의 4막 3장에 사악한 흑마법사 ‘한스’에게 사로잡혀 생체실험을 당하다 탈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마 그걸 염두에 두고 그를 신경 써 준거겠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세심한 친구란 말이야.’
괴물이란 말에 내심 움찔했던 할리는 우람한 근육이 가득한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쨌든, 정말 인간이란 말이지?”
털보가 노발대발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이 그녀는 다시 찬찬히 그를 살펴보았다.
“거참, 나도 그동안 많은 전사들을 봐 왔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구먼.”
“노인장! 대체 뭐가 문제인지 설명 좀 해 주쇼. 이거 답답해서 원!”
그리고는 재차 감탄을 터트리는 노파의 모습에 이대로 가만히 있기도 뭐 했던 할리가 끼어들었다.
“딱히 문제라는 건 아니야. 오히려 아주 좋다고 볼 수 있지. 흘흘···.”
“오호?”
“끄응··· 그보다 바깥바람이 차구먼. 안에 들어와서 얘기하지. 나이를 먹으니까 삭신이 쑤셔서 말이야.”
등을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그들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고맙다는 말도 안 했군. 곤란하던 차에 도와줘서 고맙구먼. 차를 내올 테니 적당히 앉아 있어.”
이런저런 잡동사니로 가득한 내부로 들어서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노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풀을 달인 차를 내왔다.
“편히 드시게. 몸에 좋은 거니. 늙으면 좋은 걸 챙겨 먹어야 하거든. 오늘 도와준 것도 있으니 고맙다는 의미로 주는 게야.”
할리는 곧바로 찻잔을 집어 입에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김이 펄펄 날 정도로 뜨거운 찻물은 그의 강인한 육체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핫하하! 건강해지는 맛이군! 자,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주쇼!”
“에잉··· 젊은 놈이 성질머리가 그렇게 급해서야.”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노파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격이 없는 자는 각인을 새겼을 때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 정도야 기본이지!”
“각인은 기본적으로 육체의 에너지를 크게 소비하지. 마나··· 그러니까 전사들이 사용하는 오러의 비중도 크긴 하지만, 그것보단 생명력이 더 중요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대상자의 육체에 흐르는 생명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내 이 정도 생명력은 처음인지라 당황해버렸지 뭔가? 대전사도 몇 번 본적이 있지만, 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할리가 그 정도였소? 물론 오러를 쓰지 않고도 굉장한 수준이긴 했는데···.”
“저 정도면 인간이라기보단 몬스터에 가까워. 그래서 아까 내가 물어본 게야. 정말 인간이냐고.”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신체 능력을 지닌 몬스터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생명력.
그것이 고스란히 할리의 몸에 담겨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각인은 몸에 흐르는 생명력을 억지로 끄집어 올려서 사용하는 만큼, 그것이 풍족할수록 더 효과가 강한 걸 많이 새길 수 있지.”
각인이 새겨진 그 순간부터 지속적으로 생명력이 소모되기에, 전사의 단련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같은 에너지가 필수였다.
“그런데 이 정도면 전사의 각인이 아니라, 대전사의 각인을 새겨도 충분하겠구먼.”
“오! 그런데 혹시 그 위 단계는 없소?”
“흘흘··· ‘투왕의 각인’이라고 있긴 하지만, 근 수백 년간 아무도 새기지 못했다는구먼.”
“호오, 투왕이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이름에, 할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물론 그건 나도 할 줄 몰라. 애초에 대주술사 주도 아래에 여러 주술사의 보조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고.”
“거참,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일단 대전사만이라도 새겨주쇼. 나 정도면 그 정돈 가지고 있어야지! 하하핫—!”
“고것도 좀 곤란한데.”
“아니, 왜!”
할리의 항변에도 노파는 느긋하게 차를 들이켜며 애간장을 태웠다.
“우선 첫 번째, 재료가 없어. 알다시피 여기까지 남부의 전사가 찾아온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지.”
오랜 세월 잔병이나 고쳐주며 지내다 보니, 당장 있는 재료들은 그쪽에 사용하던 것뿐이었다.
“그 정도야 내가 금방···.”
“그리고 두 번째, 대전사의 각인을 새기기 위해선 그만큼 합당한 업이 필요하지. 단순히 생명력이나 마나가 많다고 새길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래도 수준 높은 각인일수록 까다로운 조건이 달린 모양이었다.
이를 어기면 이전에 들었던 부작용들이 그 당사자를 갉아먹게 되는 것이리라.
근손실, 탈모, 노화, 정력 감퇴···.
‘안 돼!’
하나같이 치명적인 부작용에 할리는 곱게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그 필요한 업이라는 게 뭐요? 드래곤이라도 잡아야 하나?”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던지라, 불퉁한 어조로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흘흘흘··· 그 정도까진 필요 없어. 어디 보자···. 그래, 강철의 성채 너머의 북부 산맥. 그곳의 포식자인 오우거를 단신으로 사냥하는 정도면 되겠구먼.”
‘응?’
“오우거라니! 할매, 그게 어떤 괴물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요?”
옆에서 듣고 있던 털보가 경악해 소리쳤다.
오우거는 5미터에 가까운 덩치에 어마어마한 밀도의 근육, 예리한 감각을 가진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사냥해 먹기만 해야 하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고랭크의 용병 여럿이 한꺼번에 덤비고 막대한 피해를 보아도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그걸 혼자서 잡으라니.
“대전사에 도전하겠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겠지. 사실 이것도 최소 기준이야.”
“음··· 하긴, 대전사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사냥에 성공한다면, 그 부속물은 각인을 새기는 데 쓸 수도 있겠지. 고위 몬스터는 주술을 사용하는데 훌륭한 재료가 되니까.”
느긋하게 말을 마친 노파가 다시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할리는 말없이 품속의 아공간 마도구를 뒤적였다.
“그러니 일단 다른 각인을 받고 성장한 후에, 천천히 도전해 보··· 푸우웁—!”
“으엑! 뭐 하는 거요, 할매? 남의 얼굴에 갑자기··· 으이잉?”
그는 주섬주섬 몬스터 부속물을 꺼내 놓았다.
커다란 뼈다귀와 힘줄, 눈알, 피가 담긴 병 등 종류별로 골고루.
“어··· 이건 설마···.”
털보가 멍청한 얼굴로 그것들과 할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우거! 오우거의 부속물이군! 그것도 사냥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신선한 것들이야!”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알아본 노파가 경악해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이건 아주 신선한 것들이었다.
강철의 성채 너머로 가서 사냥하고 어제 막 귀환한 직후였으니 말이다.
‘오자마자 주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느라 처분하는 걸 까먹고 있었는데, 잘됐네.’
다시 번거롭게 재료를 구하러 갈 수고를 덜었다.
“혹시나 해서 묻지만··· 이거 설마, 혼자 사냥해 온 겐가?”
이 타이밍에 재료들을 꺼내놓는 것을 보고 뭔가를 느꼈을까.
할리가 꺼낸 물건들을 자세히 살피던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눈만 껌벅였다.
“흐··· 후하하핫—!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노인장! 이 몸에게 오우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파하핫!”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걸로 대전사의 각인을 새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는 거로군?”
“그···그렇지. 혹시나 해서 다시 묻지만, 정말 혼자 잡은 게 맞겠지?”
“당연하지!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뻔히 아는데,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그의 말에 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에 차를 따라 다시 홀짝였다.
“그런데 할매. 대전사의 각인을 새길 수 있을 정도면 꽤 실력 있는 주술사라는 소린데, 왜 이런 데서 이렇게 지내는 거요?”
그때 얼굴에 묻은 찻물을 대충 닦은 털보가 시큰둥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녀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다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한 모금 마시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여기가 뭐가 어때서? 적당히 밥 벌어먹고 있고, 없이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데?”
“정작 할매가 봉변당할 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인간들 말이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나.”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아무래도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할리는 자신의 용건부터 빨리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각인은 언제 받을 수 있겠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다른 각인도 받고 싶은데···.”
“에잉··· 그놈 참, 성질 급한 건 한결같구나.”
혀를 차던 노파가 뭔가를 생각하다 대답했다.
“일단 지금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 다른 재료들을 구하고 미리 준비하는데 하루는 걸릴 게야. 모레 다시 오도록 해.”
“재료를 말해주면 내가 금방 모아 올···.”
“어허! 주술이라는 게 그렇게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야!”
시일을 맞춰 하나하나 정성들여 준비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일 또한 주술에 포함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비용 절반은 선금이야. 보다시피 가진 게 없어서 재료를 구할 수도 없거든.”
고가의 몬스터 부속물과 순조롭게 장사 중인 휴버트 덕에 매우 풍족한 상황이었으니, 비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다른 각인도 같이 받을 수 있나?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데 말이오!”
“하나 새긴 후에 일주일 정도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도 체력을 보충해야지. 각인 새기는 게 쉬운 줄 알어?”
그렇게 모든 용건을 마치고 나서, 할리와 털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파와 모레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골목길을 걸어 돌아가는 길.
“으엇차~! 자, 그럼 아까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러 가 볼까?”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내뱉는 그의 말에, 털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엉? 할리, 여기 오기 전에 뭐 하다 온 게 있어?”
“하하핫!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친구? 우리 같이 하다 만 거 있잖아?”
아무래도 이 친구는 건망증이 조금 심한 모양이었다.
할리는 그를 위해 조곤조곤하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설명해 주었다.
“아까 그놈들, 정리해야지?”
“엉?”
다시 맹한 표정을 짓는 털보.
아무래도 좀 더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내 경험상, 그런 놈들은 내버려 두면 꼭 나중에 사고를 치게 되어 있거든! 그 전에 미리 정리해 놔야지!”
물론 그 경험의 출처는 클리셰가 범벅된 지구의 대중문화였다.
“그···그런가? 내 경험으론 이 정도로 겁을 주면 알아서 몸을 사리고 얼씬도 하지 않던데.”
“어허, 생각보다 곱게 살아왔구만, 친구?”
털보의 말은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로 절여진 현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말 안이하기 그지없는 대응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고작 파락호 무리였고, 그들은 근육질 거구의 유명한 용병인데다 「야성」까지 사용해 공포를 각인시켰으니까.
아마 어지간하면 털보의 말처럼 알아서 길 테지.
하지만 생각 외로 주술사 노파가 더 유능했다.
거기에 첫 번째 각인이 이틀 후고, 이후로도 일주일 간격으로 새겨야 해서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그 정도면 공포가 희석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그래서 좀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오호···. 과연, 온갖 역경을 거치고 살아남은 불굴의 전사로군. 한 수 배웠다, 할리. 그래서 놈들은 어떻게 찾을 건데?”
놈들은 이미 도주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근거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흐흐흣— 어차피 이 근방에 거주하는 놈들일 텐데, 관련된 놈들 하나하나 족치다 보면 튀어나오지 않겠어?”
“그렇군! 만약 놈들이 오히려 앙심을 품고 복수하려고 들면?”
“그럼 덜 밟은 거지! 이번 일도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 미리 정리해 두려는 거니까!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밟아 놔야지!”
“과연··· 훌륭해! 너처럼 철두철미한 전사는 본 적이 없어, 할리. 무력뿐만 아니라 지력까지 갖췄구나!”
“뭘, 이게 다 경험의 산물이지. 투라바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거다. 와하하핫!”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
하지만 그 내용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거리에 여러 차례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난 후···.
그들은 깔끔하게 일을 마치고 시원한 마음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