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새로운 질서 (3)
탕—! 탕탕—!
“이런 씨부럴! 하회탈이 여기에 왜 오냐고! 요즘엔 서울 전역을 돌며 흉악범들 잡느라 정신없다며!”
“닥치고 총은 집어치워! 그딴 게 저놈한테 통할 것 같아?”
소소하게 강도질로 금품을 터는 것이 주 업무인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하회탈의 방문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굉장히 억울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사방은 결계로 틀어 막힌 상태라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하압!”
쿵—!
한 명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진각을 밟으며, 그 충격을 고스란히 주먹에 담아 하회탈에게 찔러 넣었다.
동시에 그의 동료들도 일제히 전력을 다해 협공을 가했다.
터어엉—!
사방에서 몰아친 막대한 기운이 담긴 공격에 검은 보호막이 출렁거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어느새 바닥에서 솟아오른 어둠이 그들의 전신을 휘감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크윽···.”
“제기랄!”
아니, 그들뿐 아니라 어느새 사방이 전부 질척질척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다.
마치 지옥의 심연을 그대로 베껴온 듯한 풍경.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시커먼 기운을 전신에서 뿜고 있는 가면의 존재가···.
처음처럼 그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푸흐흐··· 쓰벌, 마교 교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압도적인 위압감.
얼굴을 뒤덮어 오는 그림자를 느끼며,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지구에 ‘마왕’이 강림했다고.
***
“그래서 내가 딱 말했지! 선배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그랬더니 눈을 부릅뜨고···.”
태산이와의 술자리는 새벽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적당히 먹고 뻗으면 눕혀놓으려 했는데,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한이 쌓였는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주량만 강해서는···!’
차라리 내가 먼저 뻗은 척할까 고민하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마침 고민하던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말을 꺼내도 쉽게 무마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던 참이기도 했고.’
나는 기회를 노리다가 태산의 말이 끊긴 틈에, 곧바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야, 태산아. 근데 내가 요즘 취미로 소설을 하나 써 보려고 생각 중이거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건 이미 한창 알코올이 뇌를 지배하는 와중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 소설? 네가 웬일이래? 그래, 뭔 내용인데?”
“평범한 마왕과 용사 이야기로 써 볼까 하는데···.”
“클래식한 것도 좋지. 나도 한때 소설 좀 써 봤던 사람 아니냐!”
한창 감수성이 폭발하던 중학교 시절, 녀석이 소설을 쓰겠다며 하루 종일 노트를 붙잡고 뭔가를 끼적였던 적이 있었다.
물론 중학생의 혈기가 가득 담긴 그 심연의 유실물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는 할 터.
나는 곧바로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기본 플롯은 주인공이 대륙에 부활한 사악한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여정을 떠나고, 마왕이 일으킨 사건들을 해결하며 영웅이 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선량한 이들이 피해를 보는 내용을 쓰기는 좀 그렇더라고.”
“흐음···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바로 나 본인이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만큼, 태산도 별다른 말 없이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뭔가 나쁜 놈들만 족치면서도 마왕으로서 악명을 떨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네.”
“그렇네. 사악한 마왕이라면서 상대를 골라가며 죽이는 것도 이상하지.”
“나도 그래서 여러 가지를 고민 중이야. 넌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아?”
“흐음··· 바로 떠오르는 건 없는데. 좀 생각해 봐야할 것 같네. 어쨌든 일단 플롯을 짜는 단계라 그거지? 그럼 등장인물들 이름은 전부 정했어?”
“어? 어··· 아직?”
이름 정도야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너무 상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꺼려졌던 터라 대충 얼버무렸다.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이랑 마왕 이름은 임팩트 있고 멋진 걸로 지어야 돼. 막 마이클, 존, 한스 이런 이름은 절대 안 돼!”
움찔!
“흐···흐흠. 역시 마왕 이름이 한스 같은 거면 이상하려나?”
“당연하잖아! 마왕 이름이 한스라니! 최악이야!”
“어··· 나는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 반전 같은 느낌도 있고?”
“반전은 얼어 죽을, 그냥 촌스러워! 동네 엑스트라도 아니고, 임팩트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태산이 흥분해서 벌게진 얼굴로 강하게 주장했다.
술이 들어간 상태에서 뭔가 스위치가 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봐봐, 마왕이 딱 등장했어! 그런데 주변에서 ‘마왕 한스가 나타났다! 도망쳐!’ 이러면 어떻겠냐? 또 ‘으하하! 내가 바로 마왕 한스다!’ 하면 어때? 너무 모양 빠지잖아! 비웃음거리밖에 안 된다고!”
“그···그런가?”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전부 맞는 말이잖아?’
아우테리카의 재앙, 불사왕 한스.
한스라는 이름은 한 마을에 한 명은 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다.
대륙의 절대 악이라 불리기에는 조금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
‘문제는 이미 그 이름을 교단에서 알고 있다는 건데···.’
얇은 귀가 사정없이 팔랑거렸지만, 인제 와서 이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정 그 이름이 마음에 들면 애칭으로 쓰든지. 약자라던가. 정식 이름은 멋진 걸로 하고.”
“오? 예를 들면?”
“그래, 한스라면 어디 보자. 한, 스···. 흠··· 그래! ‘한니발 스트라우스’ 어떠냐? 졸라 멋있지 않음?”
녀석은 중학교 시절의 열정이 되살아난 듯 콧김을 뿜으며 몰입했다.
문제는 나 또한 그 이름이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간 쉬지 않고 들이켠 술기운이 조금씩 누적되어 약간의 취기가 감돈 상태에서, 태산의 열정이 옮겨붙어 내 안의 사춘기 감성 또한 타올라 버린 것처럼.
···그래, 사실 당연했다.
한스의 그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언행 또한, 나의 일부였으니까.
“그리고 마왕군 간부로 사천왕 같은 걸······.”
“그럼 이렇게 하면······.”
그렇게 우리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열정적인 토론을 나누었다.
***
‘젠장! 젠자앙—!’
캄캄한 어둠 속을 질주하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연신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고, 최대한 기척을 줄이기 위해 숨을 죽이고 내달렸다.
‘어떻게 그런 괴물이! 그건 7레벨 수준이 아니잖아! 설마 정말 8레벨인가? 단순히 소문이 아니었다고?’
그와 뜻을 함께하던 동료들이 그자 하나에게 모조리 죽어 나갔다.
도주에 특화된 고유스킬이 아니었다면, 그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함께 산화했을 것이다.
‘망할···! 알파가 사라지고 드디어 자유가 찾아왔나 했는데! 그보다 더한 놈이 나타나다니!’
그동안 강경파의 감마로서 권리를 누려온 것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보다 자유를 더 갈망하고 있었다.
조직 속에서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는 것이 어지간히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경파가 무너진 걸 기회로 잽싸게 움직인 건데.’
‘그날’에 별장에 소집되었던 이들은 모두 죽어서 사라졌다.
운 좋게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던 그는 이걸 기회라고 판단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곧바로 독립해 버렸다.
‘헤테로시스? 온건파와 뜻을 같이한다고? 그건 전보다 더한 규율에 얽매인다는 거잖아! 난 그런 생활은 죽어도 못해!’
새로운 로드에게 종속되는 데다가 마음대로 흡혈할 수도 없다니,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나 정도 수준이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요즘 서울은 하회탈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다고 하니, 지방으로 숨어들어 조금씩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헤테로시스의 로드가 직접 방문했다.
그것도 간만에 각자 취향의 인간들을 납치해 와 즐기던 시음 파티 현장에.
그 후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자신만 몸을 숨기고 도주 중이었다.
‘이 정도 거리를 벌렸으면 더 이상 못 쫓아오겠지?’
슬슬 고유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한계였다.
일시적으로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그의 능력은 효과가 강한 만큼 유지 시간이 짧았다.
최대한으로 발동하면 아무리 감각이 날카로운 이도 코앞에 있는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결계도 무시하고 빠져나갈 수 있어 지금까지 그를 살아있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후우··· 후우···.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스킬의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척을 죽이며 긴장 상태로 내달렸던지라,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도망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에게 남은 길은 이제 많지 않았다.
앞이 막막해져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이동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
“여기 있었군.”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얼려버렸다.
“어···어? 어떻게···!”
“신기한 능력이군. 순간적으로 존재가 사라지다니. 여기서 다시 나타나기 전까진 놓친 줄 알고 제법 당황했어.”
어느새 옆에 나타난 하인즈 2세가 태연한 기색으로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나타나는 위치를 감지했다고···? 족히 10키로는 이동했는데?”
고유스킬을 발동하는 중에는 발자국 같은 흔적도 일절 남지 않는다.
즉, 그가 사라진 위치에서 어떤 단서도 없이 이곳을 바로 찾아냈다는 뜻인데···.
“그게 뭐가 문제지?”
하지만 하인즈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한 데다 「간파」까지 곁들어진 초월적인 감각이 있는데, 이미 한 번 마주한 상대를 겨우 이 정도 거리에서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하···하하핫.”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대는 그저 연신 허탈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살려 달라고 해도··· 소용없겠지?”
“그래, 넌 이미 너무 늦었다.”
강제로 종속시킨다고 해도 여러 문제를 일으키며 사사건건 피곤하게 만들 스타일이었다.
능력 자체는 좋은 것 같다만, 헤테로시스가 알아서 잘 굴러가기를 원하는 하인즈가 원하는 인재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당할 수는 없···, 커헉!”
푸욱—
그가 반항을 위해 힘을 끌어 올리려던 찰나, 이미 하인즈의 손날은 그의 심장을 꿰뚫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크윽,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것이 새로운 질서니까. 따르지 않겠다면 배제할 뿐.”
피를 흡수당하며 점점 재가 되어가는 상대의 마지막 질문에 하인즈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뭔가 항변하고 싶다는 표정이 흩날리며 사라지고, 일순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이쪽도 다 정리됐네. 이만 돌아갈까.’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슬슬 동이 터 오는 것을 느끼며 하인즈는 서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다녀오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로드.”
“그래. 또 문제 있는 곳 있나?”
“당장 문제가 되는 곳은 없어요. 요즘 로드께서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덕분이죠. 이제 혈맹 내에서 헤테로시스는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봐도 될 거예요.”
“그런가···.”
해가 떠오르는 아침.
하인즈는 진소란이 있는 사무실에 도착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헤테로시스를 창설한 지 삼 주가 훌쩍 넘었다.
강인한 체력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가 직접 발로 뛴 덕분에, 이제 어지간한 문제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자생력을 갖추게 되었다.
큰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은 그가 미리 처리해 두었으니, 앞으로는 부하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만 직접 나서면 될 것이다.
‘그 말인즉, 지구에서 해야 할 일들은 이제 거의 다 끝났다는 말이지.’
하인즈의 최우선 과제였던 헤테로시스의 안정화가 방금 종료되었다.
혈맹을 통해 뒷세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니, 애당초 목표는 초과 달성했다고 봐도 되리라.
서울은 지금··· 한스와 하인즈를 통해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한국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이제 하인즈도 아우테리카 쪽에 전념할 수 있겠어.’
시나리오의 진행을 위해 이세계에서 별개의 세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어둠에서 정보를 모아오기엔 그가 가장 적임이었으니까.
이미 하나의 조직을 통째로 집어삼킨 경력도 있겠다, 이번엔 좀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당분간은 쉴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따로 연락하도록.”
“네? 이제 안 나오실 생각이세요?”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다.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오도록 하지. 나머지 일은 알아서 처리해.”
그러라고 그 자리에 앉혀둔 거니까.
하인즈 2세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유능한 부하 직원을 둔 사장의 기분을 한껏 만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