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75화 (75/284)

#75

브로코슬락 클랜 (2)

하인즈는 로실리카를 통해 프리지아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부지런히 움직여 수도 곳곳에 퍼져있는 뱀파이어들을 종속시켰다.

「정제혈정」은 체내에 주입되는 순간부터 그 몸의 흡혈인자를 강제로 진화시킨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힘의 근원이자 이능의 원천인 흡혈인자가 변질되는 순간, 그에 엮여있던 ‘피의 종속’ 또한 그 주체가 강제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브로코슬락’에서 ‘하인즈 2세’에게로.

하인즈는 그렇게 종속시킨 뱀파이어들에게도 로실리카에게 했던 거짓말을 적당히 늘어놓으며, 일단 평소와 같이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일부러 소량의 「정제혈정」만 주입해 피의 변질을 최소화했으니까. 어지간하면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피 냄새에 민감한 고위 뱀파이어라면 약간의 위화감은 느낄 수 있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 이들의 깃발이 갑자기 바뀌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흡혈인자가 변질되어 종속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는 전제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동족 포식으로 완전히 미쳐버린 거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예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로실리카를 비롯한 다른 뱀파이어들이 더 쉽게 내 말을 믿을 수 있던 거기도 하고.’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라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억지로라도 수긍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기는 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유독 충성심이 투철한 자들도 있을 테니, 통제를 강하게 설정했다고 해도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들킬 위험이 가장 높은 인물이 바로, 수도 내 감시 총괄인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일 터.

하인즈는 곧바로 여러 뱀파이어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녀를 꾀어내기 위한 무대를 준비했다.

‘그럼 월척을 낚아 볼까?’

준비를 마치고 머지않아, 실행의 순간이 다가왔다.

***

“브라이트 공녀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여기 이번에 들어온 신상 루비 목걸이 한 번 보시겠습니까?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세공사가 만든 건데···.”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은 평소처럼 느긋하게 사치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남쪽 지구를 순찰하는 날.

느긋하게 보석상에서 쇼핑을 마친 그녀는 고급 카페 옥상 정원의 차양 아래에서 차와 다과를 즐기며,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의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봐도 재미있단 말이죠.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후후후···.”

그녀의 대외적인 신분은 ‘프리지아 브라이트’로 탈리아 왕국의 실세인 브라이트 공작가의 일원이었다.

탈리아에 하나밖에 없는 공작가인 그들은 왕국 내에서는 왕가의 영향력을 능가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이미 대부분이 우리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니. 교단 때문에 전면에 나설 수는 없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요.’

그런 그들이 신경 쓰는 일이라면, 요즘 주신교단의 탈리아 교구가 본단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할 낌새를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로드가 최대한 힘을 써 볼 테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좀 더 귀찮아질 것 같단 말이죠.’

그래도 정치적인 수단을 써서 왕국 차원에서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교단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터였다.

그간 교단이 모두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이게 되면 항상 그곳에 양해와 허락을 구하고 움직였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이 타 세력을 배려해 최대한 내정간섭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다른 세력도 교단에게 양보와 존중을 표했던 것이다.

불사왕 토벌대 때야 워낙 사안이 위중해 그들이 강압적으로 나오더라도 대응하기 힘들긴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없지 않은가.

후룩—

프리지아는 재차 찻물을 들이켰다.

좋은 향의 차를 즐기는 것 또한 그녀의 소소한 취미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녀가 취미 생활을 만끽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순간···.

“흠?”

수도의 남문을 넘어선 바깥, 그녀의 감지 범위 끝자락에서 생소한 뱀파이어의 기운이 수도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죠··· 이건? 기운은 순혈 정도인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데?”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던 프리지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르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녀는 감각이 뛰어난 만큼, 뭔가 불확실한 것이 생기면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기운으로 보건데 진혈인 그녀에게 그리 위협적인 상대도 아니거니와, 브로코슬락의 영역 내에서 자신들에게 싸움을 거는 멍청한 짓을 할 리도 없었다.

휘이익—

옥상 정원에서 그녀의 모습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사라지고···.

잠시 후, 그 모습은 성벽 바깥의 한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을 멈추고 가만히 수도를 바라보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뱀파이어의 등 뒤에서.

그녀는 쓰고 있던 양산을 느긋하게 빙글빙글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순순히 밝히는 게 좋···을···?”

화악—!

하지만 그 순간.

진득한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그들이 자리한 언덕을 둘러싸듯 바닥에서 핏빛 문양이 떠올랐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은폐」와 「피의 신비」를 이용해 만들어낸 결계였다.

발동과 동시에 내외부의 공간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제 결계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도주는커녕, 한 점의 기운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함정?”

하지만 프리지아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자신은 진혈이라는 고고한 자존심과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확신이, 위기감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건, 이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파란색으로 위장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의지가 담긴 그녀의 요사스런 눈빛이 서서히 뒤를 돌아보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한 뱀파이어에게 향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 크윽!”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안을 시전하던 그녀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마주친 시선을 황급히 피하는 그녀의 눈가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마안이 튕겨져 나왔어?! 이 정도 반발력이라니, 말도 안 돼!’

어느새 그자의 검은 눈동자 또한 피처럼 붉게 변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리지아는 그때서야 상대가 고작 순혈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지 능력에 자신이 있던 그녀를 완벽히 속일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춘··· 진혈이었다.

“···당신, 목적이 뭐죠? 진혈이 아무 언질 없이 브로코슬락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요?”

그녀는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천천히 양산을 접었다.

마안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한 그 순간.

“내 목적?”

검은 머리의 뱀파이어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로코슬락의 모든 것이다.”

퍼엉—!

직후, 터져 나오는 충격파와 함께···.

프리지아 브로코슬락과 하인즈 2세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

폭음과 함께 기운의 잔재가 퍼질 때마다 주변을 감싼 결계가 연신 뒤흔들렸다.

화사한 금발을 가진 20대 초반의 귀족 여성.

그 가녀린 겉모습과는 달리, 과연 진혈답게 프리지아와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쉬익— 콰앙!

혈마력에 뒤덮인 양산이 어지러운 경로를 그리며 하인즈가 이동할 방위를 점해왔다.

하인리히의 시점으로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오랜 세월 배우고 깨우친 제대로 된 검술이었다.

‘마안을 사용하기에 당연히 마법파일줄 알았는데, 무투파라는 정보를 듣고 상당히 당황했었지.’

이미 알고 싸움을 시작했는데도, 뱀파이어의 육신과 오랜 세월 단련한 검술의 시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상체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양산의 끄트머리를 쳐내는 순간, 그 반동까지 이용해 반원을 그리며 곧바로 다리를 베어온다.

무릎을 세워 그것을 튕겨내는데···.

‘가벼워?’

공격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콰직!

그와 동시에 하인즈의 감각을 속이고 뻗어진 그녀의 뾰족한 하이힐이 그의 발목에 꽂혔다.

그에 하인즈가 잠시 휘청한 순간, 양산이 재차 그의 심장으로 내질러졌다.

콰앙—!

「가속」을 사용해 급히 올린 가드로 겨우 양산을 막은 하인즈가 균형을 잃고 뒤로 맥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유효타를 가한 프리지아는 살짝 짜증 어린 표정으로 거리가 벌어진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흐음, 과연··· 대단하군.”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하는 하인즈의 얼굴에는 그저 미미한 감탄만이 감돌고 있었다.

짙은 혈마력이 깃들어 강철도 두부처럼 꿰뚫을 공격이었지만, 그에게는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의 피해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 무슨 몸뚱이가! 거기다 혈마력까지!”

프리지아가 재차 이를 갈며 양산을 움켜쥐었다.

경험을 비롯한 전투의 기교에서는 그녀에게 밀리는 하인즈였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에서는 반대로 그 이상의 격차가 있었다.

「혼혈진화」로 이뤄진 압도적인 스펙 차이.

힘과 속도, 내구력을 비롯한 육체 능력은 물론 혈마력의 양과 제어력, 응용력까지 차원이 달랐다.

순간적으로 타점에 밀집한 혈마력이 공격을 흘려내고, 그 충격은 육체가 전신으로 분산시켜 흡수한다.

그 와중에 입은 피해도 「초재생」으로 눈 깜짝할 새에 회복해 버리니, 프리지아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지금도 상당히 페널티를 가지고 싸우는 중인데.’

애초에 하인즈의 전투방식은 은밀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암살자에 가까웠다.

그녀가 결계를 파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면승부를 하고 있을 뿐.

아무리 공들인 결계라도 진혈이 마음먹고 가한 공격에는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

또 충돌의 여파로부터 결계를 지키기 위해 지속해서 혈마력이 새어나가는 것 또한 소소한 핸디캡이었다.

‘그런데 백 년이 넘게 살아온 뱀파이어라 그런지 경지가 예사롭지 않네. 스펙이 이렇게나 차이 나는 데도 정면에서 근접전으로 부딪치면 승산이 없겠어.’

물론 이쪽이 지지도 않을 테니, 싸움이 끝도 없이 늘어질 것이다.

프리지아의 혈마력은 지구의 기준으로 따지면 7레벨 수준이었지만, 그 전투력은 강경파의 베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갖 성장 보정과 고유스킬로 급성장한 각성자와 오랜 세월 스스로를 갈고 닦은 이세계인의 차이이리라.

“과연 훌륭하지만, 조금 아쉽군. 나를 따를 생각은 없나?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입 의사를 표해 봤지만, 그녀에게선 웬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빛만 돌아올 뿐이었다.

아쉽지만, 그녀 또한 약간의 강제력이 동원돼야 할 것 같았다.

‘이제 프리지아에 대한 분석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까.’

남에게 들은 정보와 실제로 겪은 정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잔혈이나 순혈도 아니고, 진혈을 휘하로 거두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계속 맞다 보면 생각이 좀 바뀔 거다.”

“하아··· 허세는 참. 당신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그 몸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두드리고 두드리다 보면 결국에는··· 읏?!”

그 말을 끊고, 그녀의 뒤편에 있는 결계에서 핏빛 칼날이 쏘아졌다.

몸을 휙 뒤튼 그녀를 스친 칼날은 맞은 편 결계에 도달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사라졌다.

“당신···!”

“뭘 오해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너처럼 무투파가 아니야. 지금까지는 그저 어울려줬을 뿐이지.”

처음부터 이 내부는 하인즈의 영역이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피의 신비」를 사용하자, 결계의 일부가 그의 의지에 따라 이빨을 세웠다.

칼날, 화살, 작살, 사슬 등 온갖 공격이 프리지아를 노리고 쏘아졌다.

하인즈로부터 시작된 혈마법과 결계에서 사출된 혈마법이 시너지를 이뤄 그녀의 손발을 어지럽혔다.

거기다가···.

콰앙—!

“커헉!”

순간적으로 「은폐」와 「투명화」를 사용하고 「간파」로 빈틈을 파악한 후, 「가속」으로 파고든 그가 혈마력을 듬뿍 담은 주먹을 그녀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옆으로 튕겨 나가는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 오는 핏빛 사슬과 그에 연계되는 무수한 혈마법.

하지만 하인즈는 슬쩍 인상을 굳히고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데.’

공격이 적중한 찰나에 가해진 프리지아의 순간적인 반격에 그의 어깨에 구멍이 뚫렸다.

공격에 너무 신경을 쏟은 나머지, 방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초재생」으로 순식간에 회복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인즈가 좀 더 철저하게 그녀의 숨통을 조여 가자, 이후의 상황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점점 수렁에 빠져들듯 그녀의 기세가 점점 약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보다 더 오래 버텼군.”

“크윽··· 다, 당신···!”

전신이 걸레짝이 된 프리지아가 사슬에 포박당한 채 하인즈의 앞에 널브러졌다.

브로코슬락 클랜의 진혈 중 하나가, 드디어 하인즈의 손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