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76화 (76/284)

#76

브로코슬락 클랜 (3)

푸욱—

“흡!”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는 하인즈는 제압당한 프리지아의 뒷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가느다란 목을 깊숙이 파고들자, 그 상처를 통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하인즈는 그녀의 혈류에 맞닿은 상태로 혈관에 직접 「정제혈정」을 주입했다.

“크으읏—!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역시 진혈이라는 것일까.

그녀는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피를 통제해, 이미 하인즈의 「정제혈정」과 접촉한 피가 전신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격리 조치했다.

상황에 즉각 대응하는 능력이 제법이었다.

‘물론 의미 없는 반항이지만. 어디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볼까.’

계속해서 주입되는 「정제혈정」.

이미 기력이 쇠한 프리지아로서는 그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 급소인 목을 통해 들어오다 보니, 그곳의 피를 계속해서 통제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끄흐읍···.”

결국··· 목에서 시작된 이상이 순식간에 뇌와 심장으로 퍼지고, 그것은 곧 그녀의 전신으로 확산되었다.

‘이 미친 작자가! 자신의 피를 강제로 흘려 넣다니! 대체 무슨 속셈으로···.’

곱게 죽이지 않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진혈의 피가, 그것도 그녀보다 강한 이의 피가 들어오면 극심한 정신 오염이 일어날 것이다.

물론 조금 강해지기야 하겠지만, 미쳐버리면 그것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설마, 나를 이용해서 수도를 파괴하도록 만들 셈인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피는 뱀파이어가 가진 힘의 근원, 왜 굳이 자신의 힘을 소모하면서까지 일을 복잡하게 처리하겠는가.

‘절대 그 뜻대로 될 수 없어!’

원래 이 정도 소량의 피로 진혈인 그녀를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 그녀의 체내에 들어온 피는 끊임없이 주변의 혈액에 영향을 주며 흡혈인자를 변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마치 맹독이 몸에 들어온 것처럼 전신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고통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우드득— 뚜둑!

그런데, 정신 오염이 일어나기는커녕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그녀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동족 포식의 효과가 이렇게 좋았나? 아니, 단순히 혈마력이 늘어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오랜 세월, 자신의 육체를 통제하는 것에 통달한 프리지아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근력, 순발력, 유연성 등을 비롯한 신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혈마력도 훨씬 잘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효율 또한 차원이 달라졌다.

정신 오염에 대응하기 위해 집중되었던 그녀의 정신이 드디어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주입된 피에 의해, 그녀의 체내에 존재하는 흡혈인자들이 영향을 받아 일제히 변이를 일으켰다.

···그것은, 차라리 진화라고 불러야 할 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하인즈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를 따를 생각은 없나?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무래도 그때 했던 말이 미친 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신!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죠···?”

프리지아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연신 자신의 변화된 몸을 살폈다.

여전히 정신은 명료한 상태였고, 이제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이질감도 없이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하인즈는 그런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진혈에게도 통하는군. 다른 이들에 비해 「정제혈정」이 꽤 많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효과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만약 통제되지 않는다면 곧바로 그녀를 처리할 목적으로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 다행히 무난하게 종속 관계가 맺어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진 것 같군.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대체 무슨 속셈이죠? 갑자기 이렇게 나온다고 내가 당신을 따를 줄···.”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내뱉던 프리지아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시립했다.

“아···?”

그제야 이상을 인지했는지, 그녀가 자기 몸과 하인즈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리곤 기습적으로 그를 향해 팔을 내지르다가, 갑자기 돌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눈치챘나 보군. 하지만 이제 날 공격할 수 없을 거다.’

그것이 ‘피의 종속’의 기본 효과였으니까.

“이···이게 어째서? 어떻게 당신이? 어라?”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더는 나아가지 않는 손.

직접 확인해 보고서야 현재 상황을 확실히 깨달은 프리지아가 혼란에 빠졌다.

브로코슬락의 진혈이나 되는 이가 오늘 처음 본 자에게 종속되어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군.”

“이···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이건 설령 성혈이라도 불가능한···.”

아니, 그녀는 아직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화에 집중해라, 프리지아.”

“합!”

그때서야 하인즈에게 시선을 맞추며 경청할 준비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설정상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더 큰 힘을 줄 수 있다고 그녀를 회유했다.

물론 그녀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부정적이었다.

“브로코슬락은 ‘시작의 혈맥’ 중 하나입니다. 거기다 성혈께서 남아 계시는 몇 안 되는 혈맥이기도 하고요. 그런 곳을 방계인 당신이 지배하겠다고요?”

거기에 예상치 못한 정보도 튀어나왔다.

브로코슬락이 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원류(原流)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성혈에 대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잔혈로 일주일 남짓 교육받았을 뿐이니까.’

그 때문에 저런 고급 정보를 접할 길이 없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그 성혈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봐.”

“으윽··· 그러니까···.”

시작의 혈맥의 시조이기도 했던 성혈.

그 이름만큼 강대한 힘을 지닌 그들이었지만, 그간 오랜 세월이 흐르며 하나둘 사라져 지금 남은 이들은 두셋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성혈의 계승이 굉장히 까다로운 까닭에, 그 힘이 후대로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성혈을 계승한 이가 있기는 한 건가?”

“···몇십 년 전에··· 유페르쉬 클랜의 로드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페르쉬 클랜이라면 교육받으며 들어본 적이 있었다.

브로코슬락과 함께 아우테리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클랜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그쪽이 더 강한 세력인 모양이군.’

“그리고 저희의 시조이신 ‘브로코슬락’님께서는 오래전에 동면에 드셨습니다. 최대한 오래 버티며 힘을 계승할 수 있는 후계를 기다리기 위해.”

오직 클랜의 진혈만이 알 수 있었던 정보였다.

하지만 동면 장소는 그들에게도 비밀로 한 터라, 성혈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깨어나신 성혈께서 방계에게 자신의 핏줄이 넘어갔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당신,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거예요!”

“어쨌든 지금은 동면 중이라는 거군.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고?”

“으··· 애초에 오랜 시간을 버티기 위한 수단이었으니까요. 언제 깨어나실지는 그분만이 아시겠지만, 당장은 아닐 거예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양반이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

그보다 이제 이 여자를 설득할 차례였다.

브로코슬락 클랜의 로드에게까지 쉽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 프리지아. 너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죠?”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는 삶, 당당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삶, 교단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삶.”

프리지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른 뱀파이어들을 휘하로 거두며 정보를 수집할 때, 그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알게 된 그녀의 일면.

물론 남에게 들은 이야기만을 통해 섣불리 단정 짓는 건 위험한 판단이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양지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동경한다.

아무리 진혈이라고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태양 아래의 잦은 외출.

고가의 쇼핑을 통해 사치를 부리고, 잦은 사교 모임을 통해 인간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주변 이들의 아부와 찬사를 즐기며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즐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환상에 불과했다.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을 터였다.

이미 몇 번이나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가며, 이전까지 쌓아왔던 것들을 버려야만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우리는 태생부터 양지에 나설 수 없는 종족이니까요.”

“누가 그렇게 정했지?”

“···인간들의 인식과, 실질적으로 주신교단의 심판이···.”

“왜 주신교단을 무서워해야 하지?”

“강하니까요! 이 대륙에서 그들을 거스를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죠? 제국이나 마탑 연맹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어림도 없어요!”

그런 이들도 교단과는 양호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실질적으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대답에 하인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결국, 힘이 부족하다는 말이군.”

“···당신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건 몇몇이 좀 더 강해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몇몇 수준이 아니라면?”

“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는 프리지아를 바라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예를 들어—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뱀파이어 클랜이 한데 모여 힘을 합칠 수 있다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왜 말이 안 되지?”

“클랜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조직이에요. 제대로 협력이 될 리도 없거니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될 거에요. 그리고 금방 무너져 내리겠죠.”

하인즈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래. 그럼 만약에··· 그들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로드가 있다면?”

“하! 그건 성혈이라도 불가능한 일··· 인···데?”

갑자기 드는 기시감에 말끝을 흐리는 프리지아.

당연하지.

그 말은 불과 조금 전에 그녀가 하인즈에게 종속된 후 혼자 중얼거리던 말이었으니까.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 능력이지. 나는 이 피를 통해, 이 대륙의 모든 뱀파이어를 내 휘하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너처럼 더 강해지겠지.”

“아···.”

“언제까지 숨죽이고 살 거냐. 안 그래도 소수인 뱀파이어들의 힘이 결집되지 않으니, 언제까지고 탄압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프리지아의 눈이 흔들렸다.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럼, 저희 브로코슬락은···.”

“물론, 내 피의 원류이자 휘하로 들어온 첫 번째 세력인 브로코슬락에게도 그만한 대우는 있어야겠지.”

거의 다 넘어왔다.

이제 이걸로 끝이다.

“내가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었을 때, 너희 또한 내 옆에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이 하인즈 2세에게 완전히 굴복했다.

***

탈리아 왕국 브라이트 공작가 저택의 심처.

시커먼 어둠 속에서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은 사내가 한 중년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브로코슬락 클랜의 로드, 뮬로 브로코슬락은 오른손에 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그에게 보고를 마치고 공손히 시립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상황이 애매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오히려 저쪽에서 그와 관련해 저희에게 협조를 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흐음, 기어코 불사왕이 부활했다고···.”

“따로 알아본 바로는, 최근 교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시기상으론 저번에 저희 쪽의 신전을 통해 교단의 정예들이 급히 이동했던 일과 뭔가 연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뭔가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주신교단에서 각 세력의 상층부에만 은밀하게 전한 정보가 있었다.

불사왕의 부활 소식과 그에 미리 대비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좀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 조만간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전언이었다.

“일단 계속 노력은 해 봐. 불사왕은 불사왕이고, 그렇다고 교단이 더 세력을 키우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예, 그럼 휘하의 귀족들과 함께 중지를 모아 보겠습니다. 로드.”

“나가봐.”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두 손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인사한 중년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찰칵—

살며시 문을 닫은 그는 식은땀을 훔치며 치미는 한숨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곳에서는 한숨조차 마음대로 쉬어서는 안 됐다.

이 저택은 이름만 그의 소유였지,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소리 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년, 탈리아 왕국의 실세인 브라이트 공작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이들을 보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프리지아 님, 안녕하십니까.”

“어머! 아버님이 아니십니까. 평안하신지요? 로드께 보고를 드리고 오시는 길이신가 봅니다.”

프리지아의 위장 신분이 공작의 딸 중 하나였던지라,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차라리 반말해 주는 게 편한 그에게는 당연히 부담스러운 호칭일 뿐이었지만.

“예, 이번 교단 건에 관하여 보고를 드릴 일이 있어 찾아뵙고 오는 길입니다.”

말을 마친 공작이 그녀의 옆에 있는 이를 슬쩍 바라보았다.

완전히 처음 보는 이였지만, 공작은 내색하지 않고 허리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 옆에 클랜의 진혈인 프리지아가 있는 이상, 그는 어떠한 사안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 했다.

“그럼 저는 로드께 가 보겠습니다. 아버님도 들어가 쉬시어요.”

“예, 그럼 저는 이만···.”

공작이 재차 고개를 숙이고 통로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공작을 지나친 두 사람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뮬로 브로코슬락이 있는 저택의 심처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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