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78화 (78/284)

#78

브로코슬락 클랜 (5)

“···역시 클랜로드라는 건가.”

하인즈는 뮬로의 손에 들린 잘린 팔을 슬쩍 쳐다보고, 다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결계의 힘을 모조리 자신에게 집중시킨 대가로, 힘과 속도는 물론 감지력과 은밀성을 포함한 모든 능력이 한계를 초월한 듯했다.

하인즈에게 혈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 방법을 생각한 것일 터.

‘몸에 부담이 큰 방법인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진혈의 뱀파이어가 가진 생명력이라면, 그 여파도 제법 오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급하게 움직였나? ···아니, 역시 지금이 최선이었어. 로드의 수준이 생각 이상이었을 뿐.’

아무리 위장을 잘한다고 해도, 혈족들의 이상은 언젠간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프리지아를 끌어들였지만, 그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차라리 상대가 어떤 전조를 느끼기도 전,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기습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덕분에 이렇게 아무 방해 없이 뮬로의 코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무투파인 프리지아의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그의 평시 대비 수준이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는 것뿐이었다.

“후우— 후우— 네놈,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화르륵—

연신 숨을 몰아쉬던 뮬로의 손에 있던 잘린 팔이 붉은 불꽃에 휩싸였다.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타오르는 팔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쉬익—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은 덕일까, 이번에는 그가 사라지는 순간 곧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전방을 할퀴어 오는 칼날 같은 다섯 개의 손톱을 「가속」까지 사용해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그리고 한껏 날이 선 감각에 포착된 상대의 빈틈으로 망설이지 않고 왼손을 찔러 넣었으나···.

카가가각!

그 단단한 몸을 뚫지 못하고 불똥만 튈 뿐이었다.

‘단단하군. 이게 그동안 하인즈를 상대했던 적들의 심정인가?’

하인즈의 공격을 무시하듯 공간을 찢어발기며 뮬로의 오른손이 재차 휘둘러졌다.

마법이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뮬로는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였다.

프리지아나 오보르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그의 몸놀림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그에 하인즈가 다시 회피하려던 순간, 그 움직임이 갑작스레 덜컥 정지했다.

‘큭? 뭐가?!’

바닥에서 다리를 휘감아오는 붉은 가시덩굴.

그것은 하인즈의 힘에 의해 순식간에 끊어졌지만, 그때는 이미 코앞까지 뮬로의 손아귀가 다가온 뒤였다.

“흐읍!”

최대한 혈마력을 밀집한 왼손으로 상대의 손목을 후려쳐 궤도를 비틀었다.

그 과정에 피투성이가 된 왼팔을 수습하기도 전, 뮬로의 날카롭게 뻗은 왼손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자세가 흐트러져 회피할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하인즈는 몸을 비틀어 최대한 심장을 지키며, 궁여지책으로 ‘오른손’을 내밀어 그 공격을 대신 받아냈다.

푸화악—!

쥐어뜯어 오는 날카로운 손톱에 그의 오른팔이 뜯겨나갔다.

그렇게 그의 오른팔이 다시 뮬로의 왼 손아귀에 쥐어졌다.

“후우— 후우— 응···? 이건?”

한순간 멈칫한 뮬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들린 잘린 팔을 바라보았다.

데자뷔였다.

“너··· 팔이?”

그는 피눈물은 물론 쌍코피까지 흐르는 얼굴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손에 들린 팔과 바닥에 떨어져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팔을 비교하듯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둘 다 오른팔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음? 아아— 이거 말인가?”

하인즈는 당당하게 자기 오른손을 그에게 뻗으며 손가락을 흔들어 주었다.

어느새 「초재생」으로 재생된 매끈한 신상을 과시하듯이.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하인즈의 헌 팔과 새로 돋아난 그의 새 팔을 번갈아 보던 뮬로가 입만 뻐끔거렸다.

물론 진혈 정도 되면 소실된 신체 부위 정도는 충분히 재생할 수 있다지만, 절대 저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슬라임도 아니고 어떻게 잘려 나간 부위가 저렇게 쑥쑥 자라난단 말인가?

“대체 어떤 피를 계승했기에 그런 능력들을 갖고 있는 거지? 브로코슬락의 방계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뮬로가 이를 갈며 하인즈의 잘린 팔의 단면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변질되긴 했지만 기본 바탕이 브로코슬락의 혈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프리지아가 앞서 했던 말들이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 이상한데?”

그런데 그 피에서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 기틀은 그에게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그 외의 전부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방계의 피가 이렇게까지 변질될 수 있나? 다른 클랜의 일원을 동족 포식한다고 해도 이렇게 되지는 않는데···.’

근본부터 뭔가가 달랐다.

그야말로 모순,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

그는 대치 중인 하인즈를 노려보며, 잘린 팔에서 흐르는 피를 살짝 핥았다.

순혈 이상만 되어도 소량의 피를 맛보고 상대를 분석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진혈인 그에게 이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없었어야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큽—?! 퉷! 크흡··· 쿠워억—!”

후두둑—! 철퍽—!

바로 뱉어내고도 피를 한 바가지 토해내는 뮬로.

“이, 이건 도대체···?”

그가 섭취한 소량의 피가 순식간에 체내의 혈액에 영향을 주며 퍼져나갔다.

그것뿐이라면 별 상관없었을 텐데··· 문제는 그 피에 응축된 어마어마한 사념이었다.

[나의 비원이···.]

[혈맹을···.]

[힘이···.]

[······.]

그 때문에 하인즈의 피에 영향을 받은 다른 피까지 모조리 게워내야만 했다.

‘수십? 수백? 어떻게 이런 지독한 피를 가지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이건 뱀파이어들에게 맹독이나 다름없는 피였다.

애초에 이런 피가 존재할 거라고는, 그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결계의 힘을 집중시켜 폭발적으로 상승한 그의 능력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아차···!’

그리고 흐트러졌던 감각이 수습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푸욱—!

“커헉!”

“오랫동안 골방에 처박혀있었다더니 감이 떨어졌나 봐? 전투 중에 딴생각을 오래도 하네?”

물론 그들의 기준에서였다.

그의 집중이 흐트러진 것은 기껏해야 3초 남짓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수준에서 그것은 십 수 번은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은밀하고 빠르게 접근한 하인즈가 방심한 뮬로의 심장에 손날을 박아 넣을 수 있을 만큼.

“로드—! 비켜라, 프리지아!”

“잠깐만 저랑 어울려주셔야겠어요.”

급히 달려드는 오보르를 어느새 뱀파이어들을 전부 제압한 프리지아가 중간에 막아섰다.

암살자 타입인 그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이전까진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지만, 「정제혈정」의 강화 효과로 이제는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끄으— 네노옴!”

휘익—!

심장이 파괴된 뮬로가 거칠게 휘두른 손톱에, 하인즈는 미련 없이 거리를 벌렸다.

한순간 능력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방어력을 뚫어낼 수 있었지만, 그가 다시 정신을 수습한 이상 가까이서 치고받아 봐야 좋을 게 없었다.

하인즈가 뒤로 물러서자, 뮬로의 가슴에 났던 구멍이 초월적인 재생력으로 빠르게 아물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끄흑— 쿨럭! 후우— 후우—”

눈, 코, 입, 귀.

칠공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뮬로의 모습은,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

촤르륵—

“끄윽! 네, 네놈···!”

잘려 나갔던 두 개의 오른팔이 핏물로 녹아내리며, 두 줄기 핏빛 사슬로 변해 뮬로의 전신을 구속했다.

하인즈의 질긴 생명력이 고스란히 담긴 덕분에, 한참을 타오르던 팔 한 짝도 겉 부분만 좀 손실이 생긴 정도였다.

‘후우··· 이걸로 끝이군.’

하인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하고 결계의 술법까지 깨진 뮬로는 더 이상 저항할 기력도 없는 듯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콰아앙—!

때마침 한쪽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던 프리지아와 오보르의 싸움도 끝이 났다.

승자는 당연히 프리지아였다.

「정제혈정」으로 스펙의 차이도 상당했을뿐더러, 전사와 암살자라는 상성 우위까지 있었으니까.

질질질—

그녀는 축 널브러진 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다 끝나셨나 보군요. 저도 막 마무리 지은 참이랍니다.”

프리지아가 뿌듯한 얼굴로 하인즈에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 직접 체감한 자신의 능력에 대단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다른 뱀파이어들도 죽이지 않고 제압만 했어요. 결계의 효과가 사라진 후에는 그렇게 어렵진 않았으니까요.”

아무래도 같은 혈족이었던지라 살생을 꺼리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앞으로의 일에는 일손이 많이 필요하게 될 테니 노동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하인즈는 다시 제압된 뮬로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정제혈정」을 주입해도 될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프리지아는 그보다 혈마력도, 무력도 명백하게 부족한 상대였지만···.

뮬로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혈마력의 양은 그보다 더 많기도 했으니.

“흐음, 그럼 그렇게 한번 해 볼까.”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하인즈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사슬을 잡아당겨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목에 입을 가져갔다.

“네놈··· 대체 무엇을···?”

“로드직을 계승하는 중이다.”

푹—

뮬로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이 박혀 들었다.

***

땅속 깊은 곳에 파묻힌 석실.

공기도 통하지 않는 밀폐된 어둠 속에 누워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움찔!

그 적막한 공간에서 시체처럼 누워있던 이에게 작은 변화가 일었다.

연신 작게 경련을 일으키는 손끝을 시작으로,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아···.”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밀폐된 석실에 울려 퍼졌다.

“아아···.”

그 목소리는 목을 가다듬듯 몇 번 소리를 내고서야 이윽고 정상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서서히 일렁거렸다.

“뭐지?”

그 존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이 감지되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잠이 쏟아져 정상적인 사고가 이뤄지지 않는다.

“아, 졸려···.”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깨어나 버려, 당장 동면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떠졌던 눈이 다시 무겁게 감겨온다.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야지.”

그렇게 어둠을 밝혔던 붉은 빛 한 쌍이 스르륵 닫히고, 석실은 다시 고요한 어둠 속에 파묻혔다.

***

해리스가 엘프들과 함께 ‘숲의 길’을 따라 걸은 지 며칠이 지났다.

이동하면서도 계속해서 교육과 수련을 병행하던 나날이 이어지던 때, 그들을 이끌던 라포리가 일행을 돌아보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슬슬 도착하겠군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주변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지겹게 봐왔던 몽환적인 숲길만 계속해서 이어져 있을 뿐.

“와! 정말요? 그러면 곧 세계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건가요?”

그동안 해리스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며 수련에 열중하던 세실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세계수를 본 적이 없는 이온 대륙 출신이다 보니, 곧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세실리가 곧 하이 엘프가 될 거라는 뜻이기도 하지.’

자격을 갖춘 하이 엘프 후보가 세계수의 앞에 도달하는 것이, 그 마지막 조건이었으니까.

“물론입니다. 세계수께서도 세실리 양을 무척이나 반기실 겁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라포리 또한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오랜 여정이 끝나고,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후, 일행은 몇 시간 동안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로 숲길을 거닐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걷던 길이 서서히 일반적인 숲으로 바뀌어 가고···.

“와아~!”

세실리의 감탄사를 배경으로 삼아, 해리스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원근감을 무시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지 않고는, 숲의 길을 통해 곧바로 세계수께 향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또 세실리 양은 하이 엘프가 되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니 더더욱 그렇지요.”

세계수에게 향하는 길은 일종의 순례길이었다.

경외심을 가지고, 마음을 추스르며 저 거대한 나무로 향하는 여정 또한 그 과정이라는 것.

‘이렇게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데, 이게 아직 한참 먼 거리였다니···.’

저도 모르게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아직 세계수까지 다다르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듯했지만, 그건 지금 느껴지는 감동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였다.

마침내, 해리스가 에나멜 대륙의 엘븐 킹덤에 상륙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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