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엘븐 킹덤 (2)
“타이타니아의 드워프를 비롯한 에나멜 대륙의 각 종족에게 상황 전파는 끝마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보니 좀 미지근한 반응이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 심상치 않으니 좀 더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멋대로 공간을 넘나들 수 있다는 말은, 언제 불사왕이 에나멜 대륙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말이니 대비를 해야겠지요.”
이곳은 세계수와 직접 맞닿은 유일한 건축물, 엘븐 킹덤의 왕성 회의실이었다.
당연히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이 회의에 참여한 이들의 면면 또한 하나같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여왕을 비롯한 하이 엘프들은 물론, 각 분야를 총괄하며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추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일단 교단에 관련 정보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라포리 님이 알아 오신 정보 외에는 이번 대의 불사왕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으니까요.”
이들은 이번에 발생한 사태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전대 불사왕들은 모두 이온 대륙에서 준동한지라, 엘프를 포함한 이종족들은 파견 보냈던 지원군의 손실 외에는 특별한 피해가 없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바다를 넘기도 전에 쓰러져, 에나멜 대륙 본토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의 불사왕은 처음부터 비범한 모습을 보여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공간의 제약을 무시하고 성지의 대신전에 침입할 수 있다는 말은, 대륙 사이의 바다 따위는 언제든 뛰어넘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라포리가 에나멜 대륙으로 이동하기 전에 그에 대한 정보를 엘븐 킹덤으로 미리 전송한 상태여서, 그들은 빠르게 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주변국에 경고를 전달하고, 경계 정도를 몇 단계 상승시켰으며, 각 지역마다 흑마력을 감지하기 위한 정기 순찰대를 파견했다.
“후우··· 새로운 하이 엘프의 탄생에 축제라도 벌여야 할 상황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협의가 끝나고 대충 숨 돌릴 시간이 마련되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하나둘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물론 세실리가 깨어난 후 수도에서 며칠간의 축제가 계획되어있기는 하지만, 불사왕에 대한 대비 때문에 그 기간과 규모는 상당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전 국가적인 규모의 성대한 행사로 치러질 예정이었으니 그 간극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지금 시기에 세실리 님이 나타나신 건 큰 행운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왕께서도 슬슬 은퇴하실 때가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안 그래도 걱정이 많았는데, 걱정을 한시름 덜었지요.”
부드러운 라포리의 말에 상석에 앉아있던 엘프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엘프 중에서 그들끼리의 협의를 통해 선출되는 왕위의 임기는 은퇴 전까지였던지라, 그녀도 상당히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라포리 님, 이온 대륙에서 적성 있는 이를 또 한 명 데리고 오지 않으셨나요? 개안 의식 때 세계수께 가지를 하사받은 걸로 벌써 소문이 자자합니다.”
“하하,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것이, 세계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게 느껴지더군요.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왕이 해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라포리는 흐뭇하게 웃으며 미소 지었다.
“그 재능도 출중해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성장이 빠릅니다. 저는 그가 자격을 얻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보고 있지요.”
세실리를 구한 직후에 자기 발로 찾아온 또 다른 유망주, 해리스.
라포리는 그를 엘븐 킹덤에 데리고 와 왕국 최고의 교육 시설인 ‘드라샤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그가 최고의 교육을 받고 하이 엘프의 자격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샤피론이랑 좋은 인연이 될 것 같단 말이지. 서로 상황이 비슷하기도 하니.’
원래 하이 엘프는 유전되지 않건만, 그녀는 자신처럼 적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야말로 축복받은 태생이었다.
‘둘이 친해지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지.’
그 때문에 일부러 해리스가 그녀와 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써 놓았다.
그는 그 착한 아이가 해리스를 잘 챙겨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라포리는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외동딸을 떠올리며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
드라샤 아카데미의 점심시간.
바람도 선선하니 좋겠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기대앉아 샌드위치를 씹으며 엘프들의 거리공연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흥, 교양을 좀 갖추시는 게 어때요? 언제까지 용병처럼 천박하게 구실 건지?”
갑자기 다가온 샤피론이 시비를 걸곤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휙 몸을 돌려 도도하게 멀어져 갔다.
‘···설마 저거 한마디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해리스는 느긋하게 나무에 기댄 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그나저나 저 여자가 그 아저씨의 딸이란 말이지···.’
라포리는 하늘색 머리칼과 짙푸른 홍채를 가지고 있었으니, 확실히 그녀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하이 엘프가 되면 ‘그랜우드’라는 성을 사용하게 된다고 했지. 또 엘프는 모계 사회라고 했으니 ‘실베스티’는 엄마 쪽 성이겠네.’
문득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가족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온화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미지 위에 살짝 찡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까탈스러운 아가씨의 모습이 서서히 덧씌워졌다.
‘음··· 그 성격 좋은 아저씨하고 잘 연상이 안 되긴 하는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 거만하고 안하무인인데다 선민의식이 들어찬 귀족 같은 면 때문에 모두가 그녀를 어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그녀를 따르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동등한 친구 관계 같지는 않았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지 뭐. 엘프라고 다를 건 없나 보군. 근데 유독 나한테 예민하게 군단 말이야.’
요 며칠 살펴본 바로는 그녀는 주변에 벽을 치고 고고하게 내려다볼 뿐, 딱히 누군가에게 먼저 시비를 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리스 자신만 제외하면.
‘그래봤자 어린애처럼 틱틱대는 정도지만. 괜히 얽히면 귀찮아질 테니 무시하자. 지금은 그 아저씨가 내 후원자이기도 하니까.’
거기다 선물로 받은 세계수의 가지를 가공하는 것도 라포리에게 부탁한 상황이었으니, 괜히 저 아가씨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아··· 날씨 좋다···.”
화창한 날씨와 시원한 나무 그늘, 선선한 바람.
해리스는 나른함에 젖어, 가만히 눈을 감고 멀리서 들려오는 엘프들의 노랫소리를 감상했다.
사실, 최근 들어 매사가 귀찮아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세계수의 영향권에 들고 「자연 친화」를 얻은 후,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수련해 나갈수록 해리스의 육체는 점점 편안함에 물들어갔다.
‘언제든 강제로 몸을 움직일 수 있긴 한데, 그냥 이렇게 두는 게 친화력 상승에 더 유리한 것 같단 말이지. 뭔가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일까.
해리스는 온몸으로 물아일체를 표현하며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힐링 되는 기분이네.”
이미 샤피론 실베스티에 대한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따로 엮일 일도 없고, 지금처럼 거리만 유지하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은 없을 테니.
***
‘그렇게 생각했는데.’
해리스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샤피론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마주하게 된 건 드라샤 아카데미의 정령술 교육 때문이었다.
‘어어’ 하는 순간, 교수가 작정한 듯 그들을 같은 조로 묶어버린 것이다.
“자, 모두 조가 갖춰졌군요. 그럼 편입생도 있으니 복습도 할 겸 다시 되짚어 볼까요? 이미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정령과의 교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심화 과정으로 들어가면···.”
대자연의 존재인 정령과의 교감은 정령사에게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엘프들에게는 그와 관련해 매우 효과적인 비법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춤과 노래였다.
‘어쩐지 엘븐 킹덤에 오고 나서 길거리 곳곳에서 공연하는 이들이 많이 보이더라니.’
존재 자체가 자연의 사랑을 받는 엘프들은 그 몸짓 하나하나와 목소리의 울림만으로도 정령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이 직접 연주하는 악기 소리도 마찬가지.
그야말로 다른 종족의 정령사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엘프만이 가지는 특혜이자 비의였다.
“또 이 방법은 과도하게 자연에 몰입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해 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뭐, 보통은 몰입한다고 해도 조금 게을러지는 정도겠지만, 그래도 성실한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계속되는 교수의 강의에 해리스는 그것이 남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자신의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닌가.
‘근데 나는 조금 게을러진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지금도 정신을 할애해서 강제로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 잠시만 신경을 끄면 곧바로 그 자리에서 축축 늘어져 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극한의 평온 상태에 빠지며 마음에 평온이 찾아와, 스트레스를 푸는 데 제법 도움이 되긴 했지만···.
‘확실히 조금 거슬리던 참이긴 했지. 그게 과한 몰입의 부작용이었구나.’
자연력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수의 곁인 데다가, 해리스가 가진 「세계수의 아이」, 「정령술」, 「자연 친화」 모두 친화력에 관여하는 스킬들이었다.
거기에 라포리에게 받은 하이 엘프의 팔찌도 있었고.
덕분에 최근에 번개의 정령 ‘와트’가 하급이 되었고, 며칠 전에 계약한 불의 정령 ‘칼리’ 와 바람의 정령 ‘파스칼’ 또한 진화 직전이었다.
정령술을 배운 기간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마침 얼마 후에 새로운 하이 엘프 세실리 님을 위한 축제가 열리죠? 그날 수도 곳곳에 무대가 마련될 텐데···.”
교수가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학생들을 둘러보고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들을 위해 드라샤 아카데미만의 무대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제법 중심부에 있는지라 어쩌면 세실리 님께서 직접 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순간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자, 그럼 조끼리 힘을 합쳐 자기들만의 무대를 꾸며보도록 하세요. 정령과 얼마나 교감을 끌어낼 수 있는지는 당일 무대를 보고 평가하겠습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같은 조원들끼리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해리스의 조에는 샤피론을 제외하고 두 명의 엘프가 더 있었다.
“와! 샤피론 양이랑 해리스 군과 같은 조라니! 유명인들이랑 함께하게 되다니 행운이네. 난 티메르 코핀이야. 잘 부탁해!”
“······.”
왠지 눈치 없어 보이는 인상의 활기찬 남성과, 눈치만 살피며 조심스레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심한 여성이 그들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레 조별 활동을 하게 돼서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폐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해리스는 그들을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조별 과제의 악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본 적이 있었건만, 정작 자신이 그 구멍이 될 판이었으니···.
실전 무대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으니, 편입생이라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그에게는 상당히 막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심란한 것은 그와 같은 조가 된 샤피론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어째서··· 날 이런 근본도 없는 용병 출신이랑··· 왜지? 어째서?”
미간을 찌푸리고 연신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 깊게 심호흡했다.
“후우···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당신, 할 수 있는 춤이나 노래는 있나요? 뭐 하나라도 좋아요.”
당연히 없을 테니 예의상 물어본다는 말투.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아무런 기대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긴 정령술 자체를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그간 용병 일을 하다 왔다고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조원들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했다.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들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아무것도 없나요? 나머진 저희가 맞춰드릴 수 있어요.”
‘···이렇게 대놓고 꼽을 주니 오히려 오기가 생기는데.’
당연히 그들의 춤과 노래는 배운 게 없으니 당장 하는 건 무리였다.
길거리에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것들도 전부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굳이 엘프들의 전통 가무일 필요가 있나?’
애초에 이건 어떠한 정해진 의식이 아니라 종족 특성을 이용한 감응이었다.
그럼 정령들과 조화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장르는 크게 상관없지 않은가?
“흠··· 제 고향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기는 한데···.”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래 봬도 학창 시절 기타 좀 치면서, 노래 제법 한다는 평을 들었던 전적이 있었다.
‘거기에 엘프인 해리스의 음색이 더해지면?’
무엇보다, 그는 노래방 기계에서 단 한 번도 80점 밑으로 받아 본 적이 없는 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