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성검의 시련 (1)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하인리히는 안내하는 대주교를 따라 피카올 대신전의 깊은 곳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설계부터 성검이 꽂힌 봉인지를 중심으로 삼은 만큼, 그곳이 가장 깊고 내밀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하로도 제법 내려온 것 같은데. 싸울 때 얼마나 크레이터가 파였으면···.’
하긴 당대 최강자들의 목숨을 건 사투였을 테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오셨겠지만, 시련은 도전하는 이마다 달라서 딱히 조언을 드릴 게 없습니다.”
여러 관문을 거쳐 빛나는 기도문이 새겨진 석문 앞에 도달했을 때, 그를 안내하던 대주교가 나직이 말했다.
알고 있던 사실인지라 하인리히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는 이미 훈련 기간 동안 관련 기록을 전부 숙지해 둔 상태였다.
“그런 만큼 시련에 임하는 시간도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는 몇 시간 만에 나오기도 했고, 어떤 이는 일주일가량이 걸리기도 했지요.”
물론 전부 실패했지만요.
어깨를 으쓱이며 첨언한 그는 하인리히를 향해 돌아보며 문을 가리켰다.
“이 문을 넘어서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련은 시작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도전할 준비가 되면 말해주시면 됩니다.”
여기까지 와서 더 뜸 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인리히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당당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대주교는 이내 석문으로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기도를 읊었다.
“······그 상자에 감춰진 것은 나의 살이요, 피이니. 너희는 그것을······.”
그러자 문에 새겨진 기도문이 그의 말에 반응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봉인된 문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는 대주교의 신성력.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그의 얼굴에선 굵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을 한 번 열 때마다 대주교급 사제가 며칠은 앓아누울 정도의 신성력이 필요하다니···.’
양뿐만 아니라 격도 따지기에 다수의 사제들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인리히야 대신전에 상주하며 가끔 마주치기에 익숙하다지만, 사실 대주교는 굉장한 고급인력이었다.
주로 대도시에 위치한 신전을 책임지면서, 귀족으로 치면 후작급 대우를 받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성녀는 제국의 황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이었지.’
교단의 본거지인 대신전에서 그런 그녀와 어울리다 보니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화아악—
그렇게 그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던 순간, 석문이 강한 빛을 뿜으며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무겁게 열리는 석문.
하지만 그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차 있어 안쪽을 식별할 수 없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대주교의 지친 목소리를 뒤로하고, 하인리히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가 빛 속으로 완전히 들어섰을 때.
드득— 쾅!
거칠게 석문이 닫히고.
하인리히의 주변의 빛이 일시에 사라져, 평범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공간은, 외부와는 단절된 별개의 공간이라는 것을.
뒤를 돌아보았으나 앞과 똑같은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을 뿐, 그가 들어왔던 석문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앞으로 갈지 뒤로 갈지 선택하란 건가?’
하인리히는 어깨를 으쓱이고 신성력과 「축복 : 강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눈에 집중했다.
추가로 「아우테리카 성법」까지 사용해 시력을 증폭시키자···.
“···그래도 끝이 안 보이는군.”
뒤를 봐도 마찬가지, 결국 무작정 가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일단 무조건 정면으로 돌파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약간의 편의는 이용해도 되겠지.’
신성력을 집중해 볼 수 있는 한계까지 시야를 넓히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바로.
파앗—
「축복 : 도약」을 사용해 공간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도착한 곳에서도 여전히 끝도 없이 늘어진 긴 복도만 보일 뿐,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후웁!”
콰아앙!
신성력을 한계까지 담아 전력으로 옆의 벽면을 후려쳐 보기도 했지만, 역시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때.
<제한 시간 내에 다음 관문까지 도달하라.>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의지가 울려 퍼졌다.
‘이제 시작이군.’
하지만 기다려 봐도 더 이상의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
제한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도착점이 어디까지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인내의 시련 같은 건가?’
이곳의 시간 흐름이 바깥과는 다르다는 건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곧바로 파악하기엔 무리였겠지만, 그는 바깥에도 아바타가 여럿 있는 몸이 아닌가.
‘대략 10대1 정도? 지구와의 시차는 100대1이군.’
그동안 「마인드 허브」와 정신력이 강해졌기에 별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지, 이세계 초반이었으면 멀미로 상당히 고생했을 수준이었다.
‘언제,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게 부담이네. 결국 무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성검의 시련은 보통 몇 개의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아마 이번에는 도전자의 끈기와 정신력, 체력 등을 확인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는 상황에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인리히는 그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곧바로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간 단련해 온 압도적인 피지컬과 「초회복」을 비롯한 갖가지 스킬들의 도움을 받아, 어마어마한 속도로 복도를 주파했다.
‘시련이 원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최대한 나아가 보자.’
이 시련의 공간에서는 영양 공급과 수면도 필요하지 않으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정신력의 리소스를 오직 달리면서, 주기적으로 「축복 : 도약」을 사용할 정도만 할애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한데. 어쩔 수 없지.’
하인리히는 적막한 복도를 홀로 묵묵히 달려 나갔다.
그저 기계적으로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가 「축복 : 도약」을 사용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슬슬 육체에 쌓이는 피로가 「초회복」으로 회복되는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필요한 에너지는 주변의 기운이 공급해 주고 있었지만, 지속해서 쌓이는 부하를 회복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1주일째.
중간에 잠깐씩 속도를 늦추며 몸을 회복시키는 것도 한계에 달했다.
슬슬 전신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져졌지만, 훈련할 때 이 정도는 일상이었으니 개의치 않았다.
2주일째.
역시 시련이라서인지 단순히 이동하는 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달리는 와중 정신을 자극하는 속삭임이 그를 자극했다.
포기, 체념, 외로움 등을 자극하는 기운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침범했으나, 이미 무념무상에 빠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방해일 뿐이었다.
3주일째.
여전히 시간이 얼마나 남았으며, 어디까지 더 가야하는지 알 수 없어 페이스를 늦출 수 없었다.
주기적으로 간단한 휴식만 취하고,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며 다시 내달리기를 반복했다.
「마인드 허브」가 있는 그에게 이건 시련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반복 작업일 뿐.
이런 조건이라면··· 그는 며칠이건, 몇 달이건,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고, 또 흘렀다.
그렇게 바깥 시간으로는 4일, 내부의 시간으로는 약 40일이 지났을 때···.
하인리히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
“내일이군.”
“크흐흣··· 그렇군. 내일이야말로 나와 이 대륙이 함께 파멸하는 날이로군. 파핫!”
대륙 남부의 한 지하 은신처에서, 커다란 체구의 사내와 왜소한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식을 시작하면 더는 교단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거다. 기회는 오직 한 번. 놈들이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아아— 알아, 알고 있다고. 걱정하지 마라. 절대 실패할 일 없으니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왔는데?”
맥없이 실실 웃는 노인의 눈에는 이미 광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내는 그런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을 띠었다.
한때 대륙 최고의 기재라고 불렸으며, 마탑 연맹에서도 승승장구해 차기 맹주 자리까지 확실시되었던 대마법사가 이렇게까지 몰락하다니···.
‘뭐, 이쪽에는 좋은 일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대체 그에게 어떤 억울한 사연이 있기에, 얼마나 원통하기에 세상을 부수려고까지 하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뜻이 부합하기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일 뿐.
어차피 자신들과 함께하는 이 중에 제정신인 인간은 한 명도 없기도 했다.
‘프흣··· 정상적인 사고를 지녔으면 이런 일을 벌일 리도 없지.’
그는 온갖 기괴한 술법이 가득 새겨진 내부를 한 번 둘러보고 밖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
정신을 빼놓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던 하인리히 쪽에서 뭔가 변화가 감지되었다.
‘···저건?’
서서히 돌아오는 정신 속에서, 끝없이 펼쳐져 있던 복도의 저편에 앞을 가로막은 ‘끝’이 보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달려 나간 그는 마침내 복도의 끝자락에서 평범한 나무 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가 도착점인가? 얼마나 걸렸지?”
나흘이 조금 넘었으니까··· 이곳 시간으로는 한 달이 훌쩍 넘게 달리기만 한 셈이었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진 않네. 하긴 이 공간의 특성 덕을 봤다고는 하지만, 좀 무리하긴 했지.’
사실 그 표현도 많이 순화한 것이었다.
「마인드 허브」로 고통이 걸러지지 않았으면 절대 이렇게 태평하게 감상을 내놓진 못했을 터.
스킬들과 신성력으로 강화된 괴물 같은 육신이 너덜너덜하게 손상될 정도였으니, 그간 얼마나 무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초회복」으로도 며칠은 푹 쉬어야 완전히 회복될 것 같은데.’
계속 시련을 진행하기에는 무리인 상태였지만, 사전에 여러 정보를 접한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인리히가 당당하게 다음 관문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화아악—
주변의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외부에서 주입되는 에너지의 힘으로, 한 달간 계속해서 혹사당했던 신체가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으음···.”
근육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며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육체의 과부하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초회복」이 주변의 기운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격렬하게 반응했고.
거기에 「축복 : 강체」까지 더해져 그의 몸을 전보다 더 강하고, 질기고, 튼튼하게 재구성했다.
“하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그의 육체는 시련에 도전하기 전보다 한 차원 더 진보해 있었다.
<첫 번째 시련 종료. 관문을 통해 다음 단계로 이동하라.>
다시 머릿속에 의지가 들려왔지만, 하인리히는 가만히 자신을 관조하며 몸 상태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이거 괜찮은데?’
생각해 보니 이곳은 단련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강화에만 매진할 수 있는 기적 같은 공간.
그는 그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고뇌에 빠졌다.
‘어차피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다른데, 굳이 바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을까?’
시련을 달성하며 시간제한도 사라진 데다, 이곳에서 하루만 수련해도 바깥에서 열흘 이상 한 효과가 있었다.
성검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잠깐의 시간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그래, 딱 하루만 더.’
수련 중독자 하인리히는 그대로 뒤돌아 문을 등지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토끼뜀을 하며 빠르게 복도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동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후우··· 후우···, 어?”
한창 수련에 몰두하다가, 가는 방향 끝에 조금 전에 마주했던 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또다시 문 앞에 도달한 하인리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살펴봤다.
틀림없이 반대편 방향에서 마주했던 문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뭐, 알 것 같긴 하지만.’
애초에 시련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으니, 공간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고 해도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돌아섰다가···.
“······!”
갑작스레 코앞에 나타난 갈색 문을 보고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황급히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어느새 긴 복도는 온데간데없고 앞도 뒤도 같은 문으로 틀어 막힌 상황이었다.
‘그만 시간 끌고 빨리 다음 시련으로 넘어오라는 뜻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더 수련할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맨손 운동을 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시련을 주관하는 의지에게 더 밉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엔 그에게 딱 맞는 고중량 운동기구도 없었으니까.
하인리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눈앞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시련에 들어섰을 때처럼, 그의 전신을 감싼 환한 빛이 사라졌을 때···.
그는 거대한 예배당의 한가운데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