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95화 (95/284)

#95

심연이 열리고 (2)

바닥의 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그 존재는 전신에서 검은 불꽃과 같은 흑마력을 뿜어대며, 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듯한 위압적인 존재감을 퍼뜨리고 있었다.

[오오! 훌륭하다! 아주 멋지구나! 크하하핫—!]

그 압도적인 위용에 감탄한 한스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검을 불꽃을 몸에 두른 해골 용이라니, 그야말로 네크로맨서의 로망이 아닌가?

[크으으——?]

그때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몸을 뒤틀며 구멍을 빠져나오기에 바쁘던 본 드래곤이 고개를 돌려 한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두 쌍의 안광이 뜨겁게 마주쳤다.

그렇게 놈과 눈빛을 교환하던 한스가 목소리에 흑마력을 담아 나직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엔트라시오—]

우웅—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그의 부름이 의지를 담고 퍼져나갔고···.

그 기묘한 울림을 담은 파동은 그대로 본 드래곤 엔트라시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맹약에 따라, 불사왕의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연결이 놈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계약이, 이 자리에서 새롭게 덧씌워졌다.

[크워어——!]

공간을 진동시키는 포효와 함께 본 드래곤이 보랏빛 안광을 번뜩였다.

스스로를 봉인해야 했던 오랜 기다림에서 깨어나, 비로소 맞이하게 된 새로운 주인을 환영하는 환희의 표현이었다.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 생긴 것 같군. 잘 보니 나름 귀여울지도?’

매끈하고 윤기 있는 뼈다귀와 넓은 가동 범위를 가진 관절, 예쁜 보랏빛의 안광까지.

비뚤어진 한스의 감성 탓인지 그 거대하고 흉악한 뼈다귀가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흡족한 마음에 놈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바라보던 순간.

‘이건?’

또다시 새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크르르르——!]

그리고 조금 후에는 엔트라시오도 그와 같은 기운을 느꼈는지, 한쪽을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스에게 굉장히 자극적이면서도, 또한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었다.

[주신교단인가.]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 신성력.

다수의 팔라딘과 대주교까지 포함된 교단의 최정예가 이런 오지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그들이 이 정도 규모의 의식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으니,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당장 그들과 부딪치기에는 시기가 좋지 못했다.

교단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좀 더 극적인 순간이어야 했으며, 지금은 워낙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한 터라 시나리오를 조금 손볼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잘만 살리면 좋은 상황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갑작스레 이상이 관측되고, 천 년 만에 심연이 열렸다.

대륙을 위한다는 사명감에 의식이 시작된 곳으로 급파된 주신교단의 일원들이었으나.

그때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이려는 사악한 불사왕이었으니!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립.

일촉즉발로 흘러가는 대륙의 상황, 차근차근 조여 오는 어둠의 위협!

이 거대한 위기 속에서 세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음··· 예고편으론 딱 좋을 것 같군. 상황도 좋고, 연출도 좋아.’

한스는 고개를 돌려 심연에서 완전히 몸을 빼낸 본 드래곤 쪽을 바라보았다.

놈이 빠져나온 영향인지 심연의 크기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 구멍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녀석은 더 없는 건가? 이 녀석이 어지간히 부담됐나 보군.’

사실 가장 큰 원인은 역천의 서약이 심연에서 꺼낸 ‘광기’일 것이다.

그것이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부스러질 정도였으면, 심연의 문에 가해진 부하도 만만치 않았을 터.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본 드래곤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하리라.

[엔트라시오.]

[크르르——?]

그의 부름에 신성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리던 본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스는 허공에서 가볍게 몸을 움직여 그 거대한 두개골의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옆에 자리한 드래곤의 뿔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간 답답했을 텐데 고생 많았다. 이제 마음껏 날아보려무나. 저들에게 네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거다.]

한스의 말에 엔트라시오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관측할 수 없는 경계의 시간 속에서 사고를 이어갈 수도 없어 그저 멍하니 부유하며 보냈던 시간이 떠오르자, 갑자기 터질 듯한 욕망이 솟구쳤다.

[크아아아——!]

펄럭—! 펄럭—!

흑마력이 가득 담긴 포효와 함께 시작된 날갯짓에 주변에 광풍이 몰아쳤다.

언데드가 되며 너덜너덜해진 날개였지만, 그것이 한번 펄럭거려질 때마다 주변의 흑마력이 스스로 움직이며 ‘비행’의 신비를 엮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본 드래곤의 거체가 천장에 난 구멍을 더 크게 무너뜨리며, 슬슬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로 솟구쳤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하늘과 지평선,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과 눈 아래에 광활하게 펼쳐진 황무지.

‘···이건 또 이것대로 색다른 기분이네.’

하늘이야 언제든 혼자 날 수 있지만, 뼈밖에 없는 용의 머리 위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다.

[크워어어——!]

그도 그럴게, 이건 아무리 봐도 마왕 그 자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강림한 마왕의 모습을···.

아래에 모여든 주신교단의 일원들이 저마다 긴장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

‘축지’의 축복으로 빠르게 몇 시간 만에 황무지를 가로질러 의식의 장소에 도착한 교단의 성직자들.

그들이 처음 들은 것은···.

[크워어어어——!]

막대한 흑마력이 담긴 포효 소리였다.

“이 소리는···?”

“아무래도 놈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전투를 준비하도록 하죠.”

계속된 강행군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그들은 주신교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능력자들이었다.

계속해서 축지를 사용하느라 탈진한 이를 제외한 모두가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순식간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그렇게 그들이 조심스럽게 의식의 현장으로 접근하던 찰나···.

콰아앙—!

한 언덕의 윗부분이 터져나가며 시커먼 무언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거체와 어울리지 않는 빠른 비행으로 순식간에 높이 솟구친 그것은—.

[크워어어——!]

전신에서 검은 불꽃과도 같은 흑마력을 뿜어대며 재차 포효를 내질렀다.

“···본 드래곤.”

“문헌으로만 보던 마물이었는데···.”

그 압도적인 위용에 경계의 표정을 짓는 성직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진짜 긴장해야 할 상대는 따로 있었다.

거대한 본 드래곤의 두개골 위에 올라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존재.

대륙의 재앙이자 죽음의 화신, 재림한 공포—.

“불사왕, 한스···!”

그가 오연하게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크흐흣— 이거, 교단의 하수인들이 아닌가? 이 먼 곳까진 무슨 일로 왔지?]

높은 하늘에 있음에도 그의 음성은 그들의 귓가에 선명하게 꽂혀 들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소리였지만, 이 자리에는 그 정도로 흔들릴 약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섭리를 거스르고 타락한 흑마법사, 한스! 네놈의 목을 쳐주마!”

무기를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서는 팔라딘과 성기사들의 뒤로 자연스럽게 물러난 사제들이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라티우스 대주교는 성법을 사용해 지금 상황을 은밀하게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전송했다.

재차 등장한 불사왕과 마주친 이상 그들의 안위가 불투명해졌으니, 만약의 사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정보를 남기는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끝난 후, 라티우스 대주교가 목소리에 신성력을 담아 한스에게 외쳤다.

“불사왕이여! 우리는 이곳에서 심연이 열렸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호오— 그래서?]

“그리고 그것 때문에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제물 의식이 벌어졌지. 이 의식 하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이다. 또한, 심연의 영향으로 앞으로 대륙에 다가올 피해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대주교가 분노를 눌러 담은 목소리로 씹어뱉듯이 말하며, 형형히 빛나는 두 눈으로 한스를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소행이렷다?”

확신에 물든 굳은 표정으로 말을 마치는 대주교.

그저 일행의 사명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 정말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불사왕은 이 대륙을 죽음으로 뒤덮으려던 자가 아닌가?

하지만 한스는 그의 물음에 성실히 답해 주었다.

[크흐흣— 그거야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군! 세상에 나 말고 누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크하하핫!]

시원하게 인정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을 필요도 없다.’는 대답이 아니었고, ‘나 말고 누가 할 수 있겠느냐?’는 말 그대로의 질문이었으니까.

‘사실 나도 궁금해.’

그도 역천의 서약에서 일을 벌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 진짜로 누가 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까 의식 장소에 새겨졌던 술식들을 보면, 보통 천재가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이지.’

그 흔적만 봐도 오랜 연구와 깨달음이 뒷받침되어 지고한 경지에 오른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천의 서약을 추적하면서 그자에 대해서도 확실히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으리라.

그 정도 실력이면 사천왕의 일좌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테니!

한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교단 측의 반응은 좀 더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역시 저놈이···!”

“진정하시지요. 예상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무기를 치켜드는 성기사들과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기도문을 읊는 사제들.

그들은 필사의 각오로 전투를 준비했다.

지금 불사왕과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이 황무지에서 그에게 도망칠 수 있을 리도 없고, 애초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믿음은 목숨의 위기 속에서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점차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 속.

[아아— 다들 진정하지. 지금 싸울 생각은 없다. 오늘은 그저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릴 겸, 경고나 해줄 셈이었으니.]

“뭐···? 무슨 개수작이냐!”

그들의 과열된 반응에 엔트라시오의 머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내 심장에 구멍을 뚫었던 성기사··· 하인리히 랜드가드는 잘 지내고 있나?]

“랜드가드 경?”

지금 싸움이 벌어지면 곤란했던 그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불사왕 한스의 대적자 하인리히에게로.

‘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은근슬쩍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되새겨 주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이들도 하나같이 교단의 고위층이었으니 나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놈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상당히 고생해서 말이지. 그 보답으로 이렇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는데, 정작 당사자가 오지 않으니 아쉽군.]

자연스럽게 하인리히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고, 그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잔뜩 생색냈다.

남이 깔아준 판 위에서.

‘그보다 이제 슬슬 끝내야 해야겠는데.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확 박힐 인상을 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 그게 좋겠군.’

명색이 불사왕이었으니, 마무리는 항상 강렬하게 해서 깊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놈의 얼굴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하인리히 랜드가드에게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지난번과 같은 요행은 없을 것이라고 전해라.]

한스는 말을 이으며 심령이 연결된 본 드래곤에게 명령해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날아올랐다.

“어딜 가는 거냐, 불사왕···!”

[크흐흣··· 기존의 질서는 파괴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니, 명심하라 교단의 개들아.]

동 터오는 여명을 뒤덮듯,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하늘을 뒤덮었다.

[나, 한니발 스트라우스야말로— 이 대륙의 종말이다!]

그렇게 슬쩍 멋진 이름을 홍보하며 이 뜻밖의 만남을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

[이대로 가긴 아쉬우니 마지막으로 선물 하나 해 주지.]

고도를 높이던 본 드래곤, 엔트라시오의 타락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한순간에 그 입가로 밀집했다.

후우웅—

본 드래곤이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데스 브레스였다.

“브레스! 피할 수 없다! 대비해!”

“······성현께서 가로되, 이 선을 넘어서는 어떠한 위해도······.”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동과 함께 입가에 모인 흑마력이 뭉치고, 뭉치고, 뭉치길 반복한 끝에···.

그것은 마침내, 파멸의 형상을 갖추었다.

[쿠오오——!]

푸화아악—!

본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어마어마한 죽음의 기운이 광범위한 대지를 휩쓸었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압력에 발생한 지진과, 땅거죽이 뒤집히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파편.

그 불꽃처럼도, 액체처럼도, 연기처럼도 보이는 검은 기류에 담긴 독성은 안 그래도 황폐했던 황무지를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작별 인사라기엔 과한 공격이었지만, 이 정도는 정말로 가벼운 인사에 불과했다.

‘애초에 저 정도 실력자들이 저렇게 뭉쳐있는데, 겨우 이 공격 한 방에 죽을 리가 없지.’

그저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벌인 가벼운 퍼포먼스였다.

‘후후후··· 역시, 본 드래곤은 멋있어.’

약간의 사심이 담기긴 했지만.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