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97화 (97/284)

#97

변화의 시작 (1)

어느 인적 없는 산 깊은 곳.

푸화악—!

그곳에서 흙바닥을 헤치고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최초로 나온 하나의 뒤를 이어, 둘 셋··· 그 수가 계속해서 증가했다.

[끄르륵—]

그렇게 끊임없이 지상으로 기어 나오는 수많은 언데드들의 모습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들이 나온 곳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땅속에 파묻혀 버렸던 한 심연의 상흔.

심연이 열린 영향으로 경계가 흐릿해지자, 그곳에 표류하던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끼기기익—

달그락!

거기다 그 무리엔 좀비나 스켈레톤 따위의 하급 언데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못해도 스켈레톤 나이트 이상의 정예 언데드 군세가 백이 넘어서고 나서,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자기들끼리 대열을 갖췄다.

평범한 언데드가 아닌, 지성이 있는 움직임.

사방으로 죽음의 기운을 흩뿌리는 불사의 군세가 마침내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이동한다···.]

그 군세를 이끄는 이는 화려한 갑주를 입은 채 머리를 옆구리에 낀 기사, 듀라한 나이트였다.

덜그럭 덜그럭!

사박사박—

명백한 이상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

상황이 급변하며 정세가 빠르게 변화했다.

대륙 곳곳에서 거행된 제물 의식과, 그로 인해 열린 심연, 또 그것과 연계되어 부활한 불사의 군대.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대륙의 재앙, 불사왕까지.

그렇게 실질적인 위협이 다가오고서야, 그간 교단의 경고에도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던 이들이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는 초기부터 철저하게 대비를 갖춘 이들도 제법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 탈리아 왕국이었다.

“상황은 어떻지?”

“전 대륙이 비상 상황입니다. 이미 아문 상태인 심연의 상흔은 감지하기도 힘든지라, 언제 어디서 언데드들이 나올지 모르니 신경이 한껏 곤두선 분위기입니다.”

하인즈 2세의 물음에 뮬로 브로코슬락이 공손히 답했다.

이런 사태는 300년 전 불사왕이 발호할 때도 없었던 지라 모두의 대비가 미흡했다.

전대 불사왕들이 거듭 심연의 문을 두들긴 여파가 이제야 이렇게 터진 것이다.

“다행히 저희 탈리아 왕국을 비롯해 주변국들은 큰 피해가 없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대 불사왕에게 선물을 받은 덕에 불사의 군대를 감지할 수 있게 된 한스가, 근방에서 놈들이 나오는 족족 수습해 음차원 공간에 수납하고 있었으니.

‘아직 그 감지 범위가 그리 넓진 않지만,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순찰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니 서부 지역은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거야.’

그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군대를 불러낼 수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지금은 경계가 너무 약해져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라도 최대한 수습하는 수밖에.

사실 상흔이 가장 많이 생긴 지역이 대륙 서부 지역이었으니, 그것만 해도 상당히 선방한 것이었다.

“툴크 왕국의 타라크에 있는 휴버트 상회와 연계하는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접촉을 완료했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음지에서 조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쪽에서 원하는 게 있으면 최대한 들어줘라. 휴버트와는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상황이다. 그쪽에서도 우리를 전폭적으로 도울 테니, 툴크 왕국에서 세를 불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지.”

양지의 휴버트 상회와 음지의 브로코슬락 클랜은 썩 궁합이 잘 맞는 관계였다.

서로 간의 시너지를 통해 상생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되리라.

“하지만 그래봐야 인간입니다. 거기다 일개 장사치를 믿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인데, 차라리 그도 저희 클랜으로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휴버트는 괜찮다. 절대 배신할 일 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아! 역시 따로 수를 써 두셨군요.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뮬로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둘 다 자신의 세력이었으니, 이제 아랫사람만 잘 단속하면 다른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이렇게 잘 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상태였으니까.

“···광기에 대한 영향은 아직 보고된 바 없나?”

하인즈는 지금도 주변에 느껴지는 흐릿한 광기의 기운을 느끼며 뮬로에게 물었다.

심연이 열리고 광기가 빠져나온 지 며칠이나 지났건만, 전 대륙에 퍼져 희석된 이 기운은 아직까지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무리 불완전하게 현현했다고 해도, 심연에서 나온 것이 이렇게 얌전할 리 없어. 분명 뭔가 이상이 있을 터.’

“아직 기간이 짧아 확실하진 않지만, ‘광기’의 영향인지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이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정확한 통계를 구하기 위해선 앞으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륙 전체에 퍼지며 농도가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무의식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면밀히 검토하도록.”

“네. 그리고, 이것도 확신을 얻기 위해선 좀 더 조사해 봐야 합니다만···.”

뮬로가 하인즈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

성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다.

주신교단의 무력을 대표하는 이들로는 성전사와 성기사, 그리고 그 정점인 팔라딘 등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인간들이 정한 체계일 뿐.

주신이 자신의 의지를 대리할 이로 선택한 성녀처럼, 성검의 주인은 주신의 첫 번째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어떤 이라도 성검의 주인이 된다면 그 대우가 극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하인리히처럼.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가장 커다란 대예배당.

그곳에는 지금 두 명의 추기경과 대주교, 팔라딘들을 비롯한 교단의 최고위층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도 이곳에 참석했는데, 지금이 한창 바쁜 시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 자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이곳은 바로 새로운 성검의 주인.

하인리히의 팔라딘 서임식이 열리는 곳이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네.’

성기사로 서임 받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팔라딘이라니.

거기다 이번 예식은 성녀 본인이 직접 주관하는, 다른 팔라딘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호사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

대륙의 위기 상황에서, 무려 3백 년 만에 탄생한 성검의 주인이었으니까.

이윽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하인리히 혼자만을 위한 예식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주신을 향한 기도문 낭독과 제례, 그 외의 상징적인 절차가 지나고···.

마침내.

단상에 선 성녀의 앞,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리히가 손바닥의 성흔에서 성검을 뽑았다.

우우웅—

등장과 동시에 검신을 떨어대며 그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수려한 은빛의 성검.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 배석한 이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심지어 이 자리의 팔라딘 중에는 성검의 시련에 도전했던 이들도 있는 만큼, 그들이 느끼는 감회는 생각 이상이었다.

“저것이··· 성검.”

“과연, 대단하군. 검일 뿐인데 내재된 신성력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야.”

그 상황에서 태연한 이는 하인리히와 성녀 둘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성검에 신경 팔린 사이에도 예식은 자연스럽게 계속 진행되어···.

“······약자를 지키고 악을 단죄하는 검이 될지니, 이에 하인리히 랜드가드를 주신교단의 팔라딘으로 임명한다.”

경건한 공기 속에서 서임식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예전 생각나는군.’

지금이 규모가 훨씬 크다지만, 성기사가 되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부서지는 아름다운 햇빛, 엄숙한 대예배당이 풍기는 자애로운 분위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목에 팔라딘을 뜻하는 성표를 걸어주는 성녀까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신성한 한 장면이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대축복 : 빛의 기사」를 획득합니다.》

그래, 지금 이 타이밍에 떠오른 시스템창 또한 그때와 똑같았다.

‘···어라? 진짜?’

한 박자 늦게 당황한 하인리히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뿜어진 엄청난 신성력.

지금까지 받았던 축복들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좀 더 짙고, 무거우며, 강렬한 무언가가 몸속을 채웠다.

막대한 신성력이 전신을 휘돌며 몸에 정착했던 성검의 기운과 서서히 합쳐졌다.

머리가 트인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이 고양되고, 주신과의 연결이 한층 더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큭···.’

하인리히는 그 격렬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으로 「마인드 허브」를 발동하며 이를 악물었다.

잠깐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정신이 휘말려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우주가 펼쳐졌다.

화아악—

한편, 성검을 쥔 채 찬란한 빛에 휩싸인 하인리히를 본 모두의 마음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아! 대축복이라니!”

“오오—! 주신의 은총이 함께하는구나!”

그리고 하인리히의 성기사 서임식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판이 커져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주신께서 이곳을 눈여겨보시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기도가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창 현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도중.

‘아···.’

빛에 휩싸여 멍하니 있던 하인리히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의 마음에 펼쳐졌던 우주 속에서 이번엔 좀 더 선명하게 주신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여전히 ‘흥미’가 전부였지만.

‘아니, 의지가 너무 커다랗다 보니 뭘 알 수가 없네.’

진드기에서 개미로 진화했다고 해도 인간의 발치 아래에서 보이는 거라곤 발가락뿐이다.

애초에 격이 다르다 보니 어떻게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축복 같은 걸 내려줄 정도면, 지금까지 그의 행보가 제법 마음에 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될 터였다.

‘후원자께서 만족하신다면야 그걸로 좋은 일이겠지.’

<개체 정보>

-개체명 : 하인리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신성한 세례」, 「대축복 : 빛의 기사」, 「축복 : 강체」, 「축복 : 도약」, 「축복 : 광검」, 「축복 : 증량」, 「축복 : 성검」, 「로지아 성투법」, 「무골」, 「아우테리카 성법」

-특이 사항 : 신성력의 상한이 사라져, 의지가 허락하는 한 끊임없이 성장한다. 신성력의 격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성검과 연결된 기운이 육체에 안착해 신체 능력이 재차 강화되었다. 전대 용사들의 기억을 계승 받아 전투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개체 정보창.

점점 불사왕 한스··· 아니, 한니발 스트라우스의 대적자다운 존재로 성장하고 있었다.

‘어?’

그렇게 흡족하게 개체 정보를 확인하던 찰나.

하인리히는 눈가에 살랑거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고 뭔가가 더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백발?’

아니, 신성력을 과하게 받아들이며 하얗게 세긴 했으나, 윤기가 흐르고 묘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단순히 백발이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성녀의 은발과 같은 느낌의···.

‘아, 설마?’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는 아직도 손에 들고 있던 성검의 날로 서둘러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머리를 뒤덮은 은백색 물결.

그리고.

‘···금빛 눈동자.’

거기에 얼굴형도 묘하게 바뀌었다.

그동안 본체와도 큰 차이가 없던 외모였는데, 온갖 요소들이 조율되고 균형이 잡히며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할 만한 인상이 된 것이다.

‘아니, 내 원래 얼굴도 절대 못생긴 건 아닌데!’

나름 잘생겼다는 소리도 꽤 들었던 몸이건만.

하인즈 2세와 해리스에 이어 하인리히의 변한 얼굴까지 보고 나니 저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아니지! 이것도 전부 나잖아? 굳이 내 분신에게까지 자격지심을 품을 필요는···.’

그렇게 어지러워진 머리로 멍하니 검날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혼자 고뇌의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경. ···아니.”

성녀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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