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북부 산맥 (1)
툴크 왕국의 타라크에 자리 잡은 휴버트 상회는 나날이 번창하는 중이었다.
타라크 용병계의 네임드로 성장한 할리와 그의 뒤에 있는 교단의 위세를 이용해, 사업 초기에 다른 세력의 견제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하니 그것도 약빨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상회의 몸집이 커지기 시작하자 암중에서 들어오는 방해가 계속해서 늘고 있었다.
여전히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 이들은 없었지만, 은밀하게 가해지는 위협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이번에 대응할 수를 마련했으니, 앞으로는 그것도 나아지겠지.’
최근에 탈리아의 브로코슬락 클랜과 밀월 관계를 맺으면서, 다수의 뱀파이어가 타라크로 숨어들었다.
물론 클랜이 점거한 탈리아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항상 조심하며 음지에서만 움직여야 했지만, 한층 강화된 클랜의 뱀파이어들은 상회의 도움으로 별다른 문제 없이 녹아들 수 있었다.
‘거기다 이번에 타라크로 파견된 인원은 「정제혈정」이 은밀성 위주로 진화시킨 개체들이니까.’
일부러 그 방향성을 조절해서 정체를 감추는 쪽으로 특화했으니, 이쯤이면 잠입 및 공작에 특화된 부대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타라크에도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도 상당히 큰 규모로.
‘···앞으로 혼란이 다가올 걸 알고 있었으니 식량이나 기름, 병장기 같은 물자를 미리 선점하긴 했는데. 이건 상정했던 것 이상이군.’
상회의 집무실에서 휴버트가 긴급으로 전해진 서류를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상인에게 정보는 곧 생명.
빠른 정보 수집을 위한 체계를 갖추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썼던 그이기에, 이런 중요한 정보도 곧바로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이 정도 사건이면 이미 모르는 곳이 없겠는데.”
일개 상인인 그가 알 정도면, 이미 다른 곳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휴버트의 예상대로, 그것은 실시간으로 진행 중인 일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물자 빠뜨린 거 없나 다시 확인해!”
철그럭 철그럭!
두두두—!
평소와는 달리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타라크가 속한 아오니아 백작령의 군대가 일제히 북진을 시작했다.
또한 다른 도시는 물론 중앙의 영주 성에서 출발한 병사들도 영지의 최북단, 강철의 성채를 목표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였으니, 당연히 도시 내에 머무는 이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용병 길드나 술집 등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관련된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봐, 소식 들었어? 강철의 성채에서 용병들을 대규모로 모집한다던데. 군대는 이미 이동 중이고.”
“아아, 들었지. 북부 산맥의 몬스터들이 남하할 조짐을 보인다던가?”
“요즘 언데드의 출몰이다 뭐다 해서 안 그래도 뒤숭숭한데, 정말 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에이, 우연이겠지. 또 북부 산맥 몬스터들이 지랄 맞은 게 한두 번인가?”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직 모든 정보를 풀지 않았던지라, 심연에 관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번 소동도 그저 일시적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이거···, 저번에 비자르 파티에게 들었던 말이 신경 쓰이는데.”
“뭐? 뭔 정보라도 있나?”
“얼마 전에 산맥에서 막 돌아온 파티를 만난 적 있지. 그때 들었어. 갑자기 돌연변이를 만나서 일행들이 많이 다쳤다던가.”
“돌연변이? 그거야 몬스터들 잡다 보면 흔한 거 아닌가?”
“일반적인 돌연변이가 아니라, 마치 광견병에 걸린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는···.”
하지만 그들도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그런 이들도 군대까지 동원된 마당에 큰 문제가 생기겠냐는 마음은 같았으니.
영지에서 내건 막대한 보상에 홀린 이들이 하나둘 북부 강철의 성채로 향했다.
“이봐, 할리! 소식은 들었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우리도 한 번 가 볼까 하는데.”
그것은 할리와 함께하는 남부 전사 삼인방도 마찬가지였다.
휴버트 상회가 크기를 키우면서 많은 인재를 고용하자, 그들에게도 한층 여유가 생긴 상황이었다.
친구와의 의리로 지겨운 경비 일을 맡아주었을 뿐, 남부를 떠나 이곳까지 온 그들은 원래 몬스터 사냥과 같은 활동적인 임무를 더욱 선호했다.
“흐음, 북부 산맥이라···.”
온갖 소음으로 왁자지껄한 술집.
할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광기’의 영향을 받은 몬스터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마침 한차례 사냥을 마치고 강철의 성채에서 타라크로 돌아오려던 찰나에 심연이 열렸기 때문에.
그에 영향을 받은 몬스터가 등장한 것은 그 이후로도 상당히 시간이 흐른 후에 발생한 일이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휴버트를 통해 얻은 정보와 하인즈 2세가 클랜을 움직여 알게 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이번 일은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탈리아 왕국도 서쪽 마물의 숲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으니까.’
한스와 하인즈 2세, 할리까지 전부 마물의 숲에서 마음대로 활보한 경험이 있어 잘 체감하긴 힘들지만, 그곳은 원래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위험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광기에 감염돼 공격성과 생명력이 한층 강화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면, 왕국에 적잖은 피해가 생길 터.
‘그래서 진혈인 프리지아와 오보르를 비롯해 클랜의 정예를 그쪽으로 보내긴 했는데.’
그들은 탈리아 왕국의 병사들과는 별개로 직접 숲 안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통해 위험한 마물의 개체수를 줄이는 작업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북부 산맥은 마물의 숲보다 더한 곳이란 말이지.’
대륙 북쪽 지방 전체에 걸쳐서 이어진 거대한 북부 산맥.
이곳 툴크 왕국과 연결된 곳은 그중 일부 자락일 뿐이었지만, 매번 수많은 용병이 사냥을 나서고 있음에도 오히려 몬스터 개체수가 지속해서 늘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이미 여러 정보를 접한 국가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를 리가 없다.’
당장 아오니아 백작령의 군대가 그곳으로 향했지만, 곧 주변 영지의 지원군들도 속속 도착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이번 일도 그리 쉽게 끝나진 않으리라.
‘이제는 고위층들에게만 정보를 전해 일을 대처할 단계는 지났어.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민간에도 정보가 퍼지게 되겠지.’
불사왕의 부활과 심연이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앞으로 많은 혼란이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여러 곳이 흔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불사왕의 악명이 널리 퍼진다는 것은, 오히려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할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
곧 난리가 벌어질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는 건데···.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가자! 이 몸이 그런 자리에 빠질 순 없지! 으하하핫!”
“오! 역시 이래야 할리지!”
“오랜만에 스트레스 좀 풀겄구먼!”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부딪쳐보는 게 할리 스타일이 아닌가!
거기다 만약 정말로 강철의 성채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간 고생하며 탈리아에 구축해둔 휴버트의 기반마저 날아간다.
차라리 직접 나서서 상황을 컨트롤해 보는 게 낫겠지.
‘진짜 위험하다 싶으면 소환 해제하면 되니까.’
이제 정말 괴물 같은 육체를 가지게 된 할리가 위험할 일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그렇게 그는 위풍당당하게 술집을 나서 대로를 가로질렀다.
이미 타라크의 유명 인사가 되며 이곳 주민들에게 익숙한 존재였지만, 주변의 반응은 이전과 대동소이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슬 자리를 피한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할리는 슬쩍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벌거벗은 근육질의 상체와 짐승 머리 투구, 이빨 장신구 등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몸 곳곳에 새겨진 각인이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가슴과 턱 아래까지 뻗어 나온 화려한 불꽃의 문양.
이마부터 시작해 오른쪽 눈을 가로질러 뺨까지 이어진 폭풍과 번개의 문양.
오른팔의 야수와 왼팔의 교차한 도끼 문양까지.
그 각인들은 하나하나 따로 보면 각 요소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예술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아름다운 문양이었지만.
그것이 할리의 흉악한 몸뚱이와 조화를 이루자, 그저 그의 위압적인 모습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거기다 그간의 행보도 그의 악명을 떨치는 데에 한몫했다.
굳이 약한 자들을 찾아가서 괴롭히는 일 같은 건 없었지만,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들은 가차 없이 박살을 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너무 귀찮아지니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지.’
그것은 유명세를 얻게 되며 생긴 부작용이었다.
이 야만적인 용병계에서는 명성은 곧 힘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마당이었으니 외지에서 타라크로 흘러들어온 용병들이 하나같이 그를 찔러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몸뚱이를 보고도 귀찮게 들러붙는 시비와 도전, 심지어 습격까지.
그에 할리가 내놓은 해결책이 그것이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는 철저하게 짓밟아 놓는 것.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도록, 차마 그에게 이빨을 드러낼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할리는 적어도 이 타라크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그러면서도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딸랑— 딸랑—
남부 전사 삼인방과 함께 용병 길드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 그들을 반겼다.
깔끔하고 세련된 내부와 곳곳에 모여 저들끼리 떠드는 용병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죄다 이번 북부 산맥에 대한 것들이었다.
유례없는 규모의 모집이다 보니 모두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상태였다.
‘위험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대체적으로는 긍정적인 분위기군. 하긴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이니까.’
위기를 감지한 이들 중엔 불참하는 것을 넘어 아예 타라크 남부로 피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영지에서 내건 보상이 워낙 컸던지라 참여를 표명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 할리. 우리 차례다.”
잠시 기다리고 있던 찰나, 마침내 그들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렇게 일행들이 하나둘 의뢰 참가를 신청하는 와중.
“저··· 할리 님?”
창구에 앉은 젊은 남자 직원이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침 오늘 할리 님께 따로 들어온 지명 의뢰가 있습니다. 곧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릴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오셨으니···.”
“음? 지명이라고?”
그간 용병으로 활동하며 할리도 지명 의뢰를 많이 받아보았는데, 의뢰인 쪽에서 임무를 수행할 용병을 선택하는 지명 의뢰는 일반적인 방법보다 단가가 높았다.
길드는 중간에서 연결만 해 줄 뿐, 상세한 사항은 의뢰인과 용병이 따로 협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만큼 보안이 필요한 일이나, 특별히 난이도가 있는 임무에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흐음···, 지금은 강철의 성채로 향할 예정이었던지라 딱히 생각이 없는데. 그 건은 거절하도록 하지!”
막 목적지를 정한 마당이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임무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미안하지만 의뢰를 거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 그게···. 거, 거절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예상외의 반응에 할리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원래 이렇게 임무를 강요하지 않는 게 규칙일 텐데.
“그게 무슨 말이지? 시간 없으니까 똑바로 말해 달라고, 친구!”
“예, 옙! 그··· 직접 맡기신 분은 다른 분이지만, 의뢰인으로 등록된 이름이···!”
경직된 채 큰 소리로 말하던 직원이 멈칫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할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타르민 아오니아 님···.”
그것은,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즉, 이 영지의 영주님이십니다.”